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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Silence

-앨리-

이명헌이 사라졌다. 끝내 연결되지 않고 발신음만 돌다가 음성안내가 뜨는 전화번호, 이, 명, 헌, 이름 세 글자와 번호가 나란히 새겨진 라커룸. 함께 했던 시간의 모든 흔적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명헌은 증발해 버렸다. 졸업까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냐며, 십 대의 마지막을 방황으로 장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애써 너스레를 떨던 이들마저 하루, 이틀, 엿새, 아흐레가 지나자 새어 나오는 불안을 감추지는 못했다. 명헌의 생활기록부 속 비상 연락망에 오른 보호자는 제 이름 석 자가 전부라는 걸 깨달은 도 감독이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가장 당황한 건 최동오였다. 비상 연락망에 가족대신 도 감독 이름을 써넣은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바로 아래 교우 관계란에는 어째서 현철도, 낙수도 아닌 제 이름만 홀로 적혀있던 건지. 명헌의 반 담임의 호출로 불려간 자리에서 동오는 새삼 제가 명헌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삼 년을 함께 했는데 너에 대해 아는 거라곤 실력 있는 전국구급 포인트가드, 최강 산왕의 주장, 이상한 어미를 붙이는 친구, 의외로 또래보다 조금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졌고, 웃을 땐 표정이 장난스럽게 확 풀어지는 애……어, 그러고 보니 최근에 명헌이가 그렇게 웃은 적이 있던가?

 

 

 

그러면 농구부에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네요. 전날 뭐 다른 점은 없었어요?

네. 3학년은 훈련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명헌인 꼭 나와서 마무리 인사까지 하고 갔어요.

그럼, 동오 학생도 훈련에 나가나요?

저는 입시 준비를 하느라…

혹시 마지막으로 명헌이랑 연락한 건 언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를 보는 눈 속에 시름이 가득하다. 제 코앞까지 느껴지는 초조함과, 그럼에도 여전한 신뢰가 짙게 묻어나는 한숨 소리에 동오는 제 어지러운 마음은 적당히 갈무리하고 핸드폰을 켜 지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냥 남들 다 하는 평범한 얘기 주고받은 게 전부예요. 마지막 연락은… 지난 22일이네요. 사생활이라 미안하지만 뭔가 특징될 만한 얘기를 한 건 없나요? 뭔가 신경이 쓰인다든지, 어딜 가고 싶다든지……고민이, 있는지 그런 거요. 글쎄요. 저희는 사실,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질 않아서. ‘현철이랑 1학년들 자세를 좀 봐주고 있어(뿅)’ ‘동오 너도 시간 될 때 잠깐 들러(뿅)’ ‘강요 아님(뿅)’ 이런 정도예요.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건….

 

그렇구나. 혹시라도 연락 오면 꼭 좀 알려줘요. 조금 애매한 시기라. 도진우 감독님도 아직 신고는 하지 말자고 하셔서……그, 합격이 취소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하죠? 네, 그럼요. 그래요,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혹시 연락이 오면 말씀드리러 올게요.

 

이 깊은 신뢰와 믿음을 심어놓고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진 녀석이 과연 저에게 연락을 해 올까 싶지만. 동오는 제 뒤로 어깨를 움츠린 선생님께 목례 한 후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고리를 끝까지 잡고 교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제야, 제 차례가 된 것 같았다.

 

 

 

조금 전 선생님께 말씀드린 대로 둘은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둘의 대화라는 건 항상 최동오가 먼저 말을 걸고,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이명헌의 대답이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거나였기 때문에. 정확히 50퍼센트의 확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대화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꾸준하게 이어진 연락같은 거라면 꽤 오래 전에, 아침 구보 시작 전 동오가 명헌에게 모닝콜을 해 주던 적이 있다. 아침잠이 많아서 지각하지 않으려고 가끔 앉아서 잔다는 얘길 최동오가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명헌이 밤에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잤으면 했다. 그래서 꼬박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최동오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명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뾰,,옹. 하고 웅얼대다가 전화를 끊는 투정이 제법 귀엽다고 느낄 무렵 어느 아침에 명헌의 문자를 받기 전 까지.

