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래블링 아웃사이더
-비잠-
1.
전쟁이 황무지에서만, 폐허에서만, 움푹하게 파인 참호와 텅 빈 콘크리트 건물과 강을 끼고 굴곡진 들판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른 누구보다도 동오만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는 아직 폭격에 그을린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읍내의 담벼락들과 아직 재건되지 못한 시청역을 오가면서 자랐으므로. 도시가 함락되고 건물이 무너졌기 때문에 혹자는 부서지고 쪼개진 시멘트 조각과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폐건물의 잔해와 철골 뼈대를 드러낸 채 앙상해진 외벽들의 틈에서 총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접전이 공터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은 그 교전을 위해 많은 것들이 차례차례 쓰러져 온 탓이다……. 그런 사실을 아주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하기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황량한 건물 앞에 동오는 서 있었다. 본래 삼 층짜리였으나 꼭대기 층의 기둥은 절반 정도 내려앉아 천장이 꺼졌고 창문은 하나같이 깨졌으며 벽과 문에 송송 뚫린 탄알 자국으로 햇빛이 살처럼 내리박혀 오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전란 중의 대치점이었다. 방과 방을 구분하던 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내용물이 튀어나온 소파와 깨지고 녹슨 세면대가 살풍경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동오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변을 살폈다. 손이 기민하게 소총의 노리쇠를 닫았다. 방아쇠에 얹힌 손가락이 평소보다 축축했다.
창문 너머로는 건물째 터져나가 잔해만 남은 빈터가 보였다. 바닥에 빼곡하게 깔린 깨진 유릿조각이나 조각난 벽돌 따위는 시야를 막을 만한 바리케이드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 너머, 유리가 반쯤 떨어져 나간 창틀 사이로 적의 인원과 동태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옥상에 만일 저격병이 있다면 사정거리는 능히 확보할 만큼의 거리에, 이곳보다는 조금 더 본래의 형태를 갖춘 또 하나의 볼품없는 건물이 서 있었다. 포격이나 기관총이 온다면 분명 저편에서 올 듯했다. 동오는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수십 번 받아 보았고 그때마다 실제 상황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이 충분치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장갑을 끼고 있기를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손에서 총이 미끄러졌을 것이다. 약실 안에 틈 없이 채워 넣은 탄약이, 이번에는 진짜였다. 사람을 향해 쏘면 우스꽝스러운 파란 페인트가 터지기보다 살을 꿰뚫고 근육을 찢는 진짜 병기 말이다. 동오가 짊어진 군장의 무게나 동오가 신은 군화의 두께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탄창의 무게가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깨가 무거웠다. 동오가 쥐고 있는 무기가 진짜라면, 그들이 들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섬세하게 갈고닦은 기민함만큼이나 곤두선 긴장이 그를 그림자처럼 짓누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땀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고요한 공간이었다. 건물 안의 희뿌연 공기는 바람 한 점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 동오는 심호흡 대신 숨을 죽였다. 만일 침묵과 함께 전투가 다가오고 있다면, 동오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참호전에 가까웠다. 몸을 낮추고 정면을 조준해야 했다. 총구를 올리지 않고, 평정을 잃지 않고. 동오는 조용히 철모의 끈을 풀었고, 무릎을 낮추며 허리를 숙였다. 소총을 받치는 손의 형태와 침이 목젖을 넘어가는 감각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명확해졌다.
동오는 아직 정식 소위조차 아니었다. 사관생도로서는 연대장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임관을 받기 전이므로 무의미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변명할 수는 없었다. 근 몇 달 간은 당장 전선이 크게 밀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전시였다. 동오는 구태여 총을 고쳐 쥐지 않았다. 준비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불필요한 습관 따위 그에게는 없었다.
작열하던 태양이 기울었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만큼 대치도 이어지고 있었다. 동오는 집중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준비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불필요한 습관 따위는, 그에게는 없어야 했다.
2.
동오와 같은 기수의 생도여단장은 명헌이 되었다. 물론 반발은 없었지만, 그것이 비단 그들 모두가 상명하복에 익숙해진 군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여단의 크기에 맞먹는 네 기수의 사관생도들을 통솔할 사람의 이름으로 이명헌이라는 세 글자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명헌에게는 조금 별난 구석이 있기야 했다. 군인의 말투는 다 똑같다는데, 사석에서 명헌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것도 다 옛말 같았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문제였다. 베시, 뿅, 삐뇽, 다시 뿅. 명헌의 어미는 고리타분한 ‘다’나 ‘까’가 아니라 그런 단어들로 끝났다. 물론 조교나 교관이 동석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동 기수의 전원은 명헌의 그런 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명헌의 그런 면을 지적하거나 일러바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버릇은 명헌에게 흠집조차 아니었다. 우두머리로서 이명헌에게는 결격 사유가 없었다. 손 안의 쪽지를 펼치듯 수많은 생도들의 특기를 파악하고, 그들을 적소에 배치하는 일을 마치 제 수족 다루듯 했으므로. 그런 이명헌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만큼 훌륭하게 생도들을 이끌 것인가?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명헌은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으므로. 그의 지휘 하에 놓이는 경험은 각별했다. 충성이나 경외와 같이 또래에게 품기에는 너무 무거운 감정이 아니라, 오직 그 한 줄의 의문만으로 명헌은 잘 정렬된 예비 여단 하나를 그 아래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면, 이명헌이 아니고서야 누가 할 것인가? 누군들 이명헌만큼 뛰어난 통솔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적임자의 이름을 읊는 소리가 즉각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 오직 그 사실만으로도 이명헌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다소 별난 구석이 있다는 것쯤이야 기타란에 짤막하게 덧붙을 특이사항 정도로 상쇄할 수 있었다. 한 교관은 도리어 명헌의 그런 점을 높이 사기까지 했다. 필연적인 몰이해를 동반하는 괴짜 같은 면모를 지니고도 네 개 연대 규모의 생도들로부터 꾸밈없는 지지를 받는다는 진실이, 역설적이게도 명헌의 지휘 능력을 단번에 증명했으므로.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 아니라 사관학교였다. 훌륭한 장교는 필요할지 몰라도 역사적인 맹장이 절실하지는 않았다. 순종적이면서도 직관적인 군인은 언제 어디에나 필요했으며 반드시 치열한 전선의 군영에만 있지는 않았다. 평화로운 땅에도 군대는 존재했다. 사 년간 군인의 삶을 살고 군인의 삶을 배우다 임관한 장교들도 대개는 평생 총탄이 빗발치고 지뢰가 폭발하는 전방의 경계를 밟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명헌 역시도, 그 넘치는 책략가로서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전술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교관으로 파견된 영관마저 그런 말을 했다. 명헌은 그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부지런히 공동 숙소로 돌아와 뿅, 하며 말문을 열기 전까지는 그랬다.
동오는 명헌과 같은 사관생도였고, 직책상으로는 대강 제3연대장쯤 되었으며, 명헌의 룸메이트였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덟 학기 내내 그들은 같은 방을 썼다. 어린 시절의 연을 생각하면 퍽 희한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오는 명헌과 한 방을 쓰는 일이 썩 기꺼웠다. 과거의 인연을 생각지 않더라도 명헌은 무던한 편이었고, 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점은 동오와 비슷했다. 동오보다는 명헌이 더 특별한 편이었지만.
오늘도 헛소리, 뿅.
문을 닫자마자 목소리를 낮추며 명헌이 중얼거렸다. 동오는 헛웃으며 맞장구쳤다. 명헌은 어떤 일들에는 너그러웠고 어떤 일들에는 신랄했다. 명헌에게 안온한 여생을 들먹이는 일은 후자에 가까웠다. 명헌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기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사관학교를 졸하고도 전장에 발도 붙여 본 적이 없는 군인이란, 물론 아주 일상적인 대명사였지만, 이 시기에 주워섬기기에는 너무 낙관적인 소리였다.
3.
동오와 명헌은 전쟁 세대의 끝물에 태어났다.
그들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전국을 집어삼킨 전쟁의 불씨도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들을 낳고 기른 이들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수도와 국경을 재건하느라 바빴다. 아주 어릴 때에야 공습령에 벌벌 떨며 지하 벙커에서 숨을 죽이기도 했다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한 사람 몫을 간신히 할 수 있을 만큼 자라나고 나서는 그런 일도 그다지 없었다. 그들 세대는 모두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 황폐해진 땅을 개간하고 폭격이 떨어졌던 땅에서 뛰놀며 자랐다.
