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2월
- Y -
1
첫 박을 절고도 다이얼 음이 부드럽게 울린다. 그사이 비밀번호가 바뀌었을까 싶어 힘주어 당긴 현관 문고리는, 마음 썼던 게 무색하게 쉽게 열렸다.
기념일로부터 하루씩 흐르던 디데이가 멈췄는데도 12 월 30 일 네 자리가 여전한 게 이상했다. 이유 없이 비밀번호가 되기엔 너무 쉬운 숫자였다. 쾅 소리가 나게 닫힌 현관문이 마지막 기억이라 다시 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바꾸거나 혹은 바꾸지 않은 건지, 그저 놔둔건지도 알 수 없었다. 엉겁결에 열린 문고리를 쥔 채로 건조한 눈과 마주치는 게 더 빨랐다. 줄지어 늘어진 초록색 병들에 뭉친 침을 삼켰다.
"안 받아서 올라왔어."
"차단했다뿅."
"그랬구나."
시끄럽던 속이 쑥 내려간다. 혼자 곱씹은 만일로 시작되는 여러 아우성들은 내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차 잠깐 대 놓고 짐 가지러 왔으니까."
빤히 향하던 시선이 쉽게 삐딱해졌다. 수챗구멍을 솎는 것처럼 익숙하게 손가락 사이에 병목을 여러 개 끼워 건진다. 옮겨 담지도 않고 포장째로 돌린 레토르트 안주에 한마디하려던 입을 다물고 널린 포장 껍질들을 탁상 위에서 집어 낸다. 잔해를 치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부산스러웠다. 검지에 묻는 싸구려 양념이 입에 닿은 것처럼 고추장의 텁텁함이 느껴졌다. 개수대에서 짧게 물 소리가 났다.
탁상 위를 어지른 사람은 제육 냄새에 섞인 이질적인 향수 때문에 밥맛이 뚝 떨어져 의자를 뒤로 끌었다. 지난 사 년간 저 향기에 안정감이나 애정을 느꼈던 것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 꼴을 제일 보이고 싶지 않던 사람이 찾아온 불시가 하필 지금이라는 게 달가울 턱이 없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달고 살던 미안해도 안 하기로 했나 봐용."
"아, 또 내가 먼저 사과해야 돼?"
퇴근 후 어질러진 집에 루틴처럼 따라붙던 잔소리가 없었다. 귓등으로도 안 들린다는 듯 어깨에 콩 박아 오던 둥근 머리가 없어서, 나 없으면 이런 거 누가 해 주냐? 물어보면서 두드릴 엉덩이도 없었다. 최동오가 오늘도 식탁을 치우는 건 이상했지만 능숙했다. 마지막 소주가 반 정도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 두었다.
"야."
고작 두 번만에 뿅 소리가 사라진다. 어미가 죄 물렸다는 걸 이따금씩 붙여 달라 조른 건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낮게 깔린 저음은 결코 주문한 바 없었다. 이건 싸웠던 날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들으라는 것만 같았던 한숨이 귀에 쿡 박혔는지 보름이나 됐는데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 주장 시절 생각난다."
이런 식으로 진짜 사람 잔소리를 안 듣는 게 어떤 건지 몸소 돌려줄 유치한 계획 역시 단언컨대 세운 적 없었지만.
"옛날엔 네가 목소리 깔면 이런 말도 참 무서웠는데."
"웠는데."
"그냥."
"싱겁네용."
"여기서 등 두드려 주면 좀 웃기잖냐."
"그건 항상 내가 했는데 해 준 척 지렸다뿅."
농담을 받아친 반칙 같은 말에 못 들은 척 뒷목을 주무른다.
"소주 한 병에 토하는 새끼가."
"네가, 센거야, 인마."
