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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랑과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 절래 -

삶과 사랑과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부서진 심장에게 안부 전합니다

여분의 맥박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낮과 밤이 자리를 바꾼다. 새우처럼 웅크렸던 몸을 펴고 암막 커튼을 걷자 어둑한 거실에 푸르스름한 빛이 들이친다. 얼굴을 찡그리다 다시 꼼꼼하게 커튼을 친다.

기름기 남은 드립 포트에서 커피를 내리고 소파에 앉는다. 시트에서 풀썩 먼지가 날린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치우지 않은 어제의 저녁거리가 그대로 있다. 쿰쿰한 방 안에 퍼지는 커피 냄새를 맡으며 스크린을 켜고, 수북히 쌓인 메시지를 그대로 둔 채 기삿거리를 읽어내린다. 전날 시가지에서 벌어진 소요가 헤드라인이었다. 반정부 시위대가 군경과 어떻게 마찰했고 어떤 상해를 입히고 어떤 구조물을 파괴했는지, 그리하여 투입된 특수 강화 군인 부대가 어떻게 소동을 잠재웠는지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시덥잖고 호들갑만 떠는 기사들을 읽고 있노라면 무질서에도 미덕이 있다는 것을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오는 이런 날, 군경이 시위대를 휩쓸고 간 다음 날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간밤에 동오를 찾는 연락만 해도 십수 개였다. 동오는 떨어진 파편을 모아 부서진 팔과 다리를 기울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말하자면 과거에는 정비공이었을 사람들이 요즘 같은 때에는 의사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모름지기 의사라는 이름을 빌어먹는 작자들이 정비공 일을 못 익혀 끙끙대서는 전망 없다는 소리나 듣기 일쑤였다. 기술은 하나같이 돈이 되는 시대랬던가. 기술이 아니라 목숨이 돈이 되는 것이다. 기술 값 대신 목숨값을 받는 거지……

 

비로소 하루를 알리는 자명종이 울린다.

 

 

공기가 서늘하다. 차가운 조명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사람과 기계와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와 사람도 기계도 사이보그도 안드로이드도 아닌 무언가가 한 자리에 모인다. 어떤 가로등보다 찬란한 네온사인. 도로를 가로지르는 엔진의 비명. 그 뒤를 따르는 시끌벅적한 사이렌 소리. 쓰러진 밤에 생기를 불어넣는 무기물. 멀리서 옥외 전광판이 빛나고 스크린 속 회청색 의수가 유연하게 회전한다. 팔을 굽히고 주먹을 쥐면 마땅히 힘줄이 불거질 텐데. 이 시대의 마케터들은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동오는 그 아래, 개미굴 같은 골목을 걸었다. 편안하지만 정교한 걸음으로. 곧추선 척추에 무게를 싣고 뚜벅뚜벅 걷는다. 얼굴에 낯익은 피로가 서려 있지만 지친 기색은 아니다.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 으레 가지고 있는 표정이다.

신시가지를 벗어나 두 블럭 정도를 내려오면 휘황찬란한 거리의 풍경이 조금씩 사그라든다. 신시가지의 활기에 질린 사람들은 좁고 한미하고 어두운, 그러나 신시가지의 둘레에 머무는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다. 사람 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이따금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고글이나 헬멧을 쓰고, 바이크나 레일건 따위를 점검하다가도 고개를 들어 안부를 묻는다.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어디 가, 하고. 동오는 수더분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한다.

아직 조명에 불을 밝히지 않은 가게의 문을 주먹으로 두 번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난다. 쿵, 쿵, 쿵, 쿵, 다섯 걸음이 채 되기 전에 묵직한 발소리가 멎는다. 문이 반쯤 열리면 석상 같은 사내가 동오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남자의 이름은 정성구다. 그들은 일상에 익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리고 동오는 따스한 불빛이 들어오는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인다.

 

“뭐냐 또.”

 

마른 수건으로 꼼꼼하게 유리잔을 닦던 성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은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쳤다. 성구와 동오는 오륙 년 정도 알고 지냈다. 얼굴을 튼 지 한참이 지나서야 사실은 대학 동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둘 다 농구부였댔다. 성구가 이학년 쯤 큰 부상으로 이탈하는 바람에 경기를 같이 뛴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 그 덩치로 농구 안 하는 건 반칙이지. 동오는 생각했다.

둘은 꽤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각자가 서로를 둔치라고 생각하는 점이나, 얼굴만 봐도 무슨 일이 있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나, 바보 같고 답답한 구석을 가진 점까지. 벌컥 들어와서 푸념이나 잔뜩 하고 가도 괜찮은, 아주 막역한 사이라는 점도 포함해서.

 

“그냥…….”

“그냥?”

“나흘한테 연락이 왔어.”

“그래서?”

 

동오가 한 손을 들어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심장 언저리를 배회하던 손이 멈췄다.

 

“여기에…… 심장을 하나 더 달아달래.”

“……해 줄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어……. 스툴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친 동오가 메신저 창을 다시 확인했다. 나흘의 연락이 도착한 것은 오늘 새벽이었다.

 

[물건 구했어]

[오늘 갈게]

 

나흘. 그러니까 이명헌은 그를 찾는 고객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보수가 있는 의뢰에만 움직이는 용병으로, 적당한 보수와 나흘 간의 말미를 대가로 무슨 일이든 해결했다. 요컨대 암살자, 혹은 청부업자, 다시 말하자면 심부름꾼이다. 나흘이라는 이름도 어떤 의뢰든 나흘을 넘기지 않고 처리하는 까닭에 붙은 별명이었다.

누가 먼저 나흘이라고 불렀는지는 몰라도 명헌 본인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는 은밀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동오가 보기에 나흘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을 뿐이었다.

그와 동오 사이에 있는 대부분의 일은 그야말로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 돌아갔다. 필요로 하면 내어준다. 의뢰를 끝내면 대가를 치른다. 의뢰받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대가 이상의 값은 치르지 않는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되도록 둘 사이에 가둔다. 신뢰를 건네면 그것을 지킨다.

동오는 어느샌가 그의 은밀한 주치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흘의 팔과, 다리, 힘줄과 뼈, 각막이나 눈알 따위를 고쳐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네 심장을 쥐기 전에는 그만둬야 했을지도 모른다. 동오는 나흘의 세계가 두려웠다. 단지 그가 무정한 살인자여서는 아니었다.

 

 

* * *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동오가 길지 않았던 회사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직후의 일이다. 그때 동오는 막 사직서를 내고 백수가 된 청년이었다. 집과 회사를 기계적으로 오가는 생활에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쩔 줄을 몰랐던 것 같기도 했다. 퇴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동오의 인생에서 그만큼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신체 개조 임플란트 사업을 주름잡는 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 즈음 회사에서는 심장을 대신할 임플란트를 상용화하고, 뇌에 직접 이식하는 임플란트를 개발하는 데 열중했다. 조용할 틈이 없는 나날이었다. 반쯤은 여론과의 전쟁이었다. 심장과 뇌 임플란트는 언제나 윤리적 딜레마를 자아내고 안전성 논란에 시달렸다. 기술적 문제야 어떻게든 넘어설 수 있는 산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대중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나마 흉부에 장착하는 임플란트는 심장 이식 수술이라는 의료 행위의 연장선으로서 윤리적 논쟁을 약간 비껴갈 수 있었다. 심실에 부분적으로 장착하는 임플란트나 아예 심장을 대체하는 임플란트는 신체 내부에서 스스로 발전해 동력을 얻을 수 있게끔 개량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다.