동오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 라디오에서 종전 선언이 들려왔다. 동오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어렸지만 전쟁의 종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만한 나이였다. 그것은 더 이상 바다 건너에서 전투기를 격추하고 잠수함을 가라앉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치직거리는 잡음을 피해 라디오의 주파수를 열심히 맞추어도 어디에서 교전이 있었고 다른 어디에서는 전선이 밀려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먼 나라의 최전방으로 파견된 이웃집 형이 홀연한 항아리에 담긴 채로 돌아오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동오의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동오는 전쟁이 없었다면 분명 그보다는 젊은이가 많았을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멀리에서 온 군인들이 수 년 전 이미 물러간 후로는 전쟁의 마수도 더는 이 작은 산골까지 뻗치지 않았다. 동오가 일손을 거들 만큼 자랐을 무렵에는 타 버린 전답들도 고랑마다 낟알이 넉넉히 맺히는 경작지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니 바다 건너에서 들려온 항복 선언은 일단 동오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동오는 동네 형이 물려준 낡은 자전거에 새 체인을 걸었다. 붉게 녹슬어 뻑뻑했던 페달 이음새를 닦고 바퀴에 바람을 넣었다. 도색을 새로 할 여유는 없었지만, 흠집이 나긴 했어도 그런대로 번듯한 자전거였다. 동오는 아침마다 그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이제 그곳은 임시 개방이라는 거창한 현수막을 달고 천막이 줄지어 놓인 폐건물에서 썩 그럴듯한 책걸상들이 늘어선 컨테이너 교실들의 무리가 되어 있었다. 동오는 여름날이면 증기가 펄펄 끓는 찜통처럼 더위가 엄습하는 그곳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더하기와 빼기를 배웠다. 나이가 찬 형들도 모두 같은 수업을 들었다. 동오의 마을에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선생이 부임하지 않았다.
옆집 형이 다리를 잃은 채 목발을 짚고 돌아왔다. 오래 소식이 없어 가족들을 걱정시켰던 뒷집의 아저씨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자식들과 눈물의 재회를 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그 두 명이 다였다. 아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낸 집집마다 현관 앞으로 고이 봉인된 유골함이 도착했다.
그로부터 이태 후, 일찍이 아들의 군번줄을 돌려받은 가족들이 수도에서 열린다는 큰 합동장례식에 갔다. 지글거리는 화면이 선명한 분홍색으로 번지는, 마을에 한 대뿐인 구형 텔레비전으로 생방송 중계가 나왔다. 다들 마루에 모여 앉아 그것을 보았고, 동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전에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을 만큼 나이든 어른들은 국가유공자들의 장례식치고 그 의례가 조촐하다고 했다. 하지만 동오의 또래들은 태어나서 그렇게 웅장한 예식은 처음 보았다. 옷을 차려입은 군인들, 울려퍼지는 국가, 각 잡힌 의례, 시든 국화로 뒤덮인 무대 같은 것들을. 그 방송을 보더니 멋모르고 군인이 되겠다고 외치는 녀석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게 동오는 아니었다.
전쟁 중에 끊겼다가 다시 임시로 운행하기 시작한 버스 노선 중에 하루에 두 대 오는 파란 버스가 있었다. 보통은 읍내로 나갈 때 타는 버스였지만 한 시간 반을 견디며 종점까지 가면 가까운 도시의 번화가 근처에서 내릴 수 있었다. 동오는 주말이면 아침 일곱 시 반 첫차를 타고 나가 밤 여덟 시 반이면 차고지에서 나온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동오의 동네에서 그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개 읍내에 다시 서기 시작한 오일장이나 번화가에서 복원되고 있는 사치품 상가 따위에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오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왕복으로 서너 시간이 걸리는 동오의 강행군은 오직 도에 하나 있는 대형 스타디움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곳은 전란 중에 긴급 대피소로, 주둔했던 군이 철수한 다음에는 난민 피난소로 쓰이던 장소였다. 규모는 실내 체육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컸지만, 텐트와 침낭이 난무하고 의료용품과 최소한의 식량을 보급하던 곳이므로 체육관으로서의 쓸모는 희미해져 있었다. 바닥에 고무 테이프로 대강 그어져 있던 선들은 거의 다 지워졌고, 점수를 표시하던 전광판 따위는 떼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도 아직은 관중석이 있고 그물이 달려 있었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한적하기도 했다. 동오는 일 년 동안 용돈을 모아서 산, 이제 막 수입되기 시작한 공산품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그곳에 갔다. 그러고는 광활하고 황량한 경기장에서 공허하게 울리는 드리블 소리를 들었다. 농구공은 우둘투둘하고 무겁고 두꺼웠다. 벽을 맞고 튕겨나오는 공 소리도 꼭 그만큼 묵직했다.
농구는 과거의 유물이었다. 동오처럼 전쟁의 파란이 한차례 휩쓸고 지난 땅에서 태어난 어린애들은 진짜배기 농구 경기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 농구 경기 하나만으로 전국민이 열광하고 표가 족족 매진되는 세계는 아버지로부터 가끔이나 들어 본 별세상 같았다. 동오가 본 농구 경기는 이제 부품이 없어 수리조차 불가능한 구형 비디오플레이어에 족히 이십 년은 되어 필름이 다 늘어날 것 같은 비디오테이프를 넣어 재생한 결과물이었다. 빛이 바래고 화면이 조각조각 열화되고 응원 소리조차 소음처럼 깨져 나가는 화면으로부터 동오는 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농구 규칙조차 몰랐으므로, 박제된 화면 속 그 분주한 속도감을 따라잡지도 못했다. 하지만 동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된 그 중계 소리를 감으로 대강 이해하게 될 때까지 그 비디오를 돌려 보고는 했다. 지저분한 잡음이며 노이즈가 화면을 뒤덮었음에도 동영상 속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깨끗하고 조용했는데, 동오는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성인 남자의 머리통만큼 커다란, 그러니 그만큼 무겁기도 할 공이 호선을 그리며 그물을 통과하는 감각이 무엇보다도 그랬다. 그러다 보면 일평생 느껴보지 못한 현장감에 사지가 근질거리고는 했다. 진짜 농구는 어떤 감각일지,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떤 소음에 뒤덮여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군것질을 참거나 술래잡기에서 빠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동오의 마을은 애당초 어린아이들이 어울릴 만한 것이 많이 없는 좁은 동네였다. 문제는 농구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전쟁이 모든 땅을 휩쓸고 모든 재화를 집어삼킨 지금, 열 사람이 코트에 들어가 그물에 공을 얼마나 멀리에서 얼마나 많이 던져 넣느냐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 따위는 그야말로 사치재였다. 애써도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허황된 성취감뿐인 공놀이에는 매진하는 사람도, 열광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리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오래전의 공습으로 옥상 한구석이 무너져 내린 볼품없는 경기장에 누가 오겠는가? 비바람 막을 곳이 필요한 노숙자와 고아들, 몰래 간식을 나누어 먹으려는 어린애들이 다였다. 하지만 동오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배운 적 없는 방식으로 농구공을 튕기며, 받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패스라는 것을 따라해 보면서. 동오의 농구 실력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실력을 봐줄 코치도, 감독도, 하다못해 동료 선수도 그곳에는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농구선수 따위는 꿈이 될 수 없었다. 농구에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동오는 그 비디오 속 선수들처럼 유니폼을 입고 이 경기장에 정렬할 수 없을 터였다. 이 폐허 된 땅에서 다시 선수를 육성하고 경기장을 열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그 미래가 그의 몫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핑계 따위가 농구를 그만둘 구실이 되지는 않았다. 동오는 여전히 첫차를 타고 경기장에 나가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하루에 열두 시간씩 공을 몰고, 공을 던지고, 공을 받았다. 동오의 얄팍한 배움만으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열정이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동오는 퍽 끈질긴 성격이었다. 인생을 걸겠다는 거창한 각오 따위 없어도 손끝의 감각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 만큼은.
농구는 동오의 미래가 아니었다.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오는 그런 미래를 꿈꾼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체육관에서 반사되는 공의 모든 각도가 적어도 그의 현위치였다. 다 닳은 운동화를 신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리 없었다.
4.
열두 살에 최동오는 이명헌을 만났다.