 

 

 

 

「모닝콜 그만 해 줘도 된다뿅. 새 나라의 어른이 됨뿅」

「동오 덕분뿅」

「그래도 훈련은 안 봐줌뿅」

 

 

정말로 새 나라의 어른이(뿅) 되었는지 명헌은 그 이후로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부쩍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코트 위에서의 그 존재감을 바로 옆에서 느끼고 있자면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명헌에게 주는 모닝콜은 2학년이 되고 자연스럽게 그만뒀다. 하지만 일 년 내내 아침마다 타인의 숨소리와 잠긴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쩐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기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더라. 둘이서 속 깊은 대화를 따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동오는 거의 매일 명헌을 마주하며 그의 표정이 아닌 소리로 조금은 명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말끝이 미묘하게 살짝 길어질 땐 아마도 생각이 많아서 심란하거나 조금은 불안하다는 신호. 모스 부호처럼 미묘하게 끊어지는 말투가 나오면 어딘가 흥분된 상태라는 것. 숨을 안으로 먹고 아주 잠시동안 내쉬지 않는 건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신호탄이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다른 세계를 알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는 사람들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오는 목석같은 표정 아래 365일 24시간 역동적으로 넘쳐 흐르는 명헌의 감정을 읽지 못하던 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게 꽤 티가 났던 모양인지 언젠가 한 번 명헌이 동오에게 말한 적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너무 많은 걸 알아.’ 너-라고 가리키는 검지를 접으며 ‘반대일 수도 있고, 뿅’ 하고 어미를 끌기에 동오가 얼마나 긴장을 했던가. 그래서, 그게 싫다는 얘기야?

 

 

 

최동오는 확실한 게 좋았다. 뭐든 딱 떨어지는 게 마음이 편했다. 코트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바로 림 한가운데에 꽂히는 그 소리, 그게 들리기도 전에 두 팔에서 느껴지는 확신이 들 때다. 동오는 그런 사람이다. 물어보면 답이 돌아와야 하고, 의문이 있으면 풀어야 했다. 하지만 명헌은 늘 안개 가득 낀 호수 같은 사람이라 그 마음 깊은 곳을 보려면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여는 게 나았다. 그마저도 명헌이 애매하게 경계선을 치고 있으니 동오 나름대로는 적당히 선을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현철이나 성구를 대할 때와는 달리 단어를 골라 말하고 대화 주제는 적당히 시답잖은 것으로.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최동오는 워낙 솔직한 사람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명헌이 애매하게 그어 둔 선을 넘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렇게 제 삶의 일정함 이상은 나눠주지 않으려던 사람이, 사라진 저를 찾으려면 나를 먼저 찾게끔 만든 이유는 뭔지 이번에는 확실히 알아야겠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이명헌 네 주변의 사람들이 한 번씩 걱정을 한 후에야만 ‘내 차례’가 왔다고 느낄 필요도 없겠지.

 

너는 내게 그렇게 가까이 곁을 주지 않으면서 왜 내 이름을 남겨놓았을까.

 

 

 

 

Beyond Silence

최동오X이명헌

 

 

 

최 동오. 3학년 B반. 01X – XXXX – XXXX.

최 동오. 3학년 B반. 01X –

최 동오. 3학년

최 동오

 

최동오 (농구부). 3학년 B반. 01X – XXXX – XXXX.

 

 

 

명헌은 동오의 이름과 반 번호, 전화번호를 막힘없이 적었다.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이내 다시 지워냈다가, 연필을 화려하게 몇 번 돌리고는 입새로 새어나가는 숨을 입안으로 다시 삼켰다. 주변의 모든 소리를 제 안에 넣어두고 완벽한 진공 상태를 만들 것처럼. 그리고는 다시 썼다. 최 동오. 그 이름만은 애초에 지우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최동오여야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최 동오.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덧쓰며 명헌은 생각한다. 동오의 슛은 항상 폼이 좋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호선과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림을 통과하는 무게감. 처음은 그 정도이지 않았을까. 제 마음속에도 최동오는 그렇게 들어왔다. 모른척 하거나 과시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제 마음을 통과해 들어온 공을 패스하고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코트 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이상하게 이 마음에는 알 수 없는 고집이 들어섰다. 왜일까, 처음에는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는데 최동오를 곱씹어 볼수록 명확해졌다. 이건 욕심이다. 제 욕심이 들어 선 관계는 죄다 망치지 않았나, 고 명헌은 생각한다.