자체 동력을 갖춘 새 인공 심장은 외부에서 충전할 필요가 없고 중량을 획기적으로 줄여 일상적인 활동에도 지장이 전혀 없었다. 신체 적합성을 갖춘 소재를 사용해 다시 가슴을 열어제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위험도 극히 적었다. 기존 심장을 대체할 수 있는 임플란트는 물론, 심실에 부착해 심폐 기능을 향상시키는 보조 임플란트도 함께 출시했다.

두부 삽입용 임플란트는 대중의 불안에 부딪쳐 임상 시험 단계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회사 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심장 임플란트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에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었다. 정부에 꾸준히 줄을 댄 덕에 언론을 매수하고 여론을 잠재우는 것도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어쨌거나 회사는 끈질긴 로비 끝에 임상 시험을 마치는 대로 군 납품을 진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즈음 군 수뇌부는 꽤 즐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특수 강화 부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부대에 소속된 병사 모두에게 심장 개조 수술을 실시하고 수술 이력과 수술 후 혈류의 실시간 데이터가 모두 정부에 귀속될 예정이었다.

자연 심장 옆에 추가로 이식하는 인공 심장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펌프를 이용해 스스로 연속 혈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생성한 혈류는 적시에, 특히 전투 중 신체의 요구에 맞춰 산소를 가진 혈액을 공급해 지구력 등 신체 능력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한쪽 심장이 기능하지 않아도 다른 심장이 심폐 기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모든 대원이 이중 심장 임플란트를 이식받는다면 그 전투력은 평범한 부대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동오는 임상 시험 단계에 투입된 팀원이었다. 특수 부대 개설에 앞서 선별된 몇 명의 병사들에게 이중 심장 이식 수술을 실시하고 그 경과를 관찰하는 일을 했다. 임상 시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술 결과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긍정적이었다. 이중 심장을 가지게 된 병사는 신체 능력의 모든 지표가 일반병의 두 배를 웃돌았다. 임상 시험은 예정보다 빠르게 종료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군 납품을 위한 생산에 돌입했다.

몇 개월이 더 지나자 이중 심장 특수 부대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들은 획기적이고 효과적으로 반전주의자들과 반정부 시위대를 격파했다. 시민들이 암암리에 보급하는 물품으로는 가슴을 쏘아죽여도 살아남는 괴물 같은 부대를 이겨낼 길이 없었다. 시위대는 그야말로 씨가 말랐다. 거리를 말끔히 청소한 군 정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회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그만한 무력은 정부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병사 수십 명의 맥박이 단 하루,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스크린을 통해 기록됐다. 이상 징후가 발견되는 즉시 보고 후 부품을 교체했다. 동오와 팀원들이 개조한 심장을 달고 거리로 나간 부대는 사람들을 처형했고, 그런 일이 자랑스럽게 기사로 발표되었다. 의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뼈와 살과 힘줄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면서도 단지 기계를 수리하고 부품을 조립하는 엔지니어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혈류를 측정한 그래프만 봐도 진절머리가 났다. 왜 아무도 의문하지 않을까.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의심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동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알맞은 역할을 가지고 잘 조립된 부품이었다. 정교한 손놀림으로 가슴을 열고 인공 심장에 달린 이음새에 혈관을 연결했다. 역겨웠다.

그가 이직을 결심한 것으로 오해한 팀 동료들이 과거 퇴사한 상사에게 연락을 넣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이제는 다른 회사의 팀장이 된 옛 사수의 얼굴을 맞대고 그가 왜 업계를 떠나려고 하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했다. 그의 모든 변명은 왜? 굳이? 하는 질문으로 상쇄되었다. 동오는 조금도 떠날 이유가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떠날 이유가 없는 사람은 떠나면 안 되나요? 돌아올 답을 알고 있어서 동오는 사직서를 내밀기만 했다. 그가 다시 회사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 날 명헌은 동오의 거실에 멋대로 침입한 불청객이었다. 뻔뻔하게도 잠에 취한 동오의 뺨을 두드려 깨우기까지 했다. 지금은 팔꿈치에 단단히 붙어 있는 납빛 의수를 한 손에 덜렁 들고서. 상황 파악이 덜 된 동오에게 대뜸 몇 가지 공구와 간단히 먹을 것, 그리고 물을 요구했다.

 

“그것만 있으면 됩니까?”

“그래…… 용.”

 

용? 가택에 무단 침입한 괴한 주제에 말투가 너무 이상하지 않나. 인상을 찌푸리며 공구를 찾는 척 테이블 서랍 밑에 달린 비상벨을 더듬은 순간이었다.

 

“허튼 짓 말고. 말한 대로만 해용.”

 

퓩,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동그란 구멍이 났다. 비상벨에 닿은 손이 5cm만 앞서 있었어도 함께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시선을 들자 명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을 들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장난감처럼 권총을 든 채로 마저 안 찾고 뭐 하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그런데 누구시죠?”

“범죄자 뿅.”

“그래 보이네요.”

“똑똑하군용.”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그는 의수가 빠진 한쪽 팔을 그대로 드러낸 채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제 집처럼 편안해 보였다. 여전히 손에 들린 권총을 빼면.

 

“이리 와 봐용.”

“…….”

“그거 들고.”

 

동오가 전동 드라이버를 들고 명헌에게 다가섰다. 명헌은 눈으로만 의수를 뜯어보고도 어디를 분해하고 조립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아마 혼자서도 능숙하게 의수를 갈아끼울 수 있는 모양이었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한 손에 들린 권총을 놓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명헌이 두렵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팔, 한 번 봐 드릴게요.”

“뿅.”

“총 내려놓으면.”

“뭘 믿고?”

“신고 안 해요.”

“해용. 신고.”

 

어차피 곧 수배될 텐데…… 명헌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듯 웃었다. 이윽고 허리에 겨눠진 권총이 사라졌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본 명헌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자라고 있었다. 호흡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부상을 숨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터운 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명헌이 뭐 해용? 하고 말할 때까지 명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오는 머쓱하게 고개를 내렸다.

 

“어차피 수배될 거라는 게 무슨 소리예요?”

“범죄자라는 뜻용.”

“음…….”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할 것 같아서 다시 팔에 집중했다. 납빛 의수는 출시된 지 오래지 않은 제품이었는데, 이음매가 상당히 마모되어 있었다. 팔뚝 부분에도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된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 어딘가에서 중고 제품을 구했거나…… 기실, 중고 임플란트를 구하는 루트는 수백 가지가 족히 넘을 것이다. 동오는 아예 이음매를 분해해 제거한 뒤, 서랍을 뒤져 작은 고리 모양의 부품을 새로 꺼내 달았다.

팔을 다시 붙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덮개에 나사를 조여 드러난 회로를 감추자, 명헌이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작동 상태를 점검했다. 손가락이 차례대로 유연하게 접혔다. 팔을 돌리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잘 하네용.”

“면허 있거든요. 이젠 쓸데없지만.”

“왜?”

“퇴사해서요.”

 

한 달 됐어요. 동오가 덧붙이며 멋쩍게 웃었다.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기에 망정이지, 별다른 대책도 없이 퇴사해 버리는 바람에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음 달부터는 먹고 살 일을 찾아야 할 텐데. 갑작스럽게 현실을 상기하자 입맛이 썼다.

 

“축하해용.”