동오와 동갑내기인 명헌은 키가 크고 어깨가 다부졌다. 동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농구공을 들고 스타디움의 마룻바닥에 발을 들였을 때, 명헌은 마치 어느 점에서 홀연히 솟아난 사람처럼 그곳에 있었다. 색 없는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모습은 열두 살 난 사내아이답게 평범했다. 하지만 만물을 훑는 듯한 눈빛은 또래와 달리 조금쯤 무료해 보였고, 그랬기에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동오는 처음 보는 소년의 눈이 어떠한지 유심히 살피기에는 그다지 기민하지 못했다. 그래도 동오는 명헌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명헌은 한쪽 옆구리에 농구공을 끼고 있었다.
체육관에 걸려 있던 정정당당한 스포츠 정신 따위의 명맥은 이미 오래전에 끊겼다. 이제 텔레비전을 틀어도 오래된 월드컵 경기 녹화 화면조차 나오지 않는 시대였다. 전쟁의 참상을 겪어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된 도시들을 일으켜 세우려면 한가한 부자들의 공놀이에 흥청망청 쓸 돈은 없다고 동오의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동오의 아버지는 시기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드물게 대학을 졸업한 시 공무원이었으므로, 그 말은 꽤 타당하게 들렸다. 단지 동오가 아버지의 말 몇 마디에 공을 놓기에는 고집스러운 성정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동오는 늘 괴짜였고, 그러기로 그의 고향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그러므로 눈앞에 나타난 명헌의 존재는 이를테면 거대한 반전과도 같았다. 동오는 드리블하던 공을 너무 일찍 던져 버렸고, 당연히 그물을 스치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던, 짧은 머리에 입술이 두터운 소년이 무던하게 중얼거렸다.
트래블링 뿅.
뿅?
동오는 공이 발치로 굴러올 때까지 멍하게 서 있었다. 동오가 공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할 때 명헌이 또래보다 넓은 보폭으로 걸어왔다. 그가 다시 말했다. 트래블링, 뿅. 이번에도 ‘뿅’이었다. 하지만 동오는 이번에는 그 이상한 말꼬리를 문제 삼지 않았다.
트래블링?
동오가 물었다. 명헌이 끄덕였다. 추진력을 잃은 공이 동오의 발뒤꿈치를 건드리며 굴러다녔다. 명헌은 그 공을, 그리고 다 낡아 바닥이 해진 동오의 운동화를 가리켰다.
축발, 뿅.
그 이상한 어미는 도통 변하지 않았다. 동오는 그의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그가 주축으로 쓰는 오른발의 밑창이 조금 더 닳았다는 것 빼고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적어도 동오의 지식 안에서는 말이다.
축발이 끌렸어. 반칙 뿅.
명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오가 모른다고 해서 존재했던 규칙이 소급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하지만 명헌을 경계하지는 않으며, 대답했다.
그런 규칙이 있는지 몰랐네. 나는 농구를 비디오로 배웠거든.
마찬가지 뿅.
명헌은 말이 짧았다. 오직 용건만 이야기하고는 특유의 어미로 괴상함을 더했다. 그러면 그 ‘뿅’에 관심을 빼앗기는 바람에 명헌이 명사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체로 무시하게 되었다. 동오는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기야 했지만 구태여 문제 삼지 않는 부류였다.
최동오야.
이명헌. ……뿅.
그리고 가끔은 명헌도 그 말투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공공연한 비밀 역시도.
명헌은 별났지만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무엇보다, 단 둘뿐인 팀메이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스타디움까지 오려면 동오와 정반대 노선을 타야 하는 명헌은 집에 오래된 농구 비디오테이프가 두어 상자는 있다고 했다. 명헌은 외국어로 된 중계를 공부하고 오래된 농구 잡지를 뒤적이며 농구 규칙을 외울 만큼 명석했고, 둘밖에 없는 코트에서도 전략을 만들어볼 만큼 농구를 좋아했다. 동오는 벽의 두 번째 갈라진 틈새 대신 자리를 지키고 손을 뻗는 사람을 향해 패스하는 법을 익혔다. 트래블링도, 더블 드리블도, 차징도, 푸싱도 알게 되었다. 백코트가 정확히 무엇이고 존 프레스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울과 바이얼레이션은 무엇이 다른지. 스크린의 종류도, 오버 타임 룰도. 정작 명헌과는 일대일밖에 할 수 없었더라도.
명헌을 만난 이후로는 텅 빈 경기장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코트의 반이라도 꽉 차는 일이 없었고, 당연히 관중도 없었다. 하지만 명헌은 늘 코트 위에 열 명이 있다고 상정하는 듯한 패스를 했다. 동오는 라인 밖에서 공을 밀어 올려 그물 위까지 운반하는 연습에, 요컨대 프로 선수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매진하고 있었다. 명헌이 가져온 농구 잡지에 적힌 팁들과 비디오의 열화된 화면들을 참고하며, 동오는 열세 살에 그의 첫 3점 슛을 만들어냈다.
3점, 뿅.
동오가 먼저 말했다. 명헌이 짧게 웃었다. 명헌은 떨어진 공을 받아 코트의 반대편까지 드리블했다. 2점 점프슛은 멋모르고 보아도 깔끔해 보였다. 동오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고, 이윽고 바로 옆자리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명헌은 백코트가 빨랐다. 정말로.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것이 동오가 기억하는 가장 뚜렷한 풍경이었다. 초등학교가 그랬듯이 동오와 명헌은 중학교 학군도 갈렸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중학교로부터 동오가 자전거를 밟아 다시 경기장까지 왔을 때에는 임시 폐쇄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것이 완전한 폐쇄를 위한 밑바탕인지, 아니면 보수 공사를 위한 준비인지는 동오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명헌은 닫힌 경기장의 터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동오도 다시 그곳에 갈 이유는 없었다. 동오의 중학교 운동장에는 작지만 깔끔한 야외 농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동오는 명헌이 멋진 신기루 같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동오는 명헌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전란의 흔적이 완전히 수습된 어떤 농구 코트 위에서, 이왕이면 같은 팀으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당장은.
5.
동오는 도시의 고등학교까지 일종의 원정을 다녔다. 농구를 위해 번화가까지 오가던 시기와 왕복 시간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오는 학업에 영 뜻이 없었고, 그래서 학년을 거듭할수록 학창 생활은 따분하기만 했다. 낙제점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평균을 벗어난 적도 없는, 동오는 꼭 그 정도 되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해까지는 신문에 각종 좋은 소식들이 보도되었다. 물가가 안정화되고 있다거나, 어느 도시에서 다시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동오는 수업에 그다지 불성실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지루한 문학 시간에는 책상에 엎드려 잠들기도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넘게 지나자 세상은 전황으로부터 멀어졌고 또 그만큼 무관심해졌다. 동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는 파괴된 문명의 대부분이 재건되었고,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도 꽤나 나이를 먹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역사가 된 과거의 전쟁보다 그 다음에 꾸려나갈 삶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였다.
동오가 2학년이 되자 담임은 대학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땅에서 벌어진 교전들도 있었지만,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만큼 큰 내전은 많이 없었다. 당연히 무너지지 않은 대학들이 있었고 동오는 운이 좋게도 그리 비싸지 않다면 학비를 댈 수도 있었다. 담임은 동오에게 아버지와 같은 행정직 공무원이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순탄히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는 편이 좋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 동오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일단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동오는 집에서도 듣고 교무실에서도 들은 대로 교과서에 필기를 하며 두 학기를 보냈다. 깔끔하고 반듯한 공책에 들은 내용을 정리하지도, 시험을 보느라 코피를 터뜨리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동오는 나름대로 공부에 전념해 보았다. 재미는 없었지만 할 만했다. 기실 동오에게는 무엇이든 그랬다.
겨울이 지나고 학기가 바뀌자 동오도 무난히 3학년으로 진급했다. 막 성인을 앞둔 학생들에게 담임은 불안을 심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불안은 학업이나 성적이 아니라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이 작은 나라의 교실에서 쪽지시험 서른 문제 중 몇 개를 맞았는가가 아니었다. 변질된 앵커의 목소리가 일 년 만에 백팔십도 달라진 소식들을 전했다. 침몰 직전의 배처럼 흔들리는 정세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오는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나라들의 재무장, 미사일 실험, 폭탄 조준, 수상한 정황에 관한 이야기가 연이어 신문 첫 면에 보도되었다. 군수업체의 주가가 올랐다느니 철로 된 수입품이 줄어들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의 이면을 읽어내는 것은 동오를 비롯한 고등학생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다들 알아챌 만했다. 가끔은 학교가 임시 휴교를 하기도 했고, 그 원인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심각한 안내방송과 함께 사이렌이 울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정치니 외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동오가 보아도 사태는 위태로워 보였다. 잠시 가라앉았던 교련 수업이 다시 정식 과목으로 편입되었고, 창밖으로는 종종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뉴스 채널을 어디로 돌려도 불안정한 세계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다. 공황, 인플레이션, 무기 실험, 국제기구……. 동오는 그런 말들의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명확히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동오는 체념과도 같은 어떤 납득을 한 터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라디오에서 선전 포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동오는 놀라지 않았다.