 

 

 

‘싫어요. 안 가면 안 돼요? 계속 같이 살면 안 돼?’

‘명헌아. 이명헌. 엄마 말 잘 들어. 너 이제 어린 애 아니야. 운다고 해결되지 않아.’

‘명헌아. 아빠랑 엄마는 이제 각자 살기로 했어. 그래도 한달에 한 번씩 명헌이 만나러 올 거야.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아빠가 미안해.’

 

‘너 아적도 니 애비 기다리니. 다 각자 새 가족 꾸린 마당에 너도 이제 잊고 살어라. 불쌍하게 여길 것 없어. 널 불쌍해하면 남들이 더 우습게 본다. 당당하게 살어. 뭐 아쉽다고 울어.’

 

 

원하면 원할수록, 손에 꼭 쥐려고 할수록 명헌은 더 많이 잃었다.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감정도 알아서 추슬러야 했다. 그렇게 살아야 했기에 순응했고, 명헌이 살기위해 걸어 온 길은 그저 묵묵하게 티 내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것이었다. 명헌은 그렇게 농구를 시작했고, 산왕에 들어왔고, 제 팀을 만났다. 딱 한번 저도 모르게 욕심이 튀어나오는 순간 인텐셔널 파울을 받았다. 욕심이, 지나친 탓이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덧 쓰는 그 이름에 제 욕심이 묻어나진 않을까 고민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제 고교 마지막의 기록에는 꼭 그 이름이 있었으면 했다. 적절하고 그럴듯한 핑계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농구부). 쓰기는 참 쉬웠다. 쉽게 쓰고 지울 수 있는 게 기록이니 마음만은 좀 어려워도 괜찮다. 뭐 하나라도 쉬운 게 있으면 됐다.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 것들의 균형이 중요했으니까. 제출하러 교무실로 향하는 명헌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제게 신뢰를 주는 이에게 감추지 않은 마음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명헌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렇게 솔직하게 내비쳐도 저를 제대로 읽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 계속 해 보는 것이다. 계속해나가는 삶은 결국 브레이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 겨울에 명헌은 호되게 앓았다. 처음엔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보다 했다. 큰 경기를 마치고 한꺼번에 몰려오는 피로감 같은 거라고. 하지만 며칠간 계속되는 두통과 몇 분 주기로 눈 앞에 도는 섬광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때 쯤, 명헌은 뭍에 다리를 두고 있어도 가라앉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영영 몰랐다면 좋았을텐데. 부정하고 싶은 일들은 이렇게 갑자기 몰아치듯 저를 따라온다. 기분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그렇게 제 뒤통수를 옭아매고 조금씩 또아리를 틀며 찾아온다. 시야는 선명한데 발 밑이 덜컹이고, 온갖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명헌은 여전히, 가라앉은 채다. 또, 그리고 또, 그러다가 또. 그제, 어제, 그리고 오늘. 그런 순간이 반복된다. 그래서 명헌은,

 

 

“명헌아, 이명헌! 괜찮냐? 듣고있어? 안에 있지?”

 

야. 얘 아직 자나본데. 피곤한가 봐. 그래? 별일이네.

원래 아침 잠 많잖아. 맞네.

야 명헌아, 우리 먼저 갈테니까 너무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쉬어.

 

 

도망쳤다.

 

문 밖으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울림이 무색하게 제 귀에 들려오는 건 진공의 무음과 제 심장박동의 소음 뿐이어서, 누구든 제발 브레이크를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올 곳이 있다고 믿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앞만 보고 달렸다. 숨이 차오르고, 온 몸의 혈류가 나갈 곳을 찾지 못해 빙빙 돌다가 고막 안에서 터지지 못해 제 살을 뚫고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병원에는 몇 번이고 갔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돌발성 난청이, 선생님 저 지금 바다 한 가운데에 빠진 느낌이 들어요, 급성 중이염이라면, 학생, 이명헌 학생, 들려요? 잘 생각해요, 괜찮아요?, 선생님 전, 보호자가, 동의서를 써 주지 않으면......