 

퇴사하고 처음으로 받는 축하였다. 첫 만남의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명헌이 개머리판으로 동오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까무룩 정신을 잃은 그를 두고 명헌은 홀연히 사라졌다. 사원 최동오, 이름이 정갈하게 적힌 명함을 한 장 훔쳐서 달아났다.

 

 

* * *

 

 

번뜩 정신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성구네 가게에 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아. 나흘이 심장을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은 성구가 심각한 표정으로 잔 하나를 들이밀었지. 빨리 취하는 데는 이게 최고다, 하면서. 에메랄드 빛 술에 물을 조금 타서 건넸다. 알싸하고 화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고, 그리고…… 취한 정신으로, 누구랑, ……. 그대로 정신을 잃었나?

코끝으로 옅은 허브 냄새가 느껴졌다. 몇 시지. 급하게 시계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트는데, 소파 위로 이미 불청객의 검은 인영이 드리워 있었다. 나흘이었다. 매번 당당하게 거실에 침입하면서 경보 한 번을 울리는 일이 없었다. 동오는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언제 왔어?” 하고 묻자, 발을 어깨 너비만큼 벌린 채 부동 자세로 서 있던 녀석이 기계처럼 입을 움직였다.

 

“방금.”

 

사 분 느리게 기어가던 디지털 시계가 타이밍 좋게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모월, 모일, 이십, 일, 시입니다.

 

“거짓말하네…….”

“뿅.”

 

나흘이 보일 듯 말 듯 미소지었다. 약속에 늦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다. 들어온 지 족히 한 시간은 넘었을 게 뻔했다.

 

“미안. 그냥 깨우지. ……커피 마실래?”

“괜찮아.”

 

동오는 원두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울로 무게를 재고, 구식 드립 포트에 거름종이와 원두 가루, 그리고 따듯한 물을 부어놓고 커피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마른 입을 다시고 나흘과 눈을 맞췄다.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고 깊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잘 지냈어?”

“새삼스럽게용. 너는 어때.”

“나도 뭐…… 오늘 지나면 바쁠 거야.”

“아. 시위 뿅.”

“항상 그렇지.”

“응.”

 

작은 하품과 함께 다 내린 커피를 머그에 부었다. 목구멍으로 탄 맛 가득한 커피가 꾸역꾸역 넘어갔다. 밤은 동오에게 유달리 까다로웠다. 커피라도 때려부어서 심장을 억지로 뛰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숙취까지 더해서 죽을 노릇이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나흘이 가끔은 부러울 지경이었다.

몇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가시를 삼키는 심정으로 커피를 조금씩 털어넣었다. 나흘은 동오가 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가 이중 심장을 개발한 회사에서 사원으로 일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한다. 말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댈 핑계가 궁색했다. 네가 그 심장 달고 사람 죽이는 게 싫어서? 그럴 거라면 진작에 말렸어야지. 자가당착이다.

 

나흘이 주먹 만한 회백색 인공 심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특이하게도, 금속은 아니었다. 테이블에 올리자 미약하게 출렁거렸다. 새 심장은 두 개의 판막과 심실, 대동맥과 폐동맥을 연결할 튜브, 그리고 혈류를 생성하는 터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돌출된 튜브 위로 일련번호가 음각되어 있었다. 인공 심장에 일일이 일련번호를 찍어가면서까지 대량으로 생산하는 조직은 하나밖에 없었다. 군용품을 빼돌린 것이다.

이런 것을 함부로 가로챘다가는 죽을 때까지 군의 추적망을 피해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는 수도 있었다. 죽은 시신을 해체해 뜯어낸 것이 아니고서야 찾아볼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운 좋게 시신에서 부품을 건진다고 한들 일련번호를 추적할 수 없도록 전처리 과정을 거치는 것부터가 번거로웠다.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동오가 나직이 생각했다.

몇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동오는 솔직한 심정으로 나흘의 의뢰를 거절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너에게 이런 믿음까지는 받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말은 벌써 오 년도 더 전에 소용이 없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나흘의 새 눈알을 달아주기 전에, 새로운 팔과 다리를 달아주기 전에, 몸통을 절개하고 힘줄과 뼈대를 바꿔치기하기 전에, 그가 나흘의 은밀한 주치의 노릇을 하게 되기 전에.

 

바깥이 점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 비로소 날이 밝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쯤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수술 전에 또다시 음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 대신으로. 빈 잔을 싱크대에 던져 놓고 거실을 떠났다. 그를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동오가 침묵하는 내내 나흘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계속 기다릴 거야?” 한참의 침묵을 뚫고 동오가 물었다.

“말할 기분이 아닌 것 같길래.”

“음…….”

“맞지. 뿅.”

“하하.”

“무슨 일인데용.”

 

나흘은 외투와 장갑을 벗어 탁자에 올려둔 다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늘 몸을 감싼 무장을 하나 둘 풀어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보여주었다. 편한 반팔 소매 아래로 납빛 의수가 드러났다.

 

“그냥. 옛날 생각 나서.” 짤막한 대꾸와 함께 빈 잔을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옛날 언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아.”

 

귀여웠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명헌이 덧붙인 말에 더 견디지 못하고 푸스스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랬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친 명헌의 수배지가 사방에 깔렸다. 동오는 그제서야 명헌의 이름을 알았다. 나흘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솜씨 좋은 용병이 있다는 평범한 소문이 알음알음 떠다녔다.

매일 구제 권총 한 자루 살 돈으로 사람 하나가 도시에서 지워졌다. 동오는 같은 돈을 받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에서 멀쩡한 삽입식 임플란트를 찾아내 절제하는 의뢰를 맡은 일이 있다. 그 일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추가금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나흘이 얼마나 값싸게 일을 해결해 주는지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나흘이 요구하는 값은 허드렛일을 맡기기에는 비싸지만, 그보다 어려운 일을 맡기기에는 제격이었다. 제일 고분고분한 사람이 가장 궂은 일을 맡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든 일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고, 아무도 의문하지 않았다. 싸구려 저울조차 필요 없었다.

 

* * *

 

처음 입술을 붙인 건 그들이 두 번째로 만난 날이다. 명헌은 처음 만난 날 훔친 명함을 통해 동오의 메신저로 연락을 보냈다. 두 달 만이었다. 동오는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명헌을 거절하지 못했다. 명헌은 빈 손으로 동오의 집에 들렀다. 그들은 밤을 새워서 각자의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동오는 그가 대학에 들어가고, 자연스럽게 입사하고, 견디지 못해 퇴사한 이야기를, 명헌은 탁아소에서 출발해 온 도시의 심부름꾼이 된 이야기를. 최근 들어 까다로운 의뢰가 많아졌다고 했다.

명헌이 의뢰를 거절하지 않는 까닭은 그럴 사정이 못 됐기 때문이었다. 의뢰를 가려받을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생활이 조금 안정되고 나서는 가려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었다.

 

“기분이 어때.”

“똑같아.”

“항상?”

“항상.”

 

명헌이 먼저 다가왔다. 따듯하고 말캉한 혀가 입 안을 가르고 점막을 핥았다. 심장이 균일하게 고동했다. 이제 동오는 원하면 언제든 명헌의 맥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유연한 살덩이가 가지런한 이빨의 뒷면을 섬세하게 훑었다. 입천장을 두드렸다가, 입술을 한 번에 머금고 빨았다가, 코로 숨을 확인하며 멀어졌다. 무딘 손바닥이 귓바퀴를 천천히 문질렀다. 명헌이 턱을 장난스럽게 깨물고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뱃속이 간지러웠다. 동오는 저도 모르게 명헌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움키며 생각했다. 이대로 세상에 단둘이 남아도 좋을 것 같아. 명헌이 헐떡이는 소리가 선명했다.