전쟁은 가깝지 않았지만 그리 먼 것도 아니었다. 해협을 하나 건너면 그곳에는 폭탄이 터지고 전차가 도열하는 전장이 있었다. 조율, 협상, 교전에 관한 문장들이 라디오에서 속사포로 지나갔다. 소식은 들려오지만 발은 들이지 않아도 괜찮은 거리에, 그러니까 어쩌면 한 뼘쯤 너머에, 전쟁이 있었다. 동오는 따분한 수학 시험 도중에도 전투기가 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 펜을 놓고는 했다.
동오는 교련 과목의 우수생이었다. 그는 체격이 좋고 힘도 상당했다. 오래 달릴 수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또래보다 빠르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로도 농구공, 그 농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은 덕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농구 골대 아래에서 뛰어오르고, 달리고, 공 던지기를 반복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오는 별종이었다. 마침내 참전 선언이 떨어진 지금에 와서도, 동오는 농구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동오는 농구선수가 될 수 없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었다. 용돈을 쪼개고 모아 당시 물가로는 터무니없이 값비쌌던 농구공을 스스로 마련한 그 순간에도, NBA 농구 경기를 녹화해 둔 오래된 비디오를 수십 번 돌려본 그 순간에도, 명헌을 만나 드넓은 체육관을 누비며 림과 림을 왕복하던 그 순간에조차도 동오의 미래에는 농구선수가 될 길이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는 법을 동오는 몰랐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 역시 동오는 잘 몰랐고, 좋아하는 일이니까 계속하면 그만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리고 그 끈기가 동오를 훌륭한 군인의 길로도 이끌었다. 전 국가적 참전이 결정되고 서늘한 긴장이 온 나라를 휩쓴 뒤, 동오의 담임이 동오에게 조심스러운 제안을 건넸다.
동오야, 사관학교에 들어갈 생각은 없니?
그 뒤로 담임은 무어라 말을 더 붙였지만, 사실 동오가 모두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고 너무 복잡한 사정이었다. 다만 담임은 사관학교에 인력이 부족하며 동오와 같이 좋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고, 학비 역시 무료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담임은 꽤나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심정이 어땠는지 동오가 진정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번에도 동오는 일단은 그러겠노라 답했다.
6.
동오, 삐뇽.
사관학교 입학은 결국 떠밀리듯 택한 길이었다. 참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대부분의 대학에서도 주로 학군단을 모집하거나 정원을 줄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라면 어쨌든 곧 징집될 것은 예정된 듯 보였다. 동오는 입대하는 것과 장교가 되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제대로 체감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조언에 따라 생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헌과 재회했다.
……너도 사관학교에 왔어?
명헌은 여전히 키가 크고 어깨가 다부졌다. 잔인할 정도로 두꺼운 근육질의 몸통을 보면 그 역시 농구를 그만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농구부라느니 하는 정식적인 명칭으로, 어쩌면 명헌은 코트에 선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명헌이 살았던 조금 더 큰 도시들에서는 종종 그런 친선 대회를 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오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단지 반갑다고 말했고, 명헌은 약간은 거칠고 힘이 좋은 악수로 응수했다. 그 역시 체격과 체력을 근거로 추천장을 받고 사관학교로 진로를 틀었다고 했다.
어미를 ‘삐뇽’으로 바꾼 명헌은 선배 생도들의 눈엣가시였다. 말투를 군인답게 교정하려는 선배들에게 명헌은 합리적인 선에서 순종했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명헌의 합리적인 선이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에서였다. 명헌은 태생적으로 뻣뻣해 사관학교의 수직적인 규율에 알맞기도 했지만, 정도 이상으로 수직적인 규율에 욱여 넣기에는 너무 단단한 면도 있었다. 명헌은 특유의 절도로 강압을 배격했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괴롭힘에 끈질기게 반발했다. 여러 번 지적당했음에도 끝내 그 ‘삐뇽’이니 ‘베시’ 같은 말투를 고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명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꺾이지 않을 사람 같았다.
동오는 명헌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지만 다른 생도들과도 금세 가까워졌다. 명헌은 그들 중 누구와도 동오만큼 친하지 않았지만, 대신 누구와도 대놓고 어색하지 않았다. 동오가 남들과 적당히 친밀해질 수 있다면, 명헌은 먼저 다가서지 않고도 무던하게 남들 틈에 섞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특이한 말투나 이상하리만치 집요한 승부욕을 생각하면 그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명헌의 영향력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명헌은 남들보다 한 계단, 두 계단씩 위로 올라가는 미지근한 속도를 낼 때면 본디부터 그의 몫이었던 자리를 찾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므로 동오가 기억하는 한, 명헌은 언제나 동오를 앞지르고 있었다.
머지않아 명헌은 같은 기수와 아래 기수에서 실질적인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훈련에서도 명헌의 성과는 훌륭했다. 어느 한 분야에 특출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명헌이 어디에서나 평균 이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명헌은 두드러지지 않는 대신 능통했다.
한편 동오는 훌륭한 사격수Shooter였다. 거리를 유지하며 감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골대 앞과 과녁 앞, 어디서든 슈터란 비슷했다. 그렇지만 결코 같지는 않았다. 십 점, 구 점, 팔 점, 다시 과녁의 중앙. 네 발을 연달아 맞추면서 동오는 생각했다. 깔끔한 3점 슛과 달리 총성은 너무 시끄러웠다. 농구공을 쏘아 올릴 때는 반동을 적당히 써먹어야 했는데, 총을 쏠 때는 반동에 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한 채 버텨야 했다. 무엇보다 동오가 하는 사격은 취미나 운동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의 급소를 쏘아 맞추도록 훈련하는, 그것은 살상기였다. 1킬로그램 남짓한 권총이 때로 아주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그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명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 특유의 갑갑한 무표정은 어떤 훈련 중에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동오는 의문했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군인으로서 명헌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7.
동오와 명헌의 임관 예정일은 일반에 비해 일 년 빨랐다. 그들뿐 아니라 같은 기수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전시의 장교 훈련이므로 사태가 혼란해질수록 졸업 역시 앞당겨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이 태어났을 시기쯤해서는 거의 마무리되었던 이전의 전쟁에서는 임관이 정상보다 네 학기는 빨랐던 소위들도 있었다.
대부분 명예롭게 전사했지만.
이 전쟁으로 득을 본 것은 그들이 태어났을 무렵 이미 임관을 앞두고 있었던 지금의 장성들이었다. 어쩌면 현장에 투입되어 추서追敍될지도 모르는 젊은이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작전 회의장에 앉아 공로를 따지고 속히 진급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물론 생도들은 장교 후보생이었고,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부족했으며, 나랏돈으로 정성껏 키워진 인재들이었지만, 그래도 장성급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동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주제를 파악하는 힘이었고, 객관적으로는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동오는 가장 기계적인 전략 속에서 효율과 가치를 따져 배치되고 교환당하는 삶에는 그다지 유감이 없었다. 설령 그 효율이 동오를 판 밖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그랬다. 사관학교에서 혹독하게 훈련하며 습득한 기질은 아니었다. 구태여 정의해야 한다면, 그런 단조로움은 동오의 천성이었다. 바로 그 성정이 이번에도 동오를 우수한 군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오가 군인이라는 직업에 적합하게 맞아들어가는 과정은 명헌의 그것과는 조금 궤가 달랐다. 명헌이 스스로를 끼워 맞추지 않고도 순식간에 층계의 꼭대기에 올라설 때, 동오는 난간에 정렬한 채 성실히 계단을 오르내리고는 했다. 명헌은 매번 그 기수의 대장이었지만 동오는 그보다는 아래에 있었다. 어디에서든 동오는 맡은 바 책임을 다했고, 어느 위치든 그곳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오는 본래부터 규율에 불만을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따랐다.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일에는 언제나 치열했다. 순응했지만 체념하지는 않았다. 동오가 타고난 엄격함과 성실함이 동오를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었다. 동오는 과연 흠 잡을 구석 없는 사관생도였다. 야망이나 목적보다는 그저 명령을 이룰 준비에 치중해 있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작전 앞에 생각을 비울 수 있는 군인이야말로 참 적절한 군인이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다. 그것을 구태여 몇 번이나 더 곱씹으며, 동오는 풀썩 소리가 나도록 기숙사 침대에 누웠다.