 

 

아무런 결정도 결단도 명헌은 내리지 않았다. 그저 꿋꿋하게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뛰어내려갔다. 어쩌면 조금 구른 것도 같다. 세상은 간간이 적막했고 속은 끊임없이 소란했다. 불쾌하게 귀가 끈적하게 젖는 느낌이 나자 명헌은 그 길로 바로 버스 표를 샀다.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고 창가에 머리를 부대며 졸다가 작은 섬마을에 도착했다. 이방인이 낯선 동네인지 저를 보는 눈에 경계가 가득했다. 키가 작고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다가와 뭐라 말을 하는데 명헌은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여기, 바람, 바다, 괜한 사람? 명헌의 얼빠진 얼굴에 노인은 허공에 손가락질을 몇 번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곧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 등 뒤로 완벽한 경계가 내린다. 명헌은 어딘지도 모를 동네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질 때 까지 웃었다.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었대도 이제는 상관 없다.

 

 

 

 

 

하늘이 어둑해 질 즈음 방을 하나 잡았다. 돈이 통하면 대화는 굳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고 기묘한 위안이 됐다. 제대로 마감칠을 하지 못한 천장에 너덜거리는 도배지의 끄트머리가 떠 있다. 풀칠을 한대로 누렇게 흔적이 남은 천장을 보며 제 방 문을 두드리던 친구들을 떠올린다. 너른 등과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미성인 현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생각나 등을 뒤척이다 문득, 목소리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명헌은 멈칫한다. 그렇네. 변하는 목소리를 들을 순 없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성구, 낙수, 우성이, 현필이,그리고 동오. 최동오. 괄호 열고 농구부 괄호 닫고. 3학년 B반. 010-XXXX-XXXX. 명헌이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 명헌은 갑자기 번호를 누르고 동오의 목소리가 듣고싶어졌다. 잘 기억이 안 나. 아마도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목소리가 듣고 싶어. 이것도 이제는 욕심이 되는 걸까. 생각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명헌은 주머니에 대충 욱여넣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액정을 대충 닦고 검은 화면에 비춘 제 얼굴과 마주한다. 그 정신에도 핸드폰은 가지고 나온 모양이 퍽 웃겼다. 어딘가 돌아갈 구실 하나 쯤은 만들고 싶었던가 보지. 부재중 전화 열 세 통. 발신자의 이름을 훑던 명헌의 얼굴에 아주 잠시 생기가 돈다.

 

 

010-XXXX-XXXX.

있었다. 최, 동, 오. 세 글자가.

 

그 이름이 매일 아침 발신자 목록 가장 윗부분에 찍혔던 때를 명헌은 기억한다. '다섯 시 오십 분이야. 십분 뒤에는 나가야 해.' '이명헌, 좋은 아침.' '커피우유 사왔는데, 마실래?' 따위의 다정한 말을 건네던 목소리. '명헌아, 어디 아파?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몇 마디 하지 않은 제 목소리만 듣고도 약 봉지를 문고리에 걸어놓던 사람. 너는, 자꾸만 욕심나게 하니까. 불안하게 하니까.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너무 많은 걸 알아.

 

 

동오야.

나는 내 그리운 모든 걸 네 친절에 기댔어. 그러면서 어른인 척 했어.

 

네가 어른일까 봐서.

 

 

 

 

 

*

 

 

 

밤 열한 시 사십 오 분. 버스로 사십 분 거리의 입시학원에서 막차를 타고 집 앞 정류장에 내려 십 분 정도 걸으면, 오늘도 소등이 완료 된 깜깜한 기숙사 창문을 볼 수 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어쩌다 들렀던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일, 이, 삼, 사. 네번째 층 복도 끝을 끼고 돌면 창이 크게 나 있는 방이 하나 있다. 401호. 명헌의 방 창문에는 오늘도 커튼이 쳐 있다. 401호 이명헌. 402호 최동오. 둘은 가끔 창을 열고 벽을 사이에 둔 채로 의미 없는 장난을 치곤 했다. 이명헌이 운동장 쪽으로 아- 하고 소리를 내면 최동오가 작게 아,하고 따라하는 식이었다. 동오는 굳게 닫힌 명헌의 창을 바라본다. '들어올래?' 작게 열린 틈으로 네가 부를 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들어가 볼 걸. 이제와 너를 찾겠다고, 네 흔적을 보겠다고 그 공간을 멀리서 훔쳐보는 자신이 어쩐지 한심하게 느껴진다. 방향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며 핸드폰을 꺼내들고 익숙한 번호로 문자 메세지를 한 통 보낸다.