 

 

* * *

 

 

아우성.

 

해가 게으를 때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길고 화려한 밤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아우성을 기적 소리쯤으로 여기면서 눈을 떠야만 한다. 밤에 잠을 청하는 것이 모범이라고 불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일어나자 같은 침대에서 잠든 줄 알았던 명헌은 사라지고 없었다. 쌓인 연락 중에 나흘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동오는 모든 연락에 일일이 대답하는 대신 현관의 보안 시스템을 껐다. 그는 주말을 뺀 매일 초저녁이면 문을 열어두었다가 자정이 되면 잠갔다. 그런 고로 손님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암묵적인 규칙이 하나 생겼다. 해가 진 뒤, 문이 열려 있을 때만 들어올 것. 무방비하지만 편리했다. 다소의 안전을 포기하더라도 친구를 여럿 만드는 것이 살아남기에는 차라리 유리한 법이었다.

짧은 진료 시간을 제한 다른 때에는 직접 발로 뛰어야 했다. 손수 부품을 조달하고 사고 현장을 방문하거나, 보수를 받고 출장을 가거나…… 이따금은 전담 고객을 받았다. 가장 돈이 되는 쪽이었다.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에서만 치부를 드러내는 까다로운 고객들의 얼굴을 동오도 몇 명 알고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나흘이 그랬다.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듯 삐그덕대는 소리가 철제 문 너머로 울려퍼졌다. 아마 오늘의 첫 손님일 것이다. 쿵, 쿵, 쿵, 쿵. 익숙한 박자와 무게가 복도에 울린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고, 성구가 예의 절뚝이는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서더니, 테이블에 구겨진 종이 뭉치를 툭 던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너덧 장씩 현관문에 철썩철썩 달라붙는 홍보 전단이었다. 성구는 그런 것들을 가만히 넘어가질 못했다. 몸집에 비해 속이 은근히 예민한 탓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감당하지 못한 만큼이 밖으로 비져나왔다. 지금처럼.

기우뚱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는 성구의 얼굴은 피곤으로 얼룩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이 새카맸다.

 

“왜 그래. 다 죽는 얼굴 하고.”

“언제는 안 그랬나.”

“그러니까. 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만 그러잖아.”

“됐다.”

“다리는 왜 또 절어. 봐 봐.”

“괜찮아.”

“괜찮은데 왜 왔어?”

“어제 꼬라지 보니까 걱정 돼서 왔다. 너 잘 사나 보려고. 집 꼴이 이게 뭐냐.”

“지는…….”

 

아이고, 이 바보가 또. 동오는 이마를 짚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속이 바싹바싹 타니까 괜히 핀잔을 주는 것이다. 알아달라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성구의 다리는 유난히 잔고장이 잦았다. 그가 갓 성인일 때 이미 중고였던 임플란트를 이식했으니 적어도 십수 년, 중고니까 거기에도 몇 년을 더한 만큼 나이를 먹은 금속 재질 다리를 가지고 사는 탓이다. 그는 회로 안에서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 합선되어 스파크를 튀길 때까지 다리를 방치해 두다가, 기어이 다리를 절뚝거릴 만큼 거동이 불편해지고 나서야 동오를 찾았다.

 

“성구야.”

“싫어.”

“일단 한 번 보자.”

“맨날 똑같아. 어제 넘어져서 그래.”

“왜 넘어졌는데.”

 

성구가 커다란 손을 들어 두툼한 눈가를 쓱쓱 문지르고는 땅이 다 꺼지도록 한숨 쉬었다. 다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면 좋겠다.

 

“왜. 나 가고 나서 가게에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뭔데.”

 

성구의 가게는 특이하고도 특별한 역사를 품고 있었다. 펍에서 일하는 일개 바텐더였던 그가 덜컥 사장이 된 것은 수 년 전, 전 사장이 대뜸 성구에게 가게를 맡기고 나서부터다.

전 사장은 이 지역 토박이였다. 젊은 날 호기롭게 연 가게를 이십 년 넘게 지탱했을 만큼 수완 좋고 노회한 인물이었다. 돌이켜보면 조금쯤은 괴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고로 죽은 친아들 생각이 난다며 성구를 가까이하던 사장은 어느 날 갑자기 공동사업자 명의에 성구의 이름을 올렸다. 내 살 날 얼마나 남았겠니, 어차피 너 말고는 물려줄 사람도 없다, 너스레를 떨면서 사업자등록증을 보여줬댔다. 그때까지만 해도 월급이나 좀 올려주는 줄 알았던 성구가 뒤늦게 기겁을 하고 만류했지만 사장의 뜬금없는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사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장에게는 가족이나 친지 하나 없고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종업원인 성구와 파트 타임 알바 두어 명뿐이었는데, 개중 누구도 사장의 행방을 몰랐다.

실종 신고를 넣은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폐수처리장에서 여러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거기에 사장도 있었다. 몸 곳곳에 총상이 세 군데, 자상이 일곱 군데, 후두부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 흔적까지 발견됐다. 함께 발견된 다른 시신들도 상태가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원을 추정한 결과 그들은 서로 다른 갱단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무허가 임플란트 유통이라든가, 지역 사업권 따위를 두고 갱단끼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수사는 거기서 종결됐다. 군경으로서는 오히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그들을 싸그리 진압할 핑계가 생기는 셈이니까.

성구는 그렇게 남겨졌다. 가게 경영이라고는 손톱 때만큼도 모르던 이십 대 청년이 하루아침에 펍 하나를 능숙하게 운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얼떨결에 가게를 떠맡고, 수 년 간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모아둔 목돈도 다 털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게고 뭐고 싹 다 팔고 정리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가게 물려준 사장 생각에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만 흐른 것이다.

여지껏 망하지 않고 숨통은 붙어 있는 것이 피나는 노력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가게를 떠맡은 뒤로 성구는 눈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가게 생각에 얼굴이 거멓게 죽어갔다. 늘어나는 대출만큼 한숨도 무거워졌다. 혹시 가게에 무슨 일이라도 터지는 날이면 말 그대로 죽상이 됐다.

지금처럼. 그는 불이 간절한 얼굴로 가슴팍을 뒤적여 종이갑에서 이쑤시개를 하나 꺼내 물었다.

 

“가게에서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언제.”

“어제 새벽에.”

 

지극한 골초였던 그는 취미로 색소폰 연주를 시작한 뒤로 거짓말처럼 담배를 끊었다. 그래도 필터 대신 씹을 게 필요하다더니, 곧 이쑤시개를 잔뜩 주문했다.

성구의 손은 의외로 섬세하고, 익숙하고, 유연했다. 그는 오래되고, 유행이 지나고, 사람의 손길이 진하게 남은 물건에 출처 모를 향수를 느꼈다. 자기 손으로 앞선 손길을 하나하나 감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런 물건만 두르고 다녔다. 가게를 쉽사리 처분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일지 몰랐다.

