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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병

- 휴 -

* 소재 주의

*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현실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 특정 종교, 문화적 상징을 비하하려는 의도 역시 없습니다.

* 파디샤= 황제의 호칭

00:00 / 05:01

“국왕의 인장은?”

“송구하오나 아직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살아남은 왕족의 저항이 격렬하여-,”

“그만.”

몸을 뒤로 젖힌 채 눈을 반쯤 감고 있던 황제가 신하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신하의 코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왕국의 패배, 국왕의 항복. 다 좋다. 그러나 황제가 장군에게 바란 것은 그따위 시시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방해하는 자는 목을 베어서라도 가져오라 하지 않았던가?”

황제가 묻는다. 말갛게 웃으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러자 신하는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그의 앞에 무릎 꿇는다. 파디샤,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부디 자비를…. 산만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제 몸뚱아리의 반밖에 되지 않은 꽤나 앳된 얼굴의 청년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다. 꽤나 믿기지 않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젓는다. 장군, 나를 너무 못된 사람 취급하는군. 나는 내 사람을 매몰차게 내치는, 그런 못된 놈이 아니란 말이야.

동그랗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하늘을 무서운 줄 모른 채 끝도 없이 위로 치솟는다. 하늘이 무서우랴, 그 위의 있지도 않은 신이 무서우랴. 그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다.

이름은 명헌이요, 성은 이라. 그는 카라쿠시 산맥 이남 아대륙의 영원한 지배자, 영원한 태양. 티미르 제국의 젊은 황제였다.

“자, 그럼 어서 일어나서 안내하게.”

“파디샤 무슨 말씀이시온지….”

“앙탈을 부린다는 왕족한테 안내하게.”

자네가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여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웃는 낯이었건만, 언제 그랬냐는 듯 명헌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로 신하를 내려다보는 명헌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신하는 고개를 들어 명헌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이내 속으로 작게 탄식을 내뱉는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황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비단 명헌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명헌의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또 그의 아버지도 모두가 다 그러했다. 티미르의 황족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꼭 누군가 하나는 피를 보고야 만다. 신이시여, 자비를. 신하가 속으로 누군가의 무운을 기원했다.

티미르 제국의 황가에는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피를 타고 내려오는 황가의 재능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세대를 타고 아래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머리가 비상했고, 또 누군가는 힘이 좋았다. 저마다 뛰어난 분야는 달랐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티미르가 지금까지 아대륙의 강건한 지배자로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 역시 있는 법. 황가의 자손들은 대대로 비상했지만, 동시에 시한폭탄과도 같아 위험한 인물로 평가받곤 했다. 눈부신 재능이 개화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광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능력이 뛰어날수록 그 증세는 더 심했다. 피를 타고 흐르는 광증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후손들 역시 적지 않았다.

명헌은 그런 티미르 황가의 젊은 황제였다. 그것도 황실 역사상 최강의 정복 군주 소리를 듣는, 젊은 황제. 명헌은 티미르의 자손답게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짐승과도 같은 오감을 지니고 있어 보통의 인간들이 감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들을 알아채곤 했다. 그리고 직감 역시도 뛰어나 매번 상상 이상의 것들을 꿰뚫어 보곤 했다.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아대륙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어 갔다. 그러나 그 힘에는 언제나 반동이 있었다. 그가 힘을 발휘하면 할수록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파 왔기 때문이다. 대륙을 뒤져 온갖 귀한 약재를 공수해 와도 그의 증상에는 차도가 없었다. 몇 년간의 고통 끝에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 고통은 제 핏줄을 타고 끝없이 내려오는 축복이자 저주인 것이라고.