 

 

「오늘은 수업이 좀 늦게 끝나서 막차를 놓칠 뻔 했어. 잘 자.」

 

별 것 아닌 얘기. 적당히 시덥잖은 대화. 최동오가 할 수 있는 것, 최동오가 해야 하는 것. 기한은 명헌의 대답이 들려 올 때 까지, 동오는 한 줄짜리 문자를 보낸다.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왜 네 연락망에 나를 적어놨는지 그런 것 따위는 묻지 않는다. 결국은 네가 오면 되니까. 네 입으로 말해주는 게 맞으니까. 최동오는 역시, 확실한 게 좋았다.

 

 

열 두시 육 분.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내일 볼 쪽지시험의 내용을 간단히 훑는다. 학원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의고사 성적이 나쁘지 않았으니 이 흐름만 유지하면 지망하는 대학에 큰 무리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조건부 입학이 예정되어 있긴하지만, 제 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통제하는 타입이었나 하면 그건 아닌데, 어딘지 한 번 새어나간 구석은 자꾸만 사람을 뒤돌아보게 만들어서. 오지 않는 문자를 기다리는 것 처럼 답답하기 그지 없다. 잡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쉽사리 잠에 들수 없어 동오는 등교할 채비를 하고 불을 끈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확인하려는

 

 

「밤마다 해 주는 건 나이트콜이라고 하나?」 오전 12:27

「전화가 아니니까 그럼 나이트메세지다뿅」 오전 12:28

 

「막차를 놓치면 곤란하지. 잘자뿅.」 오전 12:30

 

 

열 두시 반에, 이명헌이 돌아왔다.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지,답장을 보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 한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 허공에 멈춰선다. 무슨말을 해야 하지. 명헌을 기다렸다. 조급해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던 건 네 한 마디면 모두 괜찮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아무것도 괜찮지 않다. 명헌의 부재가 사라지자마자 뭔가가 툭,하고 터져나온다. 흡사 무너지는 둑 같았다. 한꺼번에 물밀듯이 쏟아지는 감정에 동오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금 명헌에게 연락을 한다면 분명 이대로 몰아붙이고 말겠지. 침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디에 있어? 라고 적던 문자를 다 지워버리고 잘 자라는 담백한 인사를 보낸다. 답장은 없었다.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동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액정을 들여다보느라 거진 밤을 샜다.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쪽지 시험 준비나 노트 필기 내용을 간단히 훑던 노력은 다 날아가고 아침부터 이명헌 생각 밖에 나질 않았다. 연락이 오면 말씀 드리겠다고 했지만 명헌의 담임에게 찾아가진 않았다. 혹시 돌아오지 않는 게 명헌의 선택이라면, 그 마무리를 짓는 것이 제가 되어선 안 되는 거니까. 자꾸만 상념이 끼어들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몸이 바빠야 쓸데없는 생각이 줄어든다. 사실 이것도 명헌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최동오, 생각 그만 해. 그냥 던져.

 

아, 또 이명헌 생각.

 

동오는 저도 모르게 농구부 연습실로 가려던 발을 돌려 교실로 향한다. 입학 시험까지 정말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한 달 안에 커튼이 열렸으면 좋겠다. 확실한 게 좋지만 이유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므로.

 

 

「나도 A대 썼어. 같은 리그에서 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동오는, 대신에 한 줄의 메세지를 보낸다. 최대한 가볍게. 네가 사라져서 불안하고 화가나고 걱정이 돼.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선생님께 연락은 드렸어? 네 비상연락망을 왜 나로 해 놨어? 그런 말은 당장 너를 체하게 할 것 같아서. 그래도 최동오가 이명헌 너를 기다린다는 건 알았으면 해서.

 