애물단지 같은 가게라도 아주 망하기 전까지는 제 손으로 돌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마감 시간 지났는데 술에 꼴아가지고 엎어져 있는 거야.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일단 일으키려고 흔들었더니……”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흘의 짓이라는 것을 두 사람 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한참의 적막이 지나고, 신경질적으로 한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던 성구가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내가 뭐라고 할 저건 아니지만, ……이번에 죽은 놈이 누군 줄 알어?”

“누군데.”

“군인이야. 그냥 군인도 아니고, 별 하나 달린 놈.”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의뢰를 가려받는 법 없는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하다하다 장성 하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놓았단다. 솜씨도 좋지. 성구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당연했다. 가게 장부며 CCTV 기록이며 성구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모조리 털렸을 게 뻔했다. 한동안 가게 운영은 어림도 없을 테고.

젠장. 동오가 깊게 탄식했다.

성구도 동오와 나흘의 관계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기실 나흘이  드나드는 이상 완전히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성구가 묻기도 전에 일찌감치 털어놓은 덕이었다. 이 집에 들르는 다른 사람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오와 나흘 모두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동오가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만큼이나 나흘도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흘은 도시가 품고 있는 수많은 역설 중 하나였다. 그 이름은 언젠가부터 밤거리의 혼란과 질서를 한 데로 아우르는 규칙으로 작동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었고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의뢰도 거절하거나 실패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신뢰를 쌓은 용병은 도시에서 한 사람 뿐이었다.

 

사람들이 대체로 나흘에 대해 오해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흘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류라는 생각이다. 기실 도시에서 나흘만큼 종잡기 쉽고 변칙점이 드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움직이는 회로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 적절한 보수를 지불할 수 있는가. 둘, 나흘의 말미 동안 그를 재촉하지 않을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스스로 도구가 되는 길을 걸었다. 나흘의 수배지가 붙지 않은 골목이 없었고 때문에 나흘의 얼굴과 본명을 모르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흘은 잡혀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도주에 뛰어난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흘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경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흘은 법과 제도의 울타리가 해결할 수 없는 성가신 일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허락받은 단 하나의 무법자였고, 그렇게 하나의 질서가 됐다. 그 이름은 일견 언제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는 죽음처럼 여겨졌다. 공평하지만 공정하지는 않은 집행자처럼.

 

 

나흘 간 그를 부리는 사람들은 각별히 조심스러웠다. 이유인 즉슨, 그들이 도시의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 지불한 돈과 정확히 같은 값의 돈으로 자기 자신 역시 하루아침에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평하되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가 적어도 편리한 도구로 머무르는 동안에는 누구의 친구라도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성가신 일을 대신 해결해 주는 나흘의 역할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그 새끼가 내 가게에서 사람을 죽였어.”

“걔가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

“……시간 없어. 다리나 보자.”

“내 가게에서 장교를 죽였다고!”

“…….”

“그 자식이 죽인 군인만 벌써 다섯 명이야. 그것도 일반병이나 별 안 달린 부사관 나부랭이니까 넘어간 거지!”

 

 

나흘은 모두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도구로 남는 동안에는 그랬다. 성구는 말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분을 삭이며 씨근덕대는 소리가 동오의 귀에도 들렸다.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성구가 그 가게를 어떤 심정으로 지탱해 왔는지, 가장 가까운 친구인 동오가 모를 리 없었다.

어제 동오는 결국 나흘에게 심장을 하나 더 달아주었다. 맥박 없이 터빈으로만 돌아가는 심장이 이제 명헌의 가슴 안에 있었다. 그러지 말걸 그랬나 보다. 거절할걸. 하기 싫다고 할걸.

그러나 다시 돌아간대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성구와 성구의 가게가 각별한 만큼이나, 명헌은 동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 손님으로 명헌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 동네에서 의사 노릇을 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회사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하면서.

그는 명헌의 삶이 두렵다. 모두에게 쫓기는 동시에 모두가 환대하는 존재.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사람. 하나의 죽음을 씻어내야만 다른 죽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삶. 그 모든 것을 긍정하고도 자기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삶. 그런 사람만이 모두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걔는…… 안 잡혀.”

“하! 그래. 그렇겠지. 잘나신 놈인데 어련할까.”

“……괜찮을 거야.”

“그 새끼가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냐? 그래? 정말 그럴까?”

 

그럴 수 없더라도 동오는 명헌을 돕고 싶었다. 어디로든 도망치기를 바랐다. 적어도 살아남기를 원했다. 그가 심장을 받아간 바로 다음 날 친구의 가게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잘 도망쳐 보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내 가게 앞에 군경 싹 깔린 걸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 내가 그 새끼랑 쥐뿔도 관련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 꼴이야! 그 새끼 혼자 나르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 그런데 너는?”

“……”

“군경이 제대로 나서면 그 새끼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라고 멀쩡할 것 같아?”

“미안해.”

“됐어.”

“성구야.”

“됐다고.”

“……걔 그 날 새벽까지 나랑 있었어.”

“최동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창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쫓는 사람이 있으면 쫓기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성구의 고함이 이어졌다.

 

“니들끼리 좋아죽는 건 내 알 바도 아니야! 염병할, 그 새끼가 그대로 나르면 너는 어떡할 건데! 그 새끼가 나르면 다음 차례는 너야! 너부터 족쳐서 그 새끼 행방을 알아내려고 하겠지. 그 때도 이럴래?”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미친 새끼야, 걔를 네가 죽였어? 대체 왜 이래! 내가 너한테 사과받으려고 이러는 것 같아? 사과를 해도 니 살 길부터 찾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이 씨발!”

“이명헌 그 새낀 알아서 살게 두고 너는 니 인생 챙겨야 할 거 아니냐, 동오야. 너 똑똑하잖아. 어?”

“……부탁인데, 당분간 걔랑 만나지 마라. 내 기분 말고 너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내 말 들어.”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성구는 이어지는 침묵을 기다리다가, 이내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절뚝이며 철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낡은 소파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나흘과 계속해서 만나는 것은 동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만남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으므로……

정말 그런가. 동오는 꺼 두었던 보안 시스템을 다시 작동시켰다. 정말 그래? 나흘은 제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뒷골목에서, 몸을 뜯어고치는 수술을 믿고 맡길 만한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 어디 흔한가. 동오도 스스로가 조금 오만한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가 칠 년 전, 나흘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번듯한 신체 개조 임플란트 전문 업체에서 유망한 엔지니어로 일했다는 사실을, 그 탓에 만료되었지만 아무튼 임플란트 시술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더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동오는 나흘이 신뢰하는 유일한 기술자였다. 또 이 바닥에서 신뢰가 얼마나 비싼 값에 사고 팔리는지는 동오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정말 그래?

성구가 맡긴 신뢰에도 값을 매길 수 있을까. 나흘의 신뢰와 비교하면 뭐가 더 비싼데? 그것도 저울에 매달아 볼래?

 

 

* * *

 

 

“왜 이런 일을 해?”

“그냥.”

“그냥 한다고?”

“살다 보니까용.”

 

 

* * *

 

이명헌이 나흘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가운데 그가 연고도 없는 도시의 버려진 건물을 전전하며 밥을 빌어먹던 소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또래 아이들 너덧과 무리를 지어 다녔다. 그는 무리에서 세 번째로 큰 소년이었고 적당한 덩치로도 당연하게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그렇게 거리를 유랑하는 아이들은 시립 탁아소로 보내지고는 했는데, 명헌과 그의 동료들은 잡히기가 무섭게 다시금 보호 시설을 탈출해버리는 말썽쟁이들이었다.