확인 사살에 말을 절었다. 와서는 멀끔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누구는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서 툭 던지는 말로도 대미지를 넣는다는 게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는 빠르게 마셔서, 그때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성의 없는 변명을 하기엔 이명헌이 토하는 최동오 등을 두드려 줬다는 전적이 좀 됐다. 그 정도로 약한 건 아니라는 말을 뱉어 봤자 내보인 표본을 생각하면 잘 쳐 줘도 제 살 깎아먹는 소리가 된다.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한 지만 사 년을 넘겼으니 이 정도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너 이러는 거 구단 후배들이 다 봐야 하는데."
"나도 너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 많이 봐줬뿅."
후배들이 보면 기절할 모습이 부족했던 건지 소주 뚜껑의 철사 꼬다리가 요철 모양으로 구부러진다. 이 정도로 엿을 먹기엔 너무 컸지. 닭과 달걀 같은 선빵의 시작을 논해 보자면 그건 합의되지 않은 방문이 먼저겠다만.
지금 술을 마시고 있는 이명헌이 사실은 헤어지고도 꽤나 멀끔하게 하루를 해냈고, 시합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뛰었으며, 줄줄이 터진 슛 탓에 안 가던 2 차까지 못 이기는 척 끌려갔다가 다음 날 스케줄까지도 괜찮게 소화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리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휴대 전화를 부침개 뒤집듯 열었다 뒤집었다는 사실을 같이 묻는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진창이 되는 기분까지도 참았지만, 항상 한 시간 전에 수신했던 '잘하고 와' 문자 한 통이 없었을 땐 내친김에 기어코 차단까지 했다는 경위도 숨길 셈이었다. 구독 서비스가 아니라 애인이 시간 맞춰 보내 주던 응원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랬던 사람이 쉬는 일정까지 고려하고 방문하실 줄 몰랐던 탓이다. 접시를 앞으로 밀자 보란 듯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나랑 말 안 할 거야?"
"말해 봐야 소용 있나."
언제 혼자 멋대로 누그러진 건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 쎄하다 못해 얼음장처럼 표정을 굳히고 빈정댔던 최동오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어디선가 감정을 갈무리한 건지 다시 단정하게 제 앞에 섰다는 사실이 이명헌은 기가 찼다. 신물이 난다는 말로 상처를 준 새끼가 들어와서는 살살 눈치를 본다는 것도 웃겼다. 하긴, 어절마다 씹듯이 뱉었던 지긋지긋하다 소리는 아직도 쓴데 양심이 있다면 그래야 했다.
"너 듣고 흘리기 천재뿅."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마지막 다툼에 대한 말인 걸 알았다. 나가기 전처럼 서늘한 온도로 돌아가려고 내지른 말은 아니다. 되받을 힘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지금은 없었는데 그냥 관성처럼 나왔다.
다시 잔을 들어 벌컥 마신다. 그걸 본 최동오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그걸 알고도 안주를 집지 않았다. 굴러 다니는 소주 뚜껑이 다섯 개인데 주사는커녕 혀 꼬이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이제는 해장국 끓여 엉겨 오는 팔다리를 부축해 앉힐 사람이 없는 걸 모르는 건지, 그랬었던 사람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고 시위하는 건지.
"그건 그냥, 나한테 과분한 게 싫은 거라고 했잖아. "
"아아, 과분. "
비웃는 걸 그냥 놔두고 더 묻지 않는다. 들은 말을 인용했을 뿐인데, 과분하다는 말을 뱉고 나니까 체기가 올라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구석 재떨이 위에 오도카니 놓여 있는 자신의 담배를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칭찬 누가 싫어하냐. 맞는 말이 아니니까 듣기 싫은 거야."
짜증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입에 담배를 한 개비 물지도 않았다. 대신 방충망을 눌러 여는 하얘진 손끝처럼 꾹꾹 눌러 말했다. 이명헌은 항상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아서 그게 좋았던 적도 있었는데. 코트에서 백 명은 우습게 몸 비비벼 살던 공간에서도 줄줄 읊어 냈던 상대에 대해 사 년간 알아낸 게 있다면, 모르는 건 곧 죽어도 모른다는 것.