인터하이 참패를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명헌에게는 곧바로 여러 명문대에서 추천 입학 러브콜이 들어왔다. 조건을 달지 않은 순도 백프로의 합격 티켓이었다. 도 감독이 명헌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명헌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곧이어 현철의 합격이 결정 됐고 그날 주전들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우성에게 보낼 영상 편지를 하나 찍었다. 각자의 계획, 크게는 포부가 이어졌다. 동오는 그저 웃었다. 오래 했고 열심히 했고, 좋아하니까 농구가 없는 미래를 생각해본 적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미래를 말하는 건 멋쩍었다. 눈을 돌려 명헌을 보았다. 흔들림없는 눈과 굳게 닫힌 입술에 긴장이 풀려 환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 얼굴을 보면 늘 코트 바닥이 울리는 순간의 희열이 따라 온다. 역시, 나는 앞으로도 농구가 하고싶다. 가능하면 너와 함께.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조건부니까. 동오는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오늘부터 학원에서는 특강을 시작한다. 평소보다 한 시간 더 빠르게 수업이 시작되었으므로 동오는 담임에게 이른 하교를 허락받아야 했다. 오전 일곱 시 사십 삼 분. 교무실에 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교실에 들러 가방을 먼저 놓고 와야겠다.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 뒤로 보이는 운동장, 그 옆의 농구부 연습실, 그리고 그 뒤에 바로 보이는 기숙사 건물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밤 열 두시 십 사분. 괜히 특강이라고 이름 붙이는 수업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몰린 학생들과 숨 쉴 타이밍마저 정해놓은 듯한 강의가 끝나자 동오는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막차를 놓쳐 야간 버스가 다니는 옆 동네 정류장에서 내려 이십 여분을 걸었다. 날이 제법 차 교복 재킷 안에 니트를 하나 껴 입었어도 목 주변이 시렸다. 가방에서 머플러를 꺼내 대충 둘러 걸친 후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한다. 기숙사에 가 볼 지, 집으로 바로 돌아갈 지. 어제 받았던 명헌의 문자가 떠올라 혹시나 하는 마음과 기대하지 말자는 마음을 저울질 하며 학교로 향한다. 평소보다 늦은 귀가에 부모님께 미리 연락을 드렸으니 십여분 더 늦는다고 해서 크게 다를 일도 없을 것이다. 까만 하늘 아래 동오의 걷는 소리만이 적막을 가른다. 일, 이, 삼, 사. 사층 코너를 돌아 가장 왼 쪽 방. 커튼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창에 달빛이 비춘다. 명헌은 돌아오지 않았다. 춥다, 동오는 머플러를 잡아당긴다.

 

집까지 가는 길은 십 분 남짓이지만 어쩐지 하루가 이렇게 끝나버리는 게 싫어 동오는 천천히 걸었다. 동오의 집 앞에는 마을에서 손꼽힐 만큼 크고 오래 된 소나무가 있다. 그 소나무를 낀 왼쪽에는 긴 담벼락이 있는데, 가로등을 등지고 있다 보니 늦은 밤 연인들의 비밀 아닌 비밀 장소가 되어 부친의 골머리를 썩이곤 했다. 시간이 늦다 보니 혹여나 누군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지나가려는 차에 담 위로 아주 살짝 누군가의 솟은 머리가 보인다. 둘이 아니라 한 명인 것 같은데...혹시 몰라 긴장하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열 두시 이십 육 분. 읽지 않은 메세지가 있는지 편지 모양 아이콘이 떠 있다. 메세지를 확인하며 지나쳐야 하나 싶어 액정을 켜니 불빛 때문인지 그가 저를 돌아본다. 얼굴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도 무례하다 싶어 동오는 핸드폰 액정으로 시선을 내려 확인 못 한 메세지를 연다.

 

 

 

「집 앞에서 볼래?」 오후 11:30

 

「기다릴게」 오전 12:10

 

 

걸음이 멈춰선다. 떨리는 손으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전화의 주인은 답이 없다. 저만치 앞에 서 있던 사람이 플래시를 켠다. 동오는 눈이 부시는 것도 잊은 채 빛을 쫒는다. 설마. 설마, 이명헌인가? 동오가 다시 걷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 걸이가 점점 빨라진다. 급기야는 달리기 시작한다.

 

 

"이명헌!"

 

남자가 흔들림 없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린다. 얼굴도 표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최동오는 확신했다. 이명헌이 돌아왔다. 다른 곳도 아닌 제 집 앞으로.

 

 

 

너, 괜찮아?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 동오는 명헌을 부른다. 당장이라도 어깨를 붙들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어디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말과 감정을 쏟아내어 명헌을 질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제야 눈 앞의 명헌이 보였다. 다듬지 않고 방치되어 애매하게 자란 투박한 머리, 평소보다 어쩐지 야윈 얼굴, 조금 꺼진 눈. 다 터서 피가 고인 아랫 입술. 그럼에도 또렷한 눈동자가 저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온다.