동오.
깜짝이야, 이명헌.
비어 있다고만 생각한 옆 침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오는 흠칫 몸을 떨며 둘둘 말린 녹색 담요 뭉치를 빤 응시했다. 안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말려 있기는 했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침낭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있었어?
아까부터, 삐뇽.
이윽고 짙은 녹색의 모포에서 명헌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동오는 약간 질색했다. 명헌의 기행은 때로, 실은 꽤 자주, 사람을 놀래키고는 했다. 그리고 명헌은 그 자체를 퍽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그러고 있는 거냐는 물음은 무의미했다. 명헌은 왜 굳이 그런 기상천외한 어미를 쓰는 거냐는 질문을 다달이 최소한 다섯 번씩은 받았지만 한 번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동오는 다시 깍지 낀 손을 베개 삼아 몸을 눕혔다.
그래서 왜 부른 건데.
그냥, 삐뇽.
그냥?
심란해 보여서.
그런 소리를 하는 와중에도 명헌은 모포에 둘둘 말린 채 얼굴만 이불 밖으로 내민 자세 그대로였다. 하지만 동오는 그런 기행에 일일이, 그리고 꾸준히 놀라기에 명헌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어떻게 알았어?
동오가 담백하게 물었다. 동오를 바라보는 명헌의 눈에서는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특유의 이상한 행동들이 겹쳐 더욱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 명헌은 사려 깊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쭉 그래 보이던데. 삐뇽.
명헌이 다시 제 몫의 천장을 보았다. 동오도 자세를 반듯이 했다. 난처하고 멋쩍은 목소리로, 동오가 중얼거렸다.
티 내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명헌, 눈치 빠르네.
그걸 여태 몰랐다니, 삐뇽……. 뭐가 문젠데?
빈말로라도 부드러운 어조는 아니었다. 끝이 묘하게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고 고저 없는 높낮이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물음에는 특이한 힘이 있었다. 사실 농담으로라도 그는 썩 상냥하거나 다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냉정하게 해결책을 내놓거나 단호한 말로 여지를 자르는 편이었지만. 그런 군더더기 없는 태도를 동오는 외려 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동오가 본래 그렇듯 단단한 성격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상대가 이명헌이기 때문에 그렇게 여기기 시작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아니, 뭐…….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 사관학교 오지 말고 그냥 입대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들고.
툭툭 던지듯 동오는 말했다. 사실 반쯤은 횡설수설했다.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잡아챈 것이라 미처 정리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명헌은 늘 그랬듯 명백하고 확실했다.
장교보다 일반병, 삐뇽?
명헌이 이쪽을 보고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로, 동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과 혀는 여전히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고민들의 모습대로 문장을 조형했다. 내뱉으면서 동오가 한 생각은, 그가 말을 참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냥 쏘라는 대로 쏘는 건 자신 있는데, 어딜 쏴라, 누굴 쏴라, 어떻게 쏴라……. 난 그런 일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장교는 그런 일을 해야 하잖아. 제대로 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혼란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동오는 익숙한 잔무늬가 새겨져 있는 석고색 천장에 시선을 두었다. 800그램의 총, 그보다 3킬로그램이 더 무거운 총. 10그램이 채 나가지 않는 탄알. 그러나 훈련이 끝나고 탄피를 모으면 그 무게는 킬로그램 단위가 된다. 강행군을 할 때 메는 온갖 군장보다도 동오에게는 그 총과 탄창이 더 무거웠다. 단지 가늠쇠를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때로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그런 도구를 들고 방향을 정하느라 제자리를 돌기라도 하면 만성과도 같은 현기증이 그를 덮치리라고, 이따금 동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명헌의 물음은 동오의 고민보다 가벼웠다. 추궁하거나 나무라는 투는 아니었다. 명헌은 다만 물었다. 확인하듯이.
그게 부담이 되나, 삐뇽?
부담이라고 해야 하나.
천장에 그어진 실금의 개수를 세며 동오는 궁리했다. 몸 상태가 아닌 기분을 규정하는 일에 동오는 늘 크게 능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침묵했다가 동오는 대답했다.
그냥, 더 잘하는 일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목표가 없더라도 따를 수 있었다. 야망이 적더라도 노력할 수 있었다. 동오는 인정이나 평판을 얻고자 성실함을 수단 삼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그렇게 해낼 수는 없었다. 의욕껏 해내고 앞질러 나서려면 동오에게도 더 큰 동기가 필요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거창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할 만한 구석이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동오가 무슨 수로 이 일을 사랑하겠는가? 표류하듯 기어들어온 사관학교에서 동오는 필요한 인력이었지만 절실한 인력은 아니었다. 동오는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천재적인 군인은 아니었다. 멋대로 그의 쓸모를 규정 짓는 말들은 사실 몇 번을 들어도 괜찮았다. 동오가 그렇게 받은 임무들을 충분히 아낄 수만 있다면, 동오가 그것들을 파헤쳐 어떤 즐거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대단한 사명감까지 운운할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동오는 여태 그것을 찾지 못했고, 아마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동오, 꿈이 크네.
한편 명헌의 일갈은 냉철하고 통렬했다.
꿈이 큰 부품, 삐뇽.
조금은 자조적이었고.
그야말로 촌철살인이었다.
8.
두 학기를 마치고 진급을 앞둔 여름이 되면 생도들은 실전 훈련에 투입되었다. 군 수뇌부가 현장을 전혀 모른 채 탁상공론만 일삼는 장교들로 채워지는 것은 안 될 노릇이니까. 그것이 마땅한 절차였다.
막 사관학교에 입학한 신입 생도일 적에는 실전이라는 단어가 참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총격과 폭탄이 오가는 진짜 전장. 특히 진짜 전란을 앞두고 입학한 최근의 기수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는 했다. 하지만 모든 교전이 난전은 아니었고, 모든 전선이 접전장은 아니었다. 생도들은 버티는 일이 가장 큰 의무인 교착 상태의 전장이나 정찰과 후퇴만을 거듭하는 후방, 민간인 보호를 주된 업으로 삼는 저지선 따위에 우선적으로 배치되었다. 그것은 배려보다 절약에 가까웠다. 장교 후보생이란 군 예산을 쏟아부어 길러내는 고급 인력이므로.
그러므로 마지막 여름 투입을 앞두고도 동오와 명헌은 태연했다. 일전에 있었던 두 번의 실전에서 두 사람은 매번 임무지가 갈렸지만, 큰 부상은커녕 실전 사격을 연습할 만한 큰 사건조차 겪지 않고 복귀했다. 임관 전 생도를 잃으면 큰일이므로 실전 훈련은 매번 그런 식이었다. 어떤 지역이 생사결전에 휘말렸다 한들 대개의 전선은 지지부진했고, 그런 진부함이야말로 전쟁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비 소위가 된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명헌 생도.
동오가 내뻗은 주먹에 명헌이 그의 주먹을 맞댔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로 명헌이 대답했다.
기분 째집니다, 뿅.
어미는 어느새 동오가 명헌을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은 단어로 돌아와 있었다. 동오는 짓궂게 웃었고, 명헌은 건조하게 한 번 반복했다. 뿅. 동오는 그것을 맞장구로 알아들었다.
실전 투입을 한 달 앞두고 동오와 명헌은 나란히 졸업 요건을 충족했다. 마지막 실전 훈련만 문제없이 마치면 그들도 마침내 소위가 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굉장한 변화가 일어나는 기분 따위는 들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긴장감이 들지도 않았다. 지난 전투가 그랬듯이, 자산을 아끼려는 상부의 판단이 그들을 진지에 묵혀 둘 터였다. 생도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제대로 된 장교로서 전방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으니까.
그들은 장교가 될 것이다. 커다란 체제의 알맞은 톱니바퀴. 큰 뜻의 일부분. 총을 든 부품. 그리고 어쩌면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 이 전쟁이 충분히 길어진다면 말이다.