그나마 전장에서는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내가 적이 되고, 적이 곧 내가 되는 아수라장 속에서 명헌은 아이러니하게도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눈앞의 적을 베어내는 데 몰두하다 보면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은, 그깟 저주는 별것도 아닌 게 되는 듯했다. 생과 사를 가르는 전장에서 그런 고통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명헌은 전장을 나돌았다. 미친 척하며 대륙을 횡단했고, 미친 척하며 산맥 이남의 모든 영토를 티미르의 밑에, 제 발밑에 두었다. 온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명헌은 생각해 보곤 했다. 이 피가 나의 것이던가? 아니면 내가 죽은 자들의 피이던가? 뭐가 됐든 징그럽기 짝이 없군.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악을 쓰는 제 처지가 징그러웠다. 그러나 제게는 이런 선택지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던 제 형이 목을 매달아 죽어버린 것처럼, 어쩌면 저 역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헌이 밖으로 나돌면 나돌수록 사람들은 명헌을 경외시했다. 티미르가 부귀해지고, 강건해지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티미르의 황제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만 갔다. 피에 미친 황제, 자비를 모르는 냉혈한, 괴물…. 명헌은 제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그들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피에 미친 황제?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명헌이 말에 올라타며 쓰게 웃었다.

 

 

“파디샤, 명을.”

“-죽여.”

“분부대로.”

마지막까지 발악을 했다기에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사내인 줄로만 알았건만. 실상은 피에 절여져 헐떡이면서도 제 손에 쥐고 있는 국왕의 인장을 끝끝내 놓지 못하는 미련한 사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쯧, 곱게 죽을 수도 있었는데. 명헌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자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얼굴을 치켜들어 명헌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죽기 직전인데도 사내의 눈빛은 형형하기 짝이 없었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눈빛. 사지에 몰려 있어도 결코 제 뜻을 굽히지 않는, 곧고 올바른 기세. 그 기세 앞에서 명헌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군이건, 일개 병사건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 집중되고, 명헌의 명을 받은 경비 대장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든 채 서서히 사내에게 다가간다.

사내는 죽기 직전이지만, 뜬 눈을 감는 법을 모르는 듯했다. 하, 끝까지 고귀하게 굴겠다? 명헌이 이죽거리며 사내의 눈을 바라본다. 두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치고, 그 순간.

“잠깐!”

명헌이 벼락같은 목소리로 경비 대장을 제지한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명헌을 바라보고, 명헌의 눈빛 역시 세차게 흔들린다. 어째서 경비 대장을 제지했을까. 어째서 저 왕자를 죽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이 두통이 가신 걸까.

명헌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대는 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간다. 사내의 눈빛은 여전히 건방지기 짝이 없다. 그러나 명헌은 그런 그의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고귀한 태도를 유지하기란 제법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사내는 명헌의 마음에 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너, 이름이 뭐지?”

“…최동오.”

“너 대체 정체가, 아니…아니 이게 무슨?”

망국의 왕자는 동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명헌은 사내의 턱을 잡아 고개를 치켜들게 한 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아니, 이상한 일이잖아.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러나 명헌의 마음 한편에서 피어오르던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갔다.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명헌의 두통이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끝에서는 시원한 소나무 향까지 맴돌고 있었다. 이 주변 어디에도 소나무는 없는데. 설령 소나무가 있다 해도 이 사내가 흘린 피 때문에 청명한 향이 이토록 선명할 리가 없는데.

명헌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든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티미르의 핏줄에는 특별한 능력이 타고 흐르는 것처럼 이 역시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중 하나일 테다. 명헌은 이 자를 죽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게는 이 사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죽이지 않고 황궁으로 데리고 간다. 죽지 않게 숨만 붙여 놔.”

명헌은 꿋꿋이 고개를 들고 있는 사내를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당황한 신하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으나 저것도 잠시일 것이다. 명헌의 명령은 곧 하늘이 내린 명령이니 저들은 그저 명헌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을 테지.

시원한 소나무 향이 계속해서 코끝을 맴돌았다. 명헌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 향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간 살아오며 이토록 상쾌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청명한 향이 어지럽던 머릿속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는 것 같다. 저주처럼 저를 쫓아다니던 끔찍한 두통 역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때로는 믿기지 않는 일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명헌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신을 처음으로 떠올리며 생각했다. 드디어 내게도 진정한 축복이라는 걸 내려줄 생각을 하신 거냐고. 그리고 이것이 당신이 준 선물이라면 나는 절대 뺏기지 않을 것이라고.