 

 

 

"나 시험 중이야.“

"무슨 말이야?"

 

가장 먼저, 최동오 목소리가 어떤지 확인하려고.

나 지금 니가 무슨 말 하는 지 모르겠어.

평소에 시야를 넓게 써서 다행인 건지 모르겠네. 근데 이제는 오히려 한 곳에 집중해야 한다,뿅.

명헌아?

 

명헌이 오른 손 검지손가락으로 동오의 입술 한 가운데를 누른다. "여기."

굳은살이 가득 배긴 그 손 끝이 어쩐지 가슴을 짓누르는 것 처럼 답답하고 무겁다. 동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명헌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명헌은 그 시선을, 불안과 혼란함으로 가득찬 공기를 한껏 받아들였다. 한참을 뜸들이던 명헌이 결심한 듯 음, 소리를 냈다. 밤의 찬 공기에 녹지 못해 떠 버린 소리같다. 지금이다. 지금이라면 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 봐, 동오야.

귀가 잘, 안 들려. 앞으로 계속 못 들을 수도 있대.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는 밤의 한 가운데 명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동오는 당장이라도 명헌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냥 명헌을 제 품에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동오는 계속해서 속삭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이미 울 만큼 다 울어서 눈물은 씨가 말랐어, 명헌은 메마른 얼굴을 동오의 품 속에 묻었다. 그런데 가슴에는 어쩐지 불이 타오르는 것만 같다. 나 이제 어떡하지. 괜찮아, 명헌아. 나 또 엄청 크게 얘기해? 동오는 어쩐지 참을 수 없어져서 머플러를 풀러 명헌에게 둘러주었다. 그러지 마. 좀 크면 어때.

 

 

오늘 막차 놓쳤나 봐?

응.

늦었네.

응.

내가...

응.

 

응, 명헌아. 동오는 명헌을 더 꽉 끌어안았다. 설사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응, 대답하는 울림 만으로도 명헌이 온전하게 제 대답을 들을 수 있도록. 그 마음이 닿았는지 명헌이 동오의 품에 더 파고들며 등을 두드린다. 야, 최동오. 동오야. 응.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나 다시 챙겨주면 안 돼?

...

나 아직 어른 못 되겠어.

응.

내가 기대고 싶은 사람이,

응.

너 밖에 없는데.

응.

 

근데 이제 넌 진짜 어른이 될 거 같아서..

응.

 

그래서 붙잡으러 왔어.

 

 

 

 

"명헌아, 나 좀 봐."

 

동오가 품에서 명헌을 살짝 밀어낸다. 명헌이 잠시 주춤하더니 고개를 들어 동오와 시선을 맞춘다. 동오는 명헌의 목에 둘러진 머플러를 꼼꼼히 정리 해 주고, 명헌의 손을 잡고 제 입술 가까이로 가져온다. "여기."

 

 

"내가"

- 내가, 명헌이 소리 없이 제 입모양을 따라한다.

 

 

"붙잡히면, 너 계속 할 거야?"

- 붙잡히면, 계속.. 뭘?

 

 

 

"난 너랑 계속 하고싶어."

 

 

계속, 하고싶어. 명헌은 그 말을 입 속에서 굴려본다. 계속. 하고싶어. 난 너랑 계속 하고싶어. "나랑?" 동오의 머플러 끝을 만지작대던 명헌이 다 들리는 혼잣말을 한다. 뭘 계속 해, 나랑. 그 뒤에 묻어놓고 있는 말을 알 것만 같아서 가슴에 열이 오른다. 동오는 명헌의 손을 잡고 세게 잡아 당긴다. 머플러가 조인다. 명헌이 놀란 눈으로 저를 본다. 야 이명헌. 왜 다 포기한 것 처럼 말 해. 붙잡아. 나 붙잡으러 왔으면 잡아. 동오, 좀 천천히 얘기 해. 명헌이 습관처럼 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정시킨다. 진정?

 

 

 

"난 내 미래에 이명헌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냥 너랑 같이 하고 싶다고. 어른 같은 건 돼도 못 돼도 상관 없어."

"최동오"

"너도 확실하게 말해."

 

왜 나야?

 

명헌이 얼굴을 찌푸린다. 빠르다. 진동 만으로는 동오의 속도를 맞출 수가 없다. 동오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가 왜 나야, 마지막 말만을 소화했다. 왜 너냐 하면, 나는, ......