동오는 문득 명헌을 바라보았다. 만일 그의 동기들 가운데 선전에 쓸 만한 영웅이 나온다면 이명헌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명헌은 이미 한 여단 규모의 생도들을 성공적으로 통솔해 냈다. 군의 악착같은 훈련에도 도통 사그라들지 않았던 명헌의 뻣뻣한 자신감이 그를 더욱 훌륭한 군인으로 길러냈다. 명헌은 훌륭한 지휘자이자 전술가였다. 판단도 빨랐다.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줏대가 곧았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전방에는 혁신적이지만 안정적이고, 강력하면서도 끈질긴 전략이 필요했다.
군인으로서 명헌의 삶은 평이하지 않을 것이다. 명헌은 단순히 뛰어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명헌은 독보적이었다. 필요불가결했다. 명헌은 대체 불가능한 전력이었다. 그러므로 소위로 임관한 후에도 명헌이 후방을 전전하다 잊힐 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은 충고 따위가 아니라 견제였다. 명헌은 동오보다도 눈치가 빨랐으니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을 애정 어린 염려 대신 헛소리로 일축한 데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다.
명헌은 좋은 재목이었다. 동오는 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를 앞질러 나가던 명헌의 널찍한 어깨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조금쯤 무료해 보이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명헌의 눈동자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뒷모습만이 선명했다. 동오는 이 등을 따라잡고 싶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구국의 영웅 이명헌. 동오는 그런 그림을 떠올렸다. 어딘지 속이 켕겼다. 명헌은 선전 포스터에 실려도 영영 무표정일 것만 같았다. 그런 면이 선전과는 어울리지 않기도 했고.
그러고 보면 명헌은 군복에 참 잘 맞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꼭 맞는 옷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오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명헌이 툭 쳤다. 가자 뿅. 동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쌍의 군홧발이 보폭만큼 일정한 소리를 냈다.
9.
쓸 수 있는 자원이 여유로우면 사람들은 잉여 재화를 아껴 두기 시작한다. 더 귀한 것부터,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부터. 사정이 급박해지면 모아 둔 것들을 꺼내기 위함이다. 그러니, 한계가 턱 밑까지 다다랐을 때에조차 절약 정신을 고집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소위 임관도 달지 못한 예비 졸업생이 가혹한 전방의 실전 훈련에 투입된 경위였다. 지난 두 해간 겪어 왔던 여름과는 모든 것이 판이했다. 그것들은 훈련이었다. 지금의 사태는 실전이다.
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장교 후보생 십수 명이 세 개의 작전 팀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이들은 주요 전선을 사수하고자 게릴라와 급습과 매복 작전을 펼칠 예정이었다. 경계를 탈환하지 못하고 대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전세는 더욱 급박하게 불리해질 것이, 흔한 장교 후보생의 눈에도 뻔히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작전이 확정된 것은 불과 보름 전, 전황이 급박하게 뒤집히면서부터였다. 패착은 도시 근처의 해안가에 있었다. 허점을 틈타 적의 상륙 작전이 거한 성공을 맞은 것이다. 허리를 찔린 아군은 열세에 놓였고, 적은 주된 거점으로 진격해 폭격과 급습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아군에는 제대로 된 전투 훈련을 받은 인원이 어찌나 드물어졌는지 아직 정식 계급장조차 없는 장교 후보생들을 전선에 집어넣어야 할 지경에 내몰렸다.
그렇게 뽑힌 생도들 중에는 동오도 있었다. 선발 소식을 들은 뒤부터 동오는 손에 굳은살이 새로 박일 정도로 저격 훈련에 매진했다. 지루하고, 지난하고, 지리멸렬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동오는 계속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명시적으로 동오의 팀에 할당된 임무는 통신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통신을 끊는 것이었으며, 즉 중간 통로 역할을 하는 적의 교신병들과 정찰병들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총구는 늘 정확한 곳을 겨누어야 했고, 총탄은 낭비 없이 필요한 것을 부수어야 했다. 동오의 실전 경험이 아직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참작하겠다고 상부에서는 말했지만, 그들의 의견과 무관하게 동오는 부족함을 적당히 넘길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이 적확하고 기민하지 못했기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분석 보고서는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도 소총을 조립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동오는 연습을 거듭했다. 풍향을 느끼고 반동을 계산하는 일이 사고를 앞선 본능 위에 각인될 수 있도록. 재미있지 않으니까, 특별한 열정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총을 쥐는 모양대로 굳어진 손바닥의 모양을 보면서 동오는 그런 책임감을 느꼈다. 패배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래서 살아돌아와야 한다는 의무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므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았다. 다만 동오는 추측했다. 이번에도 명헌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사를 건 작전에 병력으로 선발된 것은 당연히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에, 명헌은 긴장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일상적인 훈련에 참가했고 아직 졸업하지 않았으므로 생도여단장으로서의 남은 과제도 다했다. 동요 없는 눈동자, 굳게 다물린 입술, 나무뿌리처럼 견고한 걸음걸이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명헌은 평소보다 목을 더 자주 축였고 생각에 잠기는 일도 더 잦아졌다. 말수는 약간 더 적어진 반면 주변은 더 많이 의식했다. 삶과 죽음, 피살과 살해의 경계를 명헌 역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동오는 알았다. 동오만이 알았다. 압박 아래에서 차츰 빨라지는 명헌의 심장 박동을.
동오는 신중하고 건조했다. 명헌은 그보다 더했다. 그러나 나란히 맥동하는 호흡계가 결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이치로, 동오는 예민했고 명헌은 그보다 더했다.
10.
이명헌 생도여단장.
최동오 제1연대장생도, 뿅.
무사히 복귀하십시오.
이따 봅시다.
……뿅.
그래, 뿅.
11.
동오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흐른 땀이 뺨과 턱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동오는 조금 오래 눈을 감았다 떴고, 역효과임을 알면서도 수병 없이 입술을 축였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점점 이동한 끝에 이제는 건물 끝까지 늘어질 만큼 기울었음을 동오조차 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럴수록 피로가 쌓였다. 그러나 동오는 견뎠다.
전쟁은 요란하게 오지 않았다. 적어도 전장에서는 그랬다. 동오가 교실에 앉아 펜심을 딸깍거릴 무렵에는 앵커들이 온 나라가 떠나가도록 전쟁의 위기를 외치고는 했는데,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쫓겨난 이 터 위에는 기실 어떠한 소란도 없었다. 총알은 소리보다 빠르므로, 어쩌면 죽음조차 그렇게 무상히 찾아올 것이다. 사람을 쏘아 죽이는 일이란 으레 기나긴 대치와 인내의 연속이었다. 최후의 순간, 약실을 떠난 탄알이 발포된 이후에는 세계가 정지한 것처럼 사방이 적막했다.
그런 면에서 ‘쏘는Shooting’ 행위란 근본적으로 비슷한지도 몰랐다. 요새를 세우고, 기다리고, 쏘고, 그런 다음 다시 기다린다는 면에서는…….
멀리에서 작은 점이 반짝였다.
산산조각난 채 창틀에 간신히 붙어 있던 유리판이 파편으로 깨지며 침묵을 허물었다. 벽이 움푹 패이며 돌조각을 튕겨 냈다. 동오는 급박하게 자세를 잡았다. 몸을 낮추고 권총을 사수했다. 총알의 세례가 불규칙하게 날아들었다. 동오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생각했다.
소총이 필요했다. 이기기 위해서, 돌아가기 위해서, 그리하여 죽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12.
영화 같은 기적은 없었다. 동오의 팀에서는 여덟 명의 분대원 가운데 다섯 명이 전사했고 작전은 성공과 실패를 가를 수 없는 모호한 상태에서 끝났다. 다른 팀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살아남은 두 명의 분대원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동오는 살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기억 속에 희미했다.
어쨌거나 살아 있었으므로 동오는 부대에 복귀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므로, 동오는 무사히 졸업할 수도 있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다. 언제고 그랬지만, 죽음이라는 구덩이를 한차례 들여다본 뒤인 지금은 더욱. 깨진 손톱을 정리하고 그을린 머리칼을 밀어낸 후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동오는 생각에 잠겼다. 빗발치는 총탄,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폭발, 다시 총격. 어지러이 진동하는 피비린내, 증오스러운 분수와 같이 환부가 울컥이는 소리, 창백하게 질린 몸, 지혈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의무병, 의무병! 베타 다운, 베타 다운……. 적막 아래 짓뭉개진 소란스러운 난장판은 다른 어디도 아닌 동오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것은 동오가 딛고 선 자리 어디에든 펼쳐지며 그의 뇌리를 뒤덮었고, 끝내는 동오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러니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명헌의 흔적조차 없이 텅 빈 이 침실조차, 이제 와서는 총성이 울려퍼지는 전쟁터였으므로.