00:00 / 03:37

동오는 제 뒤로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티미르의 수도로 온 지도 어언 이 주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황궁의 사람들은 여전히 저를 볼 때마다 신기한 눈빛을 보냈다. 황제가 살려둔 몇 안 되는, 아니 실질적으로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는 존재라 그런가. 사람들은 저를 무슨 전설 속의 존재처럼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저들은 제게 손끝 하나조차 대지 못했다. 망국의 왕자에게는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티미르의 젊은 황제. 이름이 명헌이라 했던가. 아버지를 죽이고, 제 형제를 죽인 사람. 기어이 카라쿠시 산맥 이남의 모든 것을 제 발밑에 두고야 만 사람. 명헌을 향한 동오의 마음은 꽤나 복합적이었다. 제 가족을 죽인 원수였으나 동시에 제 목숨을 살려낸 사람.

“식사는?”

“조금 전에 먹었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아직 식사를 들지 않았으면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아쉽게 됐군.”

그러면서도 제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사람. 동오는 명헌이 계속해서 제 뒤를 쫓는다는 것을 알았다. 제 뒤를 따라붙는 수많은 시선 중 가장 노골적이고, 가장 농밀한 시선인지라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다만 동오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뿐이다. 왕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왕가의 자손들 역시 대부분 죽거나, 후유증을 남길 만한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중 유일하게 제 몸 하나 건사한 채로 살아남은 것은 동오 하나뿐이었다. 제게는 더이상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이 정도의 패는 쥐고 흔들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명헌이 저의 수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으니 이 정도의 심술은 부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고.

다만 조금 우스웠던 것은 이곳이 티미르의 황궁이라는 사실 정도일까. 황제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고작 망국의 왕자 하나에게 말을 붙이지 못해 주변을 맴돈다니. 얼마나 우습고, 가소로운지.

저를 강제로 끌어다 옆에 앉힌다 해도, 하물며 동침을 요구한다 해도. 동오는 그의 요구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저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동오는 명헌을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오묘했다. 대체 왜? 누굴 위해서? 설마…. 아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혹시나'를 지워낸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동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황궁을 찬찬히 거닐었다. 보통 같았으면 아닌 척 제 뒤꽁무니를 쫓았어야 했을 황제가 오늘따라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항상 보이던 사람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동오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황제의 침소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업무를 보는 중이겠거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황제의 침소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온갖 굉음이 들려 왔다. 물건이 부서지는 것 같기도 했고, 악에 받친 목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동오가 조마조마해진 마음으로 황제의 침소 앞에 다다르자,

쨍그랑!

황제의 침소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동오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가 그를 말렸다.

“들어가시지 않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어째서?”

“티미르의 황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티미르 황가? 황손들이 대대손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 않았–”

아. 동오가 탄식을 내뱉는다. 티미르 황가의 자손들은 대대로 비상했지만, 동시에 시한폭탄과도 같아 위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동오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이런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오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왕국의 1 왕자로서 왕국을 이끌어나갈 재목으로 존경받던, 형이. 그는 머리가 비상했고,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앞날을 잘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매 순간 괴로워했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 중 가장 옳은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괴로워했으며, 혹시나 제가 내린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까 항상 두려워해야만 했다. 제가 내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해 절망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동오는 명헌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잘 알았다. 알 수밖에 없지. 저는 이런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는걸.

“왕자님!”

“이거 놓게. 내가 아니면 누가 들어간단 말인가.”

그리고 형에게 형수가 필요했듯 지금의 명헌에게는 제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비릿한 피 냄새였다. 피? 놀란 동오가 다급히 근처를 둘러 보자, 침소의 바닥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명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파디샤!”