 

그 표정을 본 동오가 있는 힘껏 다시 명헌을 껴안는다. 흥분으로 조금 가쁜 숨과 제 가슴과 꼭 맞닿은 곳에서 울리는 동오의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날 것의 최동오가, 최동오의 진심이 고스란히 명헌에게 닿는다. 더 이상 확실한 건 없다.

 

 

"좋아해."

"명헌아, 제발. 포기하지 마."

 

고백의 말은 완벽한 엇박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명헌은 동오의 손 안에 제 손을 천천히 끼워넣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힘을 주고 동오의 손등을 꼭 움켜쥐자 동오가 웃는다. 무언의 신호가 적막을 가로 질러 둘의 맞잡은 손에 전해진다. 담벼락은 높고, 가로등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

 

 

밤이 늦었고, 기숙사는 이미 문을 닫았고, 둘은 저희 집 앞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제 방으로 올라왔다. 자고갈래? 다른 뜻 없이 물었을 뿐인데 말 하고 보니 괜히 제 발이 저렸다. 명헌은 멍하게 저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갈래. 부모님은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까치발을 하고 이층 제 방으로 올라와 조용히 방 문을 열고, 교복 재킷을 벗어 정리했다. 명헌의 머플러를 풀어주려하자 명헌이 제 손등을 찰싹, 때린다. 어? 왜? 왜 능숙하냐. 진짜 혼자 어른 맞잖아용. 눈을 흘기던 명헌이 아차, 제 눈치를 살피더니 핸드폰을 꺼내든다. 목소리 조절이 잘 안 되더라...

 

 

「최동오 혼자 어른 되는 거 붙잡으러 왔더니 같이 성인식 하게 생겼네.」

 

아, 이명헌... 동오가 문자를 보자마자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진짜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정황 상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기는 해. 그래도 능숙하다는 말을 들으니 억울한 건 어쩔 수 없다. 동오가 명헌을 향해 소리 없이 입 모양을 낸다. 오해야. 명헌은 동오의 침대에 걸터 앉아있다가 벌러덩, 누워버린다. 그리고는 시트를 툭 툭 치며 동오를 본다. 이리 와, 자게. 너무 담백한 반응이어서 동오는 조금 머쓱해진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듯 열기 가득한 제 손을 조용히 등 뒤로 감춰본다. 침대 옆 수면등만 켜놓고 소등을 한다. 먼저 누운 명헌의 몸 위로 이불을 정리 해 주고 옆 자리에 누워 잘 자, 인사를 건네자 명헌이 제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다. 동오는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명헌이 동오의 가슴을 톡, 톡 두드린다. 별 반응이 없자 동오의 가슴 위에 검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다.

 

 

 

잘래?

응.

 

 

동오야. 우리, 잘래?

 

 

 

"뭐?"

 

 

눈이 절로 떠진다. 너, 너 뭐라고 했어 지금? 무슨 그런 장난을 쳐- 하고 명헌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돌아본 명헌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동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심의 얼굴이다. 최동오, 명헌이 제 귓가에 가까이 붙어온다. 너는 왜 이렇게 어렵냐. 왜 아무것도 안 물어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눌러 낸 소리가 어쩐지 섪게만 들려서, 동오는 명헌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명헌아, 너도. 너는 나한테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어.

 

 

명헌의 두 눈이 동오의 입술에 집중된다.

 

내가 더 좋아해서 그래.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어. 그래서 네 앞에선 적당한 사람인 척 했어. 사실은 계속 찾고 싶었는데,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남들이 다 너를 찾고난 후에야 이제는 나도 널 그리워해도 되겠지, 그랬어. 명헌아 나는 능숙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거야. 확실해질 때 까지는 나서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너랑 나랑은, 같이 어른이 돼야지.

 

 

내가 계속 제자리면? 입학이 취소될 수도 있고, 너랑 같은 리그에서 뛰지 못할 수도 있잖아.

기다리면 되지. 나 잘 해. 봤잖아.

내가 또 도망가면 어떡할거야.

괜찮아. 너 비상연락망 나잖아.

너한테도 연락 안 될 수도 있지. 봤잖아.

 

이젠 아닐 걸.

왜?

 

나랑 성인식 하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계속 같이 해, 나랑.

네 세계가 고요하게 묻히게 두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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