그들은 보호 시설이 정해진 시간에 줄을 세워서 정해진 식사를 정해진 양만큼 배급한다는 이유로 시설에서 내빼고는 했다. 식사 시간에 도망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돼. 처음에는 그 말에 와르르 웃어제끼기만 하던 아이들은 이따금 밥이 죽도록 먹기 싫은 날이면 명헌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홀로 도망친 명헌이 바깥에서 쫄쫄 굶다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헌과 함께 나돌던 무리 중에는 현철과 낙수도 끼어 있었다. 명헌과 낙수는 덩치가 자랐을 때쯤 탁아소에서 완전히 도망쳤다. 그러나 현철은 명헌을 따라 신나게 밖을 돌아다니다가도 밤이 깊으면 탁아소로 돌아와 잠을 잤다. 탁아소를 나갈 나이가 될 때까지도 그랬다. 남겨진 현철은 그래도 꿋꿋했다. 필사적으로 살았다.

마침내 그가 경찰 뱃지를 달았을 때 명헌의 수배지가 올랐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경찰이 되려고 애썼을 때만큼 필사적으로 명헌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눈 앞에 명헌이 나타났다.

 

그들은 많은 말을 나누는 대신 포옹했다. 낙수의 행방은 명헌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지만,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들을 수 있었다. 명헌과 낙수는 오래 동행하지 않았다. 낙수는 반정부 조직에 들어간 뒤로 감감 무소식이고, 명헌은 여전히 거리를 떠돌며 돈벌이로 이런저런 심부름을 맡았다고 했다. 간단한 연락책으로 시작했던 일이 어느 날에는 누군가를 미행하는 일로 변했다. 그 다음에는 물건을 가로채는 일로, 그리고 나서는 누군가를 끌고 오는 일, 숨통을 끊어놓는 일……

얼마 전에는 군인을 한 명 죽인 모양이었다. 도움이 좀 필요해 뿅. 명헌은 그때까지도 태연했다. 팔 하나를 빼돌릴 수 있겠냐고 물었다. 거절은 생각지도 않고 나온 눈치였다. 현철은 그제서야 알았다. 그가 명헌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명헌이 현철을 찾아온 것이다. 가슴에 달린 뱃지가 이만큼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팔로 시작했던 일이 그 다음에는 다리로 변했다. 그 다음에는 눈알로, 각막으로, 뼈와 힘줄, 그리고 나서는 심장……. 마지막으로 심장을 빼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인공 심장의 유통 경로가 극비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침 사망한 대원의 심장을 회수하는 일에 투입된 것은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현철은 심장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네가 부탁하니까 구하기는 했는데…… 이거 썼다간 분명히 꼬리 밟힌다.

명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어서 끄덕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열흘이 더 지나서야 현철은 명헌에게 다시 연락했다. 조심하라고. 너를 주시하는 눈이 있는 것 같다고.

 

 

* * *

 

 

한동안 성구와 어색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성구의 가게까지 다시 찾아와서,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동오를 성구가 기어이 들여보냈다. 웬수 같은 놈.

다시 찾은 성구의 가게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바 테이블에서 장성이 쓰러진 직후의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폴리스 라인이 해제되고 다시 출입할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엎질러진 투명한 녹색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날 동오가 마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 압생트. 압생트를 직접 재배하는 얼간이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 돌아다니는 것은 싸구려 뿐일 텐데.

 

“검소한 사람인가?”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왜 압생트를 마시지.”

 

성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테이블 위를 샅샅이 살폈다. 흠…… 말라붙은 자국을 손으로 훑더니 킁킁거리기까지 했다. 제법 탐정 같아 보였다. 영화를 많이 봤나. 이거, 허브는 맞는데…… 성구가 코끝을 매만졌다.

 

“압생트 아니야. 냄새가 묘하게 달라.”

“그럼?”

“술 아니면 뻔하지. 약쟁이구만.”

“약쟁이도 그냥 들여?”

“어쩔 수가 없어. 내가 안 들여도 갱 새끼들이 여기서 정모를 하니까, 다 돌고 돈다고. 올 땐 멀쩡한 새끼들도 나갈 땐 아냐.”

 

골치 아픈 문제였다. 성구가 가게를 물려받은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 갱단과 전 사장은 꽤 자주 교류하는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갱단과의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결론이 났을 때도 달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던 것이다. 이 일대에서 갱단과 완전히 척지고는 멀쩡히 장사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갱단이 군경의 눈을 피해 이 가게로 숨어들면서 오르는 매출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약 하다 죽었다고?”

“그거밖에 더 있냐. 다른 외상이 없었어.”

“그럼 약 판 놈을 잡아야지.”

“여기서 판 약으로 간부를 죽여? 갱 주제에 미쳐가지고 그런 짓을 하겠냐.”

“나흘은 미쳤다고 하냐?”

 

이 새끼가…… 성구가 눈을 흘겼다.

 

“가만 있어 봐.”

“왜.”

“압생트 같다고 했지?”

“어.”

 

카운터 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서 먼지가 누덕누덕 쌓인 종이 장부를 꺼냈다. 흘러나가면 안 되는 것들은 수기로 관리하는 게 차라리 더 안전하다는 게 성구의 신조였다. 연신 종이를 넘기던 성구가 어떤 페이지에서 우뚝 멈췄다. 흘긋 보니 대략 열흘 전의 날짜였다. 동오가 곁눈으로 훔쳐봐도 아라비아 숫자 배열로 암호화되어 있어 무슨 내용인지 추측할 길이 없었다. 은밀한 거래 내역 정도를 적어두는 장부겠거니, 넘겨짚을 뿐이었다.

 

“그런 걸 팔고 간 놈이 있는데.”

“진짜로?”

“한바탕 해서 기억 나.”

 

성구의 설명에 따르면, 여느 때처럼 몰려든 갱 놈들이 한참 바쁠 때 펍 구석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 약 장사를 하고 난리들을 피우다 현상금 사냥꾼 무리와 시비가 붙은 게 발단이었다. 외지인에게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갱단원들은 당연히 그들을 방해하는 얼간이들이 눈에 거슬렸고, 한순간에 펍 안이 엉망진창이 됐다. 알고 보니 그 외지인 무리가 한가닥 하는 놈들이어서 조무래기 갱단원들은 곤죽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고 말았다. 그 난장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성구가 갱단원과 현상금 사냥꾼까지 전부 쫓아내면서 소동이 일단락되는가 했는데, 며칠 뒤 갱단원이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내내 혀를 차며 그 날 일을 상기하던 성구가 결국 이쑤시개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성가셔 죽겠다.

 

“초록색 캡슐로 된 건데, 이번에 새로 구한 거라나. 마시면 무슨 증강 현실에 접속할 수 있대. 물에 타도 되고 불 붙여서 먹어도 되고. 그래서 무슨, 압생트 같다고 그러데.”

“그래서? 찾았어?”

“다 나르고 없었어. 현상금 따라다니는 놈한테 싹 털린 거지 뭐.”

“현상금 사냥꾼은 맞아?”

“몰라. 물어봐야지. 그때 왔던 놈 이름이 여기 있을 건데.”

 

 

* * *

 

 

살다 보니까는 뭐야.

생각보다 잘해서.

그렇네.

동오.

응.

너는용.

나?

왜 퇴사했지용.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자리?

발 붙일 자리?

잘 붙어 있는데용.

하하, 그거 말고. 뭐랄까, 쓸모라고 할까…….