어른들이 하는 착하다는 말은 그때도 칭찬이 아닌 걸 알았다. 어느 학교에 가도 에이스로 기용될 수 있다는 말 또한 칭찬이 아님은 조금 더 늦게 알았지만, 동급생들이 하는 비슷한 아류의 추어올림들은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감사함 없이 감사히 받았던 칭찬들이 이상한 겸양과 합쳐져 속을 꼬았을 뿐인데 더부룩했다. 그 체증이 누구 때문일까. 심통을 부리는 대신 자리로 돌아와 맞은편 의자 위에 올라간 다리 한 덩이를 밀어 떨어트린다. 자리를 차지한다.
"어쭈."
언제는 얼굴 보면 풀릴 거라고 했으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얼굴에 티가 났을지도 모른다.
"나한테 꺼지라고 했던 말 취소 안 할 거지."
"그게 취소가 되는 건가? 듣고 기분이 상했는데."
찡그리는 얼굴 탓에 마음이 철렁 떨어진다.
"아니. 나 말고 네 기분용."
이명헌은 마른 세수를 하다가 그대로 손바닥에 눈두덩을 묻은 채 대답했다. 얇은 피부를 사이에 두고 눈알을 지그시 압박하고 있던 손바닥을 둥글린다. 이명헌은 취소해 달라는 최동오의 말을 이해하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이 개싸움이 취소가 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매번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는 없지만, 되짚는 건 이명헌만 했다. 아닌 건 아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최동오는 매사가 마음에 달려 있으면서 대중도 없었다.
바람이든 거짓말이든 어떤 문제여도 얼마간 찬바람을 맞고 돌아와 괜찮다는 대답을 내밀 것 같았다. 그건 만에 하나 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손쓸 수도 없게 놓아야 할 것처럼 만들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넌 그럼 우리가 싸운 일이 없던 일이 되나뿅?"
아닌 걸 알아서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할까. 헤어지자는 말 실언이었다고 빌어?"
"무릎 꿇는 걸로 유세 부리네. 그건 빨 때마다 굽잖아. "
그러쥔 손이 입가에서 두어 번 왕복한다. 적어도 양치 흉내는 아니었다.
"이명헌."
"무서워라."
평이하게 고저 없는 말로 나오는 이런 말들로 말문을 턱 막아 버리는 주특기에 순간 어지러웠다.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이명헌이 낯설어서 들이키는 숨 없이 두 번을 뱉었다. 대화하자고 앉은 주제에 어디부터 짚고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짐 가지러 왔다며, 동오."
눈치가 없는 대신 가끔 촉이 좋았다. 턱짓이나 손짓 따위의 비언어적 표현이 붙은 것도 아닌데 들고 꺼지란 말로 들리는 게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2
"요새도 시합 들어가기 전에 성호 그어?"
"아이, 이제는 코트를 안 들어가지."
3
지 같은 거 대학 가면 한 트럭은 널렸다고 부모님께서 깎아 뒀을 때가 나았지. 이제 어울리도록 기른 머리를 어울리게 매무시할 줄도 알고, 열심히 돈 모아 장만한 자차 값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코트만 입고 다니는 것도, 몇 번 마네킹 옷을 그대로 벗겨 입더니 제법 그럴싸한 옷걸이가 된 것까지 전부 짜증 났다. 입이 닳도록 말했으니 모를 수가 없는 건데도 이제 와 억울하면 정말 유치한 거였다.
생각하고 가르치면 제 것처럼 소화하는 놈들이 있다. 비단 코트 위 돌파 방법에 국한되지 않아도 최동오는 흡수력이 빨랐다. 멍한 얼굴로 끄덕거리고도 하나의 신호로 둘을 낚아 갔다. 헐렁한 구석이 있는 주제에 막상 챙기기엔 혼자 잘하는 방식으로, 최동오는 고등학교 내내 눈으로만 좇게 했다. 구태여 손을 댈 일까지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정말 뻗고자 하면 가닿지 않게 몸을 피했다. 살피고 관찰하며 정답과 오답을 짐작하는 동안, 최동오는 그렇다 할 채점도 안 해 주었다.