동오가 명헌을 향해 다가가자, 명헌은 동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괜찮다는 듯이, 더 이상 다가올 필요가 없다는 듯이. 명헌은 제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오의 근처를 맴돌며 광증이 조금 진정된 줄로만 알았건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듯했다. 명헌은 제가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의 끈을 놓게 된다면 눈앞에 있는 동오를 상처 입힐 것이라는 사실 역시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동오가 제 근처에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 어린 시절 제가 걱정되어 찾아온 유모에게 큰 상처를 입힌 뒤로 명헌은 광증이 심해지려 할 때마다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곤 했다. 차라리 이 광증이 저를 좀먹어 저를 해하게 할지언정, 남을 해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궁 안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 제 눈앞에 있는, 동오 역시도.

“…누가 들어오라고 했지?”

나가. 당장 나가! 명헌은 이제 거의 악을 쓰다시피 하며 동오를 향해 소리쳤다. 화병을 깬 것인지 명헌의 오른손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벌게진 눈가, 한껏 일그러진 미간, 찢어진 입술…. 명헌의 얼굴은 고통을 참으려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동오는 명헌의 고함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명헌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오는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존재가 아니었기에 명헌이 느낄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동오는 명헌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절망스러워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제 형이 역시 그러했으니까. 동오의 형은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은 두통이 찾아올 때면 바닥을 구를 정도로 괴로워하곤 했다. 아마 명헌 역시 그럴 테지.

“파디샤, 무례를 용서하세요.”

동오는 이제 조심스레 손을 뻗어 명헌을 끌어안는다. 긴장으로 뻣뻣해져 있던 명헌의 몸이 마침내 동오의 품 안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동오의 손길 아래서 명헌의 몸이 반사적으로 나른하게 풀어졌다.

“이게 대체…….”

명헌이 동오의 품 안에서 흐느끼듯 읊조린다. 그러자 동오는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제게는 형이 하나 있습니다. 형님도 파디샤처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계셨지요. 마찬가지로 파디샤처럼 괴로워했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희한할 정도로 형수 앞에만 서면 괜찮아졌습니다. 형수가 곁에 있는 한 형님은 괴롭지도,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

“무어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형수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아마 저 역시 파디샤께 평온을 되찾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저를 보자마자 혼란스러워하시는 모습이 꼭 형수를 처음 만난 저희 형님 같았거든요.”

그리 말하는 동오의 눈에는 애틋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 절대적인 애정. 그 모든 것들을 듣고 있자니 괜스레 입안이 썼다. 명헌은 피 맛이 나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나에게도 형님이 하나 있었지.”

“…….”

“형님도 나처럼 머리가 좋았어. 아니, 어쩌면 형님이 나보다 더 똑똑했을지도.”

“…….”

“그래서 그런가, 형님은 나보다 더 괴로워했어. 흔히 말하는 티미르의 광증이, 나보다 더 심하게 나타났거든.”

“…파디샤.”

“하루는 수업이 끝난 뒤 형님을 뵈러 집무실에 찾아갔는데 형님이 천장에 매달려 계시더군. 어쩐지,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더라고. 형님은 집무실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거야. 광증을 견디지 못하고.”

담담하게 제 형의 이야기를 꺼내는 명헌의 얼굴에는 일말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형님을 향한 동정이 느껴진다면 모를까, 슬픔이나 그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동오는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명헌의 슬픔은 때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래서.

“그걸 보고 나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

“…….”

“그래서 형님의 시체 앞에서 맹세했지. 형님의 아이가 황위를 잇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죽지 않고 버텨보겠다고.”

“세상에, 파디샤….”

“그래서 미친 척하고 황궁 밖을 나돌았어. 온갖 피가 튀는 전장 속에서는 적어도 그 광증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자네 가족의 일은… 미안하게 됐어.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그냥… 그렇다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도 형님처럼 목을 매달아 죽어버릴 것 같았어.”

