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mortal days
-파란-
우리는, 서로가 전부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구름이 푸른 하늘 위를 느릿하게 흘러갔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수면 위로 반짝이는 윤슬이 물살을 따라 부서졌다. 물에 잠긴 건물들과 수면 위로 뻗어 올라 자리 잡은 넝쿨들 사이를 보트 하나가 가로 질렀다. 탈탈 시끄러운 진동을 울리던 보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나무 앞에 멈추어 섰다. 8월의 녹음을 한아름 움켜쥔 이파리 사이사이 짙은 자줏빛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보트 앞쪽에 서서 운전대를 쥐고 있던 사내가 시동을 끄자 바깥쪽으로 앉아 있던 단정한 인상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옴폭 패여 들어간 볼 위로 날카로운 눈이 나무를 훑었다. 열매에 시선이 멎은 그가 보트 라인을 한 발 밟고 올라서 주렁주렁 맺힌 열매 하나를 꺾어 땄다. 제 손을 움직여 앞뒤양옆을 고루 살핀 그가 입을 열었다.
“무화과인 것 같은데.”
“지금이 수확 시기던가용?”
“잠시만.”
끝이 닳을 때로 닳아 헤진 두꺼운 사전을 가방에서 꺼내든 그가 책띠지로 가득 찬 책장을 펄럭이며 빠르게 넘겼다. 어느 한 곳에서 손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가락이 위에서 아래까지 빠르게 종이를 훑었다.
“응, 맞네. 먹어도 될 것 같아.”
“그럼 전부 다 딸게용.”
사내가 보트 끝을 밟았다. 두툼한 다리가 날선 끝에서 뛰어올라 굵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마디가 도드라지는 굵은 손이 보이는 족족 무화과를 따 보트로 던졌다. 보트에서 내리지 않은 사내가 능숙하게 받아들어 가방에 담았다.
마지막 하나 남은 무화과까지 꺾어 제 손에서 떠나보낸 그가 상체를 들었다. 단단한 가지를 밟고 나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집중하는 도톰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작게 기울어진 건물의 간판을 읽은 그가 나무에서 내려와 보트에 올라탔다.
“…멀지 않은 곳에 백화점 건물이 하나 있는 것 같아용.”
“그새 그걸 봤어? 연료는?”
“충분해용.”
“그럼 가보자. 주변으로 떠오른 식료품들이 있을지도 몰라.”
출발할게용. 보트의 시동을 켜고 서서히 속력을 올렸다.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수면 아래 잠겨 있는 것들에 눈을 두던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워지는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느릿하게 물살을 가르며 보트가 정차했다. 사내가 보트 바닥에 눕혀 두었던 마체테를 집어 들었다.
“오래 살면 백화점 입구에서 문전박대도 당해보는 군용.”
“고작 몇 년 살았다고…”
“이런 세계에서 이만큼 살았으면 오래 산 거죵.”
“그리고 입구도 아니야. 여기 2층인 걸.”
“내가 들어가는 거기가 곧 입구에용.”
태연한 대답과 함께 마체테가 넝쿨을 끊어냈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넝쿨에서 보라색 진액이 흘러나오자 책을 들고 있던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몸에 안 튀게 조심해. 독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용.”
액이 스친 보트 끝이 약하게 부식되는 것을 본 사내가 이어 넝쿨들을 마저 끊어냈다. 넝쿨들이 있던 자리에 휑하게 깨진 창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카로운 유리 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위로 널린 유리 파편 일부가 수면 위에 떠오른 채 물살을 따라 모이고 또 흩어졌다.
사내가 먼저 서늘한 유리 조각 끝을 피해 보트에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발목 정도네용. 위험한 건 안 보여용. 그의 말에 책을 덮은 남자가 뒤이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복숭아 뼈 위를 감아쥐는 얕은 수면 위에 떠 있는 캔 하나를 집어 들어 앞뒤로 살핀 남자가 제가 맨 가방에 그것을 담았다.
“지하에 있던 식료품 매장이 물에 잠기면서 떠오른 것 같아. 유통기한은 넉넉한데, 먹을 수 있을 지는 열어봐야 알 것 같네.”
“그럼 일단 보이는 대로 담을게용. 동오가 여기 맡을래용? 제가 위에 올라가 볼게용.”
“응. 발견하면 무전하고, 명헌아.”
뿅. 사내, 명헌이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걸음 소리가 멀어지면 남자, 동오도 수면과 평행한 면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주변에 떠다니는 통조림들을 하나둘 집어 가방에 담았다. 이건 참치…, 오, 고추참치다. 이건 닭가슴살, 이건…, 번데기… 푸른 채소 위에 올라간 번데기 사진이 선명한 통조림을 들고 잠시 주저하던 동오가 눈을 질끈 감고 제 손에 쥔 것을 가방에 넣었다. 걸음을 따라 물살을 휘젓는 대로 멀어지던 즉석밥까지 챙겨 가방을 그득하게 채운 그가 허리를 폈을 때, 지직, 소리가 허리춤에서 울렸다.
“응, 명헌아.”
- 새 이불 발견 뿅.
“…진짜? 챙길 수 있겠어?”
- 가벼운 여름 이불이라 괜찮을 것 같아용.
“도와주러 올라갈까?”
- 괜찮아용. 금방 내려갈게용.
뚝. 무전이 끊기자 무전기를 허리춤에 다시 챙긴 동오가 계단 주변을 기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불을 품안에 한아름 안은 명헌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필사적으로 이불을 지키려는 듯 힘주어 안고 있는, 흡사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듯 의기양양한 그를 본 동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 보이는 동오의 낯과 달리 명헌은 웃음기 하나 없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그 곰팡이 핀 이불과 작별하겠어용.”
“알겠어, 알겠어. 그럼 일단 배에 담아두고 더 둘러보자. 나도 가방 꽉 찼어.”
물살을 헤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건물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날카로운 파편 끝을 피해 건물 가장 끝자락을 밟고 선 동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반듯하게 뻗은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아. 입술 새로 작은 탄식이 새었다.
“…돌아가야겠는데.”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짙은 탁색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눈에 띌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구름이 이동하는 속도를 눈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머지않아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콰르릉…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우레 소리에 동오가 다급히 보트 위로 뛰어내렸다. 뒤따라 나온 명헌도 하늘을 확인하고서 곤란하네용, 하는 짧은 말과 함께 이불을 동오에게 넘기고 빠르게 보트 시동을 걸었다.
털털거리는 소음이 물 위를 달렸다. 그보다 빠르게, 구름이 하늘 위를 날아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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