동오. 우린 다 쓸모 없어용.

그것도 그래.

사람은 누구나 그래용.

 

 

* * *

 

 

그는 스스로가 꽤 영리하고 유용한 개로 부려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불운인 동시에 행운이었다. 행운이 다하는 날에도 살 길을 도모할 수 있을까. 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동오를 보면서, 명헌은 낡은 연필에 대해 생각했다. 흑연이 모조리 닳아버리기 전에도 쓰레기통으로 던져지는 것들에 대해. 마모되지 않고도 외면당하는 삶에 대해.

 

 

* * *

 

 

동오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 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두툼한 눈두덩이, 빡빡 민 머리에 심드렁한 표정. 키가 작아 체구는 왜소해 보이지만 살짝 드러난 팔뚝으로도 그가 적잖이 다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저…… 죄송합니다.”

“뭐냐고.”

“저희 만난 적 있나요?”

“미친 새끼가.”

 

얼굴이 익숙해 자기도 모르게 붙잡았는데, 잡아 세우고 보니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이 얼굴을……. 한 번 보고 까먹을 마스크는 아닌 것 같은데. 쉴새없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남자가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뭐지, 어디서 본 거지.

 

사람은 누구나 그래. 언젠가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명헌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어떤 기대도 없이, 모든 걸 체념한 상태로도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사람의 동력은 알량한 희망에서 나오는 게 아닌지도 몰랐다. 살아지니까 살아가는 거라고 명헌은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래용.

사람은 누구나 그래.

아니, 아니다……

명헌과 나눈 이야기가 아니다. 동오가 불쑥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옆을 보자 성구가 입을 떡 벌린 채 동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미친놈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구와 함께 찾아간 갱단 놈도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놈들이 약을 가로챈 뒤로 비슷한 걸 본 적도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큰 성과 없이 집에 돌아온 동오는 착잡한 심정으로 메신저를 확인했다. 나흘은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군경이 본격적으로 나흘을 추적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천하의 이명헌도 당분간은 도망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 거였다.

동오는 불쑥 일어나 집안을 치웠다. 며칠 묵은 식기들을 모조리 씻어내리고 구겨진 침구를 털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간만에 창문을 열어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근심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말로 어지럼증이 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숙취가 안 가신 건가.  낮에 마주친 남자를 다시금 생각했다. 정말로 본 적이 없나, 그런가.

명헌은 언제쯤 돌아올까.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랬다.

 

 

어쩌면…….

 

 

* * *

 

 

꿈을 꿨다. 명헌의 맥박을 재는 꿈이었다. 두 개의 맥박이 제각기 날뛰고 있었다. 터빈으로 돌아가는 두 번째 심장은 맥박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아무리 확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터질 듯이 올라가는 심박수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빨간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다.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고, 높이, 높이, 화면을 넘어 치솟던 그래프가 멈추고,

 

동오는 잠에서 깼다.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명헌은 모로 누운 동오 위로 몸을 겹쳤다. 매끈하고 차가운 손으로 두 볼을 감싸고 어루만졌다. 왜 그래, 물어볼 새도 없이 입술을 가르고 혀가 들어왔다. 동오가 코로 숨을 들이킬 틈조차 주지 않았다. 팔을 들어 명헌을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었다. 커다란 등판은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 결국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 동오가 꺽꺽대며 기이한 소리를 낼 때까지 동오를 헤집고 나서야 떨어져나갔다.

 

“왜 이래.”

“그냥.”

“맨날, 그냥. 그냥, 그러지 말고.”

“좋아서용.”

 

명헌이 오면 먼저 물어야 할 게 있었는데, 말문이 턱 막혔다. 명헌이 얕게 헐떡이고 있었다.

 

“너 괜찮아?”

“응.”

“명헌아.”

“응.”

“네가 했어?”

 

명헌이 소리없이 웃었다. 옅은 짜증이 서려 있었다. 익숙한 질문이겠지. 모든 죽음이 나흘의 탓은 아니겠지만, 의문스러운 죽음은 대개 나흘의 소행이라고 여겨졌으니 말이다. “그게 중요해?” 나흘이 말했다. “나한테는 안 중요해.” 동오가 대답하며 명헌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불시에 명헌의 배를 덮은 검은 티를 들췄다.

 

“너…….”

“별 거 아냐.”

 

명헌이 곧바로 손을 밀어냈지만, 동오가 이미 목격한 뒤였다. 명헌의 가슴 부분이 흉하게 으깨져 있었다. 정확히 이틀 전 동오가 심장을 집어넣은 바로 그 부분이. 재생 기능으로 살갗까지는 어떻게 복구한 듯한데, 그게 더 악수였다.

 

“동오.”

“…….”

“별 거 아냐.”

“누가 이랬어? 군경이야?”

“아니.”

“쫓기는 거지?”

“아니야.”

“그러면 뭐야.”

“다시 가야 돼.”

“제발, 명헌아. 다른 건 안 중요해. 근데 이건,”

 

동오가 명헌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건 나한테 중요해.”

 

제발 어떻게 되고 있는지 말이라도 해 봐. 같이 도망이라도 가자.

명헌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 * *

 

세 번째에는 명헌의 다리를 갈아끼웠다. 아니다. 눈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즈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명헌은 살아남으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어야 하니까. 유기물로 만들어진 것들은 가끔 걸리적거릴 때가 있다고. 듣다 못한 동오가 질문했다. 그 일을 계속 해야 돼?

 

“왜. 걱정되나용?”

 

명헌은 변죽을 울리는 재주가 좋았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거 안 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명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너무 유명해져서 안 되겠는데. 은퇴했다고 해. 농담이지용. 반은 진담이야. 그 말에 새로 장착한 명헌의 눈동자가 제멋대로 굴렀다. 시퍼런 빛이 동오를 비췄다.

 

“지금이 좋아용.”

“위험하잖아.”

“그래서 좋아.”

 

어디든 갈 수 있고.

 

 

* * *

 

 

꿈에 그 남자가 나왔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이상한 남자.

꿈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허공에 스크린이 수십 개 떠 있었다. 무언가의 맥박을 체크하는 스크린. 동오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중 심장의 맥박을 체크하고, 혈류를 조절하는 시스템. 남자가 그 시스템을 만지고 있었다. 동오가 빠르게 눈을 돌렸다. 저기 어딘가에 명헌의 맥박도 있을 것이다. 두 갈래의 혈류를 가지지 못한, 한쪽이 고장난 그래프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허브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낙수 형, 찾았…… 어라.”

“어.”

“누구세요?”

 

이번에도 머리 빡빡 민 남자가 들어왔다. 이상하고 키 작은 남자를 낙수 형이라고 부르면서. 다시 보니 머리 빡빡 민 남자가 들어온 게 아니라, 스크린 속에서 말하고 있는 거였다. 동그란 눈동자를 더 동그랗게 만들고 동오를 향해 물었다.

 

“나?”

“네.”

“어……”

“걔가 나흘 이거야.”

 

낙수라고 불린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언가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을 들어보이더니 새끼 손가락을 까딱이자, 스크린 속의 앳된 청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뭐가 그렇다는 거야. 동오는 조금 민망해졌다.

 

“근데 왜 여기?”

“내가 적당히 쓰라고 했지.”

“아. 음, 망한 거네요?”

“정우성.”

“네. 조용히 할게요.”