"나 꺼질까?"
"넌 진짜 모를 때 나한테 안 물어보잖아뿅."
피곤하다는 얼굴에 미동이 있었다.
"넌 뭘 알 때만 나한테 물어뿅."
어디서 어떻게 괜찮아진 건지, 누가 풀어 줬는지, 혼자 가만히 있다 삭인 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아무것도 몰랐다.
"난 빈정거렸던 최동오 다 기억하거든."
이야, 넌 좋겠다, 내가 쉬워서. 이명헌을 기막히게 했던 말을 직시시키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쉽게 피하고 있던 현실로 정확하게 되돌아간다. 단지 당장 엉망인 상태로 쏟아 놓지 않고 싶었을 뿐이라고 회피했던 수 차례의 마찰 동안, 이명헌이 감정을 고르는 시간 동안 최동오는 그걸 통째로 씹지 않고 삼켰다. 돌이켜 보면 생각보다 자주 이런 식으로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감정을 풀어 화해했었다.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가 이내 안 웃는 모습을 본다. 다 알면서 고집을 부릴 땐 죽어도 안 움직였다.
"네가 어디서 혼자 기분 풀어 왔는지 모르겠는데, 마지막에 네가 어떻게 나갔게."
날것의 감정을 쏟지 않으려고 미룬 거라는 변명이 더 통하지 않는다. 문제 자체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음을 최동오가 인정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 주간 어떤 게 문제였을까 복기했던 게 다 소용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꺼지라는 말을 취소하면 다시 쫄래쫄래 오게 되는 건가. 헤어지자는 말도 취소할 수 있어서 그렇게 뱉은 건 아니어야 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하…… 됐다. 취소할게삐뇽."
열어 둔 베란다에서 바람이 들어온다. 여름 바람이 너무 시원하게 불었다.
4
"내가 취하니까 너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되게 용기 낸 거였는데."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차가운 겨울 밤공기였다. 취기가 올라서 기분이 좋았고, 이명헌이 보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마음을 확신했던 순간으로 이 기억을 돌이킨다는 걸 말한 바 없었으니 지금 이렇게 여는 서두가 추억팔이 같을까. 반구도 없이 알아 주길 바라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후회해도 지금은 전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혼자만 알고 있어도 괜찮았는데 시시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게 싫었다.
"그렇다고. 몰랐지?"
"그러시겠지."
"그때도 네가 싱겁다는 표정을 지었어."
"속 편해서 좋겠어, 최동오. 그게 용기라."
처음 자각한 마음이라는 부연 없이도 이명헌은 같은 기억을 생각해 냈다. 화자를 감안할 때 그건 상당히 충동성 짙은 고백이었는데 담담한 척 감정을 꽤 잘 숨겼었나 보지. 어떤 감정을 끓이고 졸이다가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마음을 고백했었다. 그날처럼 걸터앉은 구 애인의 옆모습을 가만 본다. 그때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답하고 싶다는 말을 기다리는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기억했다. 이건 사랑한다는 말에 "내가 더"라고 대답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사랑 고백이었다.
한여름 밤 동상이몽을 꾸는 동안, 소파에 포개져서 묵직한 무게감에 안 무겁냐 형님 건재하시다 같은 농담 따먹기나 했을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입술을 비비고 머리를 묻고 다리를 얽은 채 싸우기 전날 밤까지도 있었다는 사실이 더 힘들게 했다. 이어 하기엔 보름 동안 닫을 수도 없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끝을 마주할 자신도 없으면서 무슨 용기로 짐을 빼 오겠다고 여기 앉았지. 찬기가 다 식어 미지근할 알코올이 시선 끝에 머문다.