13.
임관식을 이틀 앞두고 간부들이 동오를 찾아왔다. 명헌이 제때 복귀하지 못했다는 불 보듯 뻔한 소식과 함께. 그들은 명헌의 군번줄을 회수해 오지도 않았고 희고 매끈한 유골함을 들고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오는 기이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어렸을 적 꼭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동오는 다만 모든 말에 긍정했다.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 기시감은 더 심해졌다.
그들은 동오에게 명헌의 빈자리를 대신해 달라고 했다. 앞서 손을 들고, 가장 먼저 선서문을 읊으라고. 동오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명헌의 부고를 들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내.
14.
선서.
소위 최동오는 본국의 장교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헌법과 법규를 준수하며 부여된 직책과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15.
임관을 받고 정식 소위가 된 후에도 어떤 일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전세가 극적으로 역전되지도 않았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들이 거짓말처럼 살아돌아오지도 않았다. 동오는 말없이 복무했다. 다른 모든 소위들이 그러듯이 소대 하나를 통솔했고, 때로는 휘하의 장병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도 모르는 명령에 따랐다.
총을 들 일은 많지 않았다. 동오는 군인이므로 물론 권총을 상시 소지했지만, 그의 몸과 등 뒤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 뽑아 들어야 할 의무이자 목숨줄치고 그것은 너무 가벼웠다. 한 발로도 능히 타인을 꿰뚫어 죽일 만한 도구로서도, 그것은 너무 가벼웠다. 호신용으로 재빠르게 총을 뽑아 들 때 느껴지던 압박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졸업 시험과도 같았던 그 폐허 된 전장에 정의할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놓고 온 사람처럼, 동오는 이전보다 더 예민해졌지만 어떤 방면에서는 아주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이전에 막연히 생각했던 만큼 부담되지는 않았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동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오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명령을 더 아래까지 하달하는 중간 톱니였다. 부품, 꿈이 큰 부품…….
……꿈이 큰 부품, 삐뇽.
어떤 목소리가 불쑥 동오의 척수를 기어올랐다. 명헌의 목소리였다, 동오가 의도적으로 아주 먼 곳에 밀어두고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16.
차라리 해군사관학교에 갈 걸 그랬나 봐.
습관처럼 깍지 낀 손을 베개로 삼아 침대에 누운 채 동오는 중얼거렸다. 그때 그들은 아직 대단한 직위가 없는 사관학교 2학년생이었고, 당연히 군인이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명헌은 그 무게를 조금 더 잘 아는 듯했고 이따금 그만큼의 각오를 내비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은 스물한 살 생일조차 넘기지 않은 새내기였다. 군인의 어떤 점이 좋고 싫은지를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멋모르는 시기였으므로 그 질문에는 다소 뜬금없는 구석이 있었다.
왜, 뿅.
잠깐 뜸을 들였다가, 명헌이 고저 없이 물었다. 동오는 허공을 빤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헛숨 들이쉬는 소리는 썩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러게.
거창하게 심호흡한 것치고 동오의 답은 맥 빠지게 간단했다. 조금 더 생각한 후에 동오는 덧붙였다. 그러기까지 명헌은 동오를 핀잔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동오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고 알맞은 조사助詞를 붙였다. 말과 말의 간격에 드물게도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함교에 서면……, 덜 답답할 것 같아서?
뿅…….
동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생하게 그리는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탁 트인 갑판과 바닷바람 따위를 상상하면 어쩐지 속이 탁 트이는 듯했다. 작금의 갑갑한 마음 탓에 허황되게 들뜨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동오가 언제부턴가 그런 기분을 선망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동오는 눈을 길게 깜박였다. 명헌은 길게 맞장구치지 않았다. 그래서 동오는 계속 말했다.
여기저기 다닐 수 있을 것 같잖아.
여전히, 명헌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천장을 캔버스 삼거나 눈꺼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동오의 분야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오는 왜인지 감긴 눈꺼풀의 어둠으로부터 모래사장에서 주운 소라 안의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동오는 눈을 감았고, 계속 말했다. 조금쯤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네, 뿅.
뒤늦게, 명헌이 대답했다. 어투는 건조했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았다.
17.
동오는 명헌이 어떤 작전을 수행했는지 한 마디 언질도 듣지 못했다. 원칙상 모든 군사 작전은 대외비였으니 당연했다. 그것은 원칙이었다. 동오가 항명할 수 없고, 항명해서도 안 되는. 하지만 그것이 규칙이 아니었더라도, 동오는 기껏해야 우정이나 섭섭함 따위를 이유로 명헌의 임무를 따져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오는 군인이었고, 그렇게 거듭나기 이전에도 충실하기 짝이 없는 성정이었으므로.
그러므로 후회는 동오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자책도 그랬다. 최소한 그가 어찌할 수 없었던 일에는, 동오는 천착하지 않았다. 그와 관계없는 일에는. 그가 닿을 수 없는 일에는…….
그런데도 동오는 명헌을 생각했다. 여전히, 그러고 있었다. 크고 작은 작전들과, 사소한 식사 자리와, 더는 둘이서 공유할 필요가 없는 텐트 속 딱딱한 침대와, 어처구니없는 농담과, 심지어 이따금씩은 잘 알지 못하는 새소리 따위조차 그런 생각을 부추겼다. 동오는 명헌의 뒷모습, 단단하고 다부졌던 뒷모습을 생각했다. 어느 시점을 기해 더는 자라지 않아 동오로 하여금 명헌을 추월해 자라기를 허용하고서도 여전히 평균보다 더 커 보였던 그 어깨를. 불필요한 말은 결코 붙이지 않았던 두텁게 다물린 입술을, 집요하면서도 날카롭게 주위를 훑어보던 새까만 시선을. 말끝에 붙이던 이상한 단어들, 그것들을 발음하던 차분하고 동요 없는 어조, 끄트머리가 조금씩은 긁히는 듯했던 특유의 목소리.
동오가 명헌을 아주 오랫동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명헌에 관한 한, 동오의 앎은 부족하지 않았다. 동오는 가끔씩 명헌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는 충분히 명헌을 알았다.
그러므로 소대원들을 부리면서 동오는 명헌을 생각했다. 물을 넣고 불려 마시는 군용 식단과 오래도록 두고 먹는 건빵 따위를 씹으면서도, 그는 명헌을 생각했다. 이명헌이라는 이름 석 자는 마치 최후 저지선에 마구 흩뿌려진 부비트랩처럼 사방에 산재해 있었으며, 불발된 채 방치된 미사일처럼 동오의 뇌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은 후회나 자책과는 달랐다. 그리움이나 향수鄕愁라고, 동오는 구태여 그 감정을 이름 붙일 수 있었을 테다.
그리고 동오는 천하의 그 이명헌조차 제때 복귀할 수 없었던, 그 뛰어난 지휘관을 한순간에 실종 상태로 만든 전장에 관해 생각했다.
몇 달 후에야 비로소 동오는 깨달았다. 명헌을 집어삼킨 곳이기 때문에, 동오는 전쟁에 충실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전쟁을 이해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아낄 수도 없을 테고, 그러니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가슴팍에 훈장이 하나 더 매달려도 여전히 이곳이 동오의 자리는 아니었다. 모자람 없이 충성스러운 군인과 전장에 기꺼이 청춘을 바칠 수 있는 군인은 달랐다. 동오는 후자가 될 수 없는 전자였다. 스스로를 소모시키기 위해 힘을 다하기에 동오의 청춘은 이미 너무 먼 곳에 있었다.
18.
동오의 고향에 하나 있던 스타디움은 삼 년 전 허물어졌다고 했다.
역시 해군사관학교에 갈 걸 그랬나 봐.
대답 없는 벽에 대고 동오는 생각했다.
뿅, 하고, 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19.
임관 삼 년 만에 동오는 대위가 되었다. 실로 순탄한 생이었다. 길어지고 있는 전쟁은 동오의 발목을 잡지도, 동오의 등을 떠밀지도 않았다. 다만 동오는 그가 계급장을 바꾸어 다는 간격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동오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벌써 한 중대를 이끄는 장교였고, 문자 그대로의 고급 인력으로 거듭난 뒤였다. 많은 이들이 그를 사실 그대로 평했고, 그러므로 그는 최동오 대위라고 불렸다. 그 호명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꼭 동오를 다른 사람의 이름과 헷갈리고, 그의 계급을 다른 사람의 견장과 헷갈린 것 같았다.