 

우성은 금방 까부라졌다. 낙수가 동오를 흘긋 쳐다보더니 넌지시 말했다. “금방 내보내질 거야.” 그러나 동오는 지금 오가는 대화가 대체 무슨 내용이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여기는 어디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를 아시는 거네요?”

 

동오가 입을 열자 낙수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성깔 한 번 죽여주는 인간이었다. 약간 주춤한 동오를 위해 우성이 끼어들었다. 우리는 그러니까, 뭔가 작전을 좀 하는 사람들인데, 그게 약간 잘못돼서 실례를 하게 됐다고. 형을 잘 알지는 못하는데 하여간……

 

“형인 건 어떻게 알고?”

“아이, 씨.” 우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말하다 말고 우성은 낙수의 눈치를 봤다. 낙수가 이쪽 대화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조금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자기들은 반군 조직이라고 폭탄 선언부터 날렸다. 그래서 그 장성을 암살한 게 자기네들이라고. 압생트를, 그러니까 술은 아닌데, 아. 아시는구나. 그걸 얻어서요. 그게 먹으면 무작위 증강 현실로 불러지는 건데, 거기서 목을 그으면, 껙. 현실에서도 죽는 거거든요. 뇌가 먼저 죽어요. 멋지죠.

여어러가지 가공을 거치면 그걸 써서 우리가 특정한 증강 현실로 부를 수 있어요. 여기처럼요. 계획은 다 있었는데, 그러기 전에 형으로 예행 연습을 좀 했달까. 마침 압생트에 꼴아 계시길래요. 그런데 양을 좀 잘못 맞춰서. (낙수가 정확하게 세 명 반을 골로 보낼 수 있는 양을 썼다고 말했다.) 확실하게 하려고 그랬던 건데……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뭐 그래서 지금 후유증을 겪고 계신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가수면 상태? 그런 거죠. 며칠 더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허튼 수작은 하지 마시고요. 위험하니까.”

“명, 나…… 흘이랑, 그건 어떻게 알아?”

“내가 걔 친구라서.”

“와, 진짜요?”

 

형, 참 독하네. 친구한테…… 우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애써 머리를 굴리던 동오는 곧 뭐가 독하다는 뜻인지를 곧 알아차렸다. 장성을 암살하고 나흘에게 덮어씌우는 것까지가 그 둘의 계획이었던 거겠지.

 

“걘 알아서 살 거야.”

“그걸 어떻게…….”

“우리가 비열해 보여?”

“…….”

“맞아. 거창한 사명 가지고 하는 일은 아니거든.”

“저는 있는데요, 거창한 사명…….”

“그런 건 다 좆도 아니야.”

 

처음에는 그랬지. 무슨 사명이 있었어. 적어도 아무데서나 밥 빌어먹는 애들을 컨테이너에 몰아넣는 짓은 안 하게 만들고 싶었지.

그런데 아니야. 나 하나, 사람 수십 모아서 발악해봤자 컨테이너에서 콘크리트 건물로 바꿔칠 뿐이라고. 그리고 이제는 심장 두 개 단 새끼들이 그것도 아깝다고 총을 쏴대지.

비열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 이명헌도 마찬가지일걸. 걘 절박하니까. 윗대가리들한테 그 새낀 그냥 쓰고 버리는 패야. 이번 일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거야. 우린 그걸 잘 이용했을 뿐이야.

 

낙수는 말하는 내내 수십 개의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말을 마친 그가 무언가를 조작하는 순간, 맥동하던 수십 개의 그래프가 동작을 멈췄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미약하게 꺼떡이는 단 하나의 그래프가 남아 있었다. 동오는 직감적으로 그게 명헌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미 파괴되어 있던 명헌의 심장은, 명헌이 미리 부순 것이다. 시스템에 의해 혈류가 통제되지 않도록.

살아서 움직이는 단 두 개의 심장.

 

 

* * *

 

 

“다른 일 하고 싶었던 적은 없어?”

“별로. 생각 안 해 봤어용.”

“지금 해 봐.”

“너부터 말해 보세용.”

“음. 나는 농구 선수.”

“농구?”

“대학 때. 꽤 잘 했는데.”

“뿅.”

“이제 말해 봐.”

“뿅.”

“뿅 뭐.”

“뿅.”

 

 

* * *

 

 

낙수와 우성은 순순히 동오를 보내주었다. 우성은 거기에 더불어 명헌의 신호가 감지되는 위치를 일러주기까지 했다. 미안하게 됐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지. 증강 현실의 접속이 끊기자, 동오는 익숙한 소파 위에 모로 누운 채였다. 괴상한 꿈을 꾸고 일어났대도 믿을 법했다.

동오는 곧장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무수한 네온사인과 시끄러운 소음과 질서 없이 널브러진 사람들을 밀치며 달렸다. 빨간 전조등을 켠 경찰 차량과 플래시를 비추는 헬기 따위가 요란하게 비행하고 있었다. 하늘 위를 질주하는 그들에게 도시는 겨우 손바닥 안에 놓인 섬불과할 것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놓인 모든 골짜기를 동오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회사를 떠나 있는 동안 그는 작고 섬세한 지도를 그릴 줄 알게 되었다. 화려하고 밝은 조명이 비추지 못하는 어두운 골목에서 명헌을 발견했다. 그는 싸늘한 시체 한 구를 옆에 두고 쓰레기 더미에 몸뚱이를 뉘이고 있었다. 대단한 도망자치고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느리게 뛰는 맥박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눈꺼풀이 감겼다가 뜨이기를 반복했다.

 

“명헌아.”

 

명헌이 반쯤 감긴 눈을 들었다. 대답 없이 가슴이 들썩였다.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쇳소리 섞인 울음이었다.

 

“명헌아.”

 

명헌의 가슴은 자가 회복으로도 손쓸 수 없을 만큼 부서져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명헌은 자신이 쓸모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그렇게 됐다고 믿었다. 몸뚱이에서 서서히 쓸모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소용이 흩어지고 있었다.

 

 

* * *

 

 

오늘은 나흘이었다. 의뢰받은 지 나흘 째 되는 날.

그러나 사흘 전의 소동이 그를 궁지로 몰았다. 명헌은 의뢰받지 않은 일의 용의자로 지목됐다.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소한 요철이 의뢰를 방해하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를 쫓는 추적망이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시외로 나가는 동선이 통제되고, 사방에 군경의 감시가 깔렸다. 명헌이 박아넣은 심장이 추적되는 것도 머잖은 일이었다. 명헌은 버려질 때가 왔다는 것을 예감했다. 어떤 선을 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더 이상 편리한 도구가 아니었을 뿐이다.

마지막 의뢰를 완수한 그는 스스로 심장을 파괴했다. 살이 새로 돋으면 다시 짓이겼다.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완전히 뿌리내린 심장을 뜯어냈다.

 

 

* * *

 

 

동오가 쓰레기 더미에서 명헌을 건져냈다. 경련하는 몸뚱이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랑 가자.”

 

같이 가자.

명헌은 언제나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동오는 언제나 그를 기다리던 다정한 귓가에 대고 말을 흘려넣었다. 나랑 같이 있어. 어디로든 가자. 일어나서 같이 가. 명헌아. 이명헌. 대답해 봐. 무슨 말이라도 해. 얼른.

같이 가자. 같이 가. 응? 같이…….

너 그거 진짜 나쁜 버릇이야. 맨날 말 안 하고 넘기는 거.

명헌아.

 

 

자정이었다. 닷새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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