"나 말술이잖아."
굴러다니는 술병을 훑어본다.
"이럴 땐 나도 취한 척 좀 하고 싶다뿅."
새로운 잔에 술이 차오른다.
"진심용."
마시면 눌러앉을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된다는 속내가 읽힌 것만 같았다. 그냥 권주일 뿐인데 최동오는 자신의 속이 단단하게도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잡아 줬으면 하고 생각했는데도, 다 알고 내밀어진 잔이라고 생각되니 손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다 내렸던 자존심이 다시 문제가 됐다. 유치한 새끼라고 말했지만 결국 같이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후회할 걸 알았는데 차례는 거기서 멈췄다.
"안 마셔?"
"운전해야 돼."
속이 시끄러워서 무감한 대답이 앞섰다. 순간 뱉은 말이 오답임을 깨닫는다.
"나, 마실까?"
잔을 다시 회수한다. 되물었지만 다시 권하지 않는다. 잘못 내린 지하철 문이 돌아보자 닫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나갔다. 스크린 도어를 사이에 두고 기차가 떠나는 걸 멍하게 지켜보는 동안, 이명헌은 쓴 술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서로가 내민 손을 번갈아 내치는 기분이었다.
5
이명헌만 취중인데도 진심은 자신만 토한 것 같았다. 자신은 약간의 취기로도 감정이 갑절이 되는데, 궤짝으로 마시고도 주사 한 번을 빌리지 않는 놈이 서운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침묵에 정말 남은 일이라고는 밖으로 나가기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냉기가 속상했다는 사실은 이제 더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르면서 미안해부터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그걸 누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들었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일을 망칠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계속 남은 기회가 없는 것만 같았다.
재회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받아마시지 못한 술이 아른거렸다. 차까지 가져왔으면서, 술을 한 모금 받아 마셨다면 저승에서 빌어먹은 석류알처럼 못 나간다는 핑계로 좋았을 텐데. 저번 싸움처럼 취해 엉겼으면 지금 이렇게 겉옷도 제대로 벗어 보지 못하고 나갈 일은 없었을 터였다.
"늦기 전에 가야지…… 용."
"응. 밖에 어두워진다."
"놓고 간 건 부쳐 줄게뿅."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고마워."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 들인 물건들은 많고 그마저도 주인이 구분이 안 되는 게 많았다. 산왕공업 고등학교 시절 룸메이트와 나눠 쓰던 물건들을 전부 후배들 쓰라고 두고 나왔을 때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합친 살림을 둘로 나누는 건 자기 물건을 챙기는 일이 아니었다. 사 년을 부대끼면서 혼자만 썼던 건 이 집을 전부 통틀어도 재떨이밖에 없어서, 아까 챙긴 담배만 주머니에 넣어 두고 옷장을 한참 쳐다봤다.
"너 이거 잘 입지 않았나?"
"네 건 다 가져가."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생각보다 많은 게 변했나. 오래 같이 걸었는데도 여전히 많이 달랐다.
이 정도로 헤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태가 아니냐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주장 시절 네가 내어 주던 답만큼이나 머리를 시원하게 정리해 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목을 긁다가 기침한다. 물기 있는 목소리이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이 닫히면 다음 차를 타면 될 일이고, 술 한잔하는 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괜찮은 건데, 이제는 아니었다.
사랑의 총량이 이별은 상관없다는 게 정말로 이상했다. 끝은 끝이라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캐리어는 넣은 것 없이 금방 닫혔다.
"명헌아."
"어."
그래도 너를 내가 싫어할 일은 평생 없을 거야.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달막거리다가 입술을 꾹 닫았다. 힘들 때 그렇게 정확하게 위로하고 응원해 줬던 사람이 헤어졌다고 미워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책으로 갉아먹었던 밤들이나 느린 출발, 불면과 고갈, 그리고 인터미션들이 다 그랬다.
잘 지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건 사 개월이 더 흐른 연말 동창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