동오는 옅은 한숨을 뱉으며 명헌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때를 잃은 슬픔은 결국 스스로를 좀먹고 만다. 형의 죽음이라는 그늘 아래서 명헌은 결국 쫓기듯이 황제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명헌의 형에게 제 형수 같은 존재가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명헌의 고통을 줄여줄 누군가가 존재했더라면. 그랬다면 현재는 다르게 흘러갔을까? 동오가 잠시 생각해 본다.

명헌은 제 등을 도닥이는 동오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동정이 이리도 기꺼운 것이었구나. 명헌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힘은 절대적이나 파괴적이고, 동정은 얄팍하나 이토록 안온하다. 고작 이게 뭐라고 나를 숨 쉬게 하는지. 명헌이 축축한 숨을 내뱉는다. 티미르의 젊은 황제는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명헌의 상태가 한층 진정된 것을 확인한 동오는 명헌의 상체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자 명헌이 동오의 손을 붙잡아 동오가 팔을 빼지 못하게 했다.

“시간이 많이 됐습니다. 이제 주무셔야지요.”

“가지 마.”

명헌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저를 침실 노예로 쓰시기라도 하시게요?”

“…그럴까?”

명헌이 짓궂게 웃으며 동오의 아랫도리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다. 명헌의 장난에도 동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겁니다.”

“–뭐?”

“저는 어디까지나 죽어야 했을 목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를 기어이 살려두시고는 이렇게 파디샤의 곁에 두시니.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파디샤가 무서워 앞에서는 말하지 못해도 뒤에서는…”

강직한 눈빛을 한 동오가 명헌의 곁에서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간다. 곧고 바른 눈빛.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말. 망국의 왕자가 감히 바른말을 간언한다고 황제가 목을 칠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그럼에도 동오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미울 법도 한데. 그럼 저런 말을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될 텐데.

명헌은 동오의 말을 듣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기어코 너의 곧음으로 나를 함락시키는구나.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신경 안 써.”

“파디샤.”

“나는 티미르의 황제, 티미르의 파디샤. 황실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난 자. 그치들의 말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지.”

“허나 파디샤–”

“하하! 농담이야.”

동오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결국 명헌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귀한 손님을 이런 엉망인 데서 재울 수는 없지. 그런 그의 말에 동오는 못 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히 주무세요, 파디샤.”

“잘 자.”

동오는 황제의 침실을 나서기 직전, 명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편히 불러주세요. 명헌은 그것이 곧 동오의 허락임을 깨닫는다. 그러지. 문을 닫고 나서려는 동오의 등에다 대고 명헌이 나직이 대답했다.

연민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00:00 / 02:33

동오는 이제 티미르의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곳에 머문 지도 어언 반년이 다 되었다. 저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눈빛들 역시 제법 사그라든 참이었고, 명헌의 광증 역시 옛날에 비해 차도가 훨 좋아진 참이었다.

그렇게 황궁에서의 생활이 제법 익숙해졌을 무렵, 동오는 명헌이 다시 전쟁에 출정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동오는 진심으로 저로 인해 명헌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라니? 그는 더이상 광증에 잡아 먹힐 이유도, 전장에 나가 피를 뒤집어쓸 필요도 없는데 어째서? 당황한 동오가 명헌을 찾아 나서기 위해 방 밖으로 나서자, 그곳에는 멋쩍은 얼굴을 한 명헌이 서 있었다.

“파디샤, 전쟁이라니요?”

“미안. 그렇게 됐어.”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으시잖아요. 파디샤가 광증으로 고통받으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복 전쟁을 펼치실 이유가 있는 것도–”

“약속했거든.”

“…….”

“형님과 약속을 했어. 모든 것이 안정되고 나면, 카라쿠시 산맥 너머의 영토도 티미르의 것으로 만들자고.”

카라쿠시 산맥 너머는 형님의 꿈이었거든. 명헌의 말에 동오는 그저 한참을 말없이 명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는 명헌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다치지 말고 몸 건강히 돌아오라는 말밖에 없다. 그 순간 동오는 제 처지를 깨닫고야 만다. 아, 나는 저 사람의 아무것도 아니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 걸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다치지 마시고요.”