그래도 동오는 전도유망한 군인이었다. 이대로 전쟁이 이어진다면 동오가 정말이지 역사적인 진급 속도를 기록하더니 결국 별을 달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누군가가 웃었다. 동오는 웃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을 한 결과가 그렇다면, 동오는 아무래도 좋았다. 과분하다는 심정은 들지 않았다.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동오는 사철 미적지근했다. 그뿐이었다.
격렬히 기뻐하지도 대단히 슬퍼하지도 않는 동오의 바로 그 태도가 상부의 선심을 샀다. 동오의 그런 면은 권태 대신 청렴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따금 끓어오르는 승부욕이나 불살라지는 열정 따위를 억누르는, 잠잠히 따르고 거부감은 갈무리함으로써 자리를 지키는 동오의 성정이 퍽 성에 차다 여기는 이들은 많았다. 동오의 앞길은 창창해 보였다. 동오는 출셋길이 보장된 군인이었다. 한때 그것은 명헌에게 따라붙는 평가였지만, 이제 와서는 모든 일이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다.
대위님, 이러다 정말 서른 전에 영관 다시는 거 아닙니까?
맥주를 벌컥 들이키며 한 소위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동오는 대강 대답을 꾸며 냈다. 다시겠지, 멍청아! 그의 동기인 또 다른 소위가 책상을 쿵쿵 두드리며 소란을 피웠다. 동오는 그런 부산스러움이 썩 싫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제지하지도 않았다. 고작 맥주 세 잔이었을 뿐인데, 그들은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동오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포격이 떨어지고 공습 경보가 울리는 세상이 다시 도래했는데도 술과 건반과 노래는 모두 그대로였다. 엉망인데도 듣기 좋은 피아노 반주 위로 군인들이 노래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고 엄지를 배배 꼬지, 긴장은 되지만 역시 즐거워……. 제발, 자기, 미칠 것 같아, 세상에나 사랑이 커다란 불덩이 같다니, 세상에나 사랑이 커다란 불덩이 같다니!
키스해 줘 자기, 기분이 좋으니까, 나를 안아 줘, 자기야.
당신을 연인처럼 사랑하고 싶어…….
동오는 딱 권총의 무게만큼 남은 생맥주 한 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아주 많은 이들이 여전히 노래했다. 미칠 것 같아, 세상에나 사랑이 커다란 불덩이 같다니!
20.
속보입니다. 적군 사령관이 오늘 오후 네 시 사십사 분,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적군 사령관이 오늘 오후 네 시 사십사 분, 자택에서 사망한 채…….
21.
동오는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오전 여덟 시 반 마침내 종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양국 임시 정부는 이후로도 대륙의 평화 유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약조하는 의미로…….
전쟁이 끝났다. 봄이 도래했다. 그리고 오늘은 동오의 제대일이었다.
22.
그때 동오는 허리에 총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있었다. 간호장교들, 군간호사들, 군의관과 의무병들이 알코올과 이름 모를 스테인리스 기구들과 거즈와 붕대 따위를 들고 침대와 침대 사이를 바삐 오갔다. 동오의 부상은 호전되고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늦겨울이라 상처가 덧나지도 않았다. 동오는 붕대를 풀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곧장 다시 전방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끝내 없었다.
임시로 총리직에 떠넘겨진 한 사내로부터 항복 선언이 들려오던 날을 동오는 기억했다. 동오는 그때 아직 야전병원에 있었다. 간호장교가 그의 붕대를 갈아 주었다. 내일이면 다시 몸을 움직이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고는 한순간 환희에 찬 사람들이 막사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들으셨습니까? 전쟁이 끝났습니다! 어떤 환호가 따라붙을 틈도 없이 누군가가 막사 밖에서 샴페인을 터뜨렸다. 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동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가를 찌푸렸다. 마찬가지로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간호소위가 탁상에 놓여 있던 구식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기쁜 소식입니다. 적국 총리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긴 전쟁이 끝난 겁니다……. 늘 듣던 그 앵커였다.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금 읊었다. 적국 총리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드디어 긴 전쟁이 끝난 겁니다!
23.
정말 가십니까?
노래 부르는 목청이 시끄러웠던 남자가 슬픈 낯으로 물었다. 그는 이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동오더러 이런 식이면 서른 전에 능히 영관을 달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그자였다.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동오는 그냥 희미하게 웃었다.
간다.
그러나 뒤늦게 덧붙였다. 작별 인사 없는 이별이 어떤 것인지 동오는 알았으므로.
떠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동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발 아래 무겁게 매달려 있던 군화도, 어깨를 짓누르던 군장도 이제 없었다. 소위니 대위니 하는 이름도 없었고, 손 닿는 곳에 늘 두었던 총도 없었다. 동오는 군을 떠났다.
동오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24.
대형 경기장이 허물어진 터는 생각만큼 넓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나무들이 너무 많이 자라 버린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동오의 몸집이 너무 커졌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그 자리는 농구장이 아니었다. 림도 없었고, 3점 슛 라인도 없었다.
그래도 동오는 어디쯤에 그물이 달려 있었고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면 깔끔한 3점 슛을 올려 넣을 수 있었는지를 기억했다. 그의 손에 공은 없었지만 동오는 그 자리에 서 보았다. 하지만 너무 멀었다. 있지도 않은 림이, 그가 공을 던져 넣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동오의 몸이 너무 커 버린 탓이었다. 지금의 보폭은 그때의 두 배쯤일 테니까. 동오는 잰걸음으로 간격을 좁혔다. 꼭 이쯤이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3점 슛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래, 어린 동오가 말했다. 연습 열심히 해야겠네, 뿅. 명헌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명헌은 포스트업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기술이었더라, 동오는 고민했다. 공을 잡고, 림을 등지고. 그러나 그때 명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실 동오는 그가 왜 구태여 이 빈터를 보려고 발길을 옮겼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향수였을지도 모른다.
동오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러고는, 농구공을 사러 가기로 했다.
25.
농구공을 들고 동오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까지인가 하면, 글쎄, 농구장이 나올 때까지였다. 농구화는 생산이 끊겼지만 농구공은 아직도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동오는 깨진 아스팔트 바닥에 공을 튕겼다. 바닥의 금에 맞은 공은 동오처럼 정처 없이 튀어올랐다. 봄이었는데 그사이 여름이라도 된 건지, 도로는 뜨거웠고 햇볕이 작열했다. 농구공의 고무 표면도 꼭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는 했다. 하지만 동오는 구태여 그늘을 찾지 않았다.
동오는 계속 걸었다. 농구장이 나올 때까지. 논밭과 부서진 놀이터를 지나, 디귿 자 형태의 흰 건물 한쪽은 시커멓게 그을려 버린 학교가 보일 때까지.
중학교였던 것 같았다. 거뭇해진 한쪽 벽이 눈에 띄었지만 반대편 긴 복도 역시 창문이 몽땅 깨져 있었다. 운동장 군데군데 놓여 있는 컨테이너들은 한때 교실이었던 듯했지만 꼴이 성치 않았다. 찌그러지고, 구겨져 있었다. 구불구불한 철제 표면에는 녹이 슨 지 오래였다. 동오는 그것들을 지나쳐 긴 건물의 심부를 향해 걸었다. 부서진 복도를 길게 돌아, 아마 건물들의 안쪽에 있을 간이 경기장을 향해서.
모퉁이를 돌 때쯤에는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소란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동오와 같은 아이들일 터였다,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 멋모르고 폐허를 뛰노는. 동오는 모퉁이를 돌았다. 퉁, 하고 무언가가 발에 부딪혀 나갔다.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통, 통, 튀었다.
농구공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몸을 낮추기 전에 동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면의 광경을 목도하고서는 다음 행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옆구리에 농구공을 낀 채 동오는 멈춰 서고 말았다. 공을 주워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그다운 다정함도 하얗게 휘발시켜 버렸다. 그는 다만 그 자리에 뿌리내린 듯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바닥이 우레탄으로 코팅된 널찍한 농구장에는 그물도 없는 림이 하나 남아 있었다. 퉁, 퉁, 묵직한 농구공이 바닥재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열 살 남짓의 아이들 무리 속에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흰 배경에 검은 줄, 커다랗게 4라는 숫자가 적힌,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농구 유니폼을 입고. 아이들보다 키가 머리 두 개는 큰 사내였다. 끄트머리가 조금씩은 긁히는 듯했던 특유의 목소리로, 차분하고 동요 없는 어조로……, 그가 말했다.
트래블링, 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