마음이 복잡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동오가 딱딱하게 굳은 입매로 명헌에게 행운을 빌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애써 뒤로 한 채, 부디 그가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불안감이 저의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라면서.

동오의 얼굴에서 걱정을 읽어낸 명헌은 괜찮다는 듯 쾌활하게 웃으며 동오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동오는 애써 명헌을 따라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것은 파디샤의 뜻대로. 동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왜 항상 이런 걱정은 기우에 그치지 못해서. 왜 항상 현실이 되어 나를 슬프게 만들어서…….

 

동오는 저를 깨우는 다급한 손길에 한밤중에 눈을 떠야만 했다. 시중을 드는 하인 하나가 동오에게 파디샤의 귀환을 알렸다. 그러나 하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동오가 황급히 방 밖으로 뛰쳐나가자, 피투성이가 된 명헌이 복도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파디샤!”

“…동오야.”

“그만, 그만 말하세요. 피가, 피가…!”

당황한 동오가 횡설수설하며 명헌의 몸을 붙잡는다. 그러나 분수처럼 치솟는 핏줄기는 끝내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흥건하게 고인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며 동오는 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명헌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기대게 한다.

“왜 그렇게, 슬픈…표정이야?”

“…파디샤.”

이곳에 와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명헌의 여린 목소리. 그 목소리에 동오는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다. 동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명헌의 볼을 쓸어내린다. 명헌은 옅게 웃으며 동오의 손바닥에 제 볼을 가볍게 비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길 바랐어. 명헌의 말에 동오가 축축한 탄식을 내뱉는다.

“…다음 대 황제는 내 조카가 될 거야.”

“…….”

“내가 밉더라도, 윽…, 조금만 봐줘.”

걘 나랑 다르게 착한 애거든. 자조적으로 말하는 명헌의 몸이 빠른 속도로 식어가고 있었다. 동오는 손바닥을 딱 붙여 온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명헌은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뒤였다. 비탄에 빠진 동오가 허탈한 얼굴로 명헌을 내려다보자, 명헌이 손을 들어 동오의 빨개진 눈가를 매만진다. 그렇게 두 눈이 마주치고, 아…….

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리, 이곳에서. 티미르의 젊은 황제는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어라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티미르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이한 능력이 그러했고, 최동오와 이명헌의 관계 역시 그러했다. 이 역시 그런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동오는 처음으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나를 이 운명에 가둬둘 거라면, 나에게 힘이라도 주셨어야지. 나를 이 굴레 속에 가둘 거라면, 내가 기어코 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 거였다면. 나에게, 나에게 저 사람을 도울 힘이라도 주셨어야지.

동오는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망국의 왕자라는 제 처지가,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제 처지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미안해.”

“파디샤, 안 돼요. 제발, 파디샤!”

“너마저 불행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용서하지 마. 사랑하지도 마. 구태여 족쇄를 차려 들지 마. 마지막 힘이라도 짜내듯 명헌이 동오를 향해 속삭였다. 티미르의 젊은 황제가 망국의 왕자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 그러나 동오는 제가 그 부탁을 들어 줄 만큼 착한 성정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명헌이 저의 수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으니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지 않겠는가.

“…사랑해요.”

동오가 흐느끼며 명헌의 이마에 제 입술을 묻는다.

 

 

 

저 멀리서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티미르의 태양은 멈추지 않고 새로이 떠올라 내일을 알릴 것이다. 황제의 죽음은 잠시일 뿐 또 다른 황제가 등극하여 티미르의 역사를 써내려 갈 테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동오에게 중요치 않았다. 동오의 태양은 이제 그만 저물어 버렸으므로.

세상에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때로는 믿기지 않는 일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그렇다면 열사병처럼 앓은 이 기억들 역시도 믿어야 하는 것들이겠지.

 

아, 당신은 기어코 당신의 솔직함으로 나를 함락시키는구나. 동오가 명헌을 끌어안은 채 속삭인다.

 

또 다른 연민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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