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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AIRMAIL

-왕멍멍-

마츠모토 미노루와 명헌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늦은 겨울이었다. 협회장기 배 농구대회를 앞두고 갑자기 잡힌 한일 고교농구 교류전. 명헌은 높으신 분들의 생색내기인 것이 분명한 그 일회성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타팅 멤버에 이름을 올린 녀석 중 한 명은 애국이니 뭐니 하며 수선을 떨었지만, 명헌은 할 수 있다면 교류전에 써야 할 그 모든 노력을 협회장기 대회에 투자하고 싶었다. 산왕고교 주장에 명헌의 이름이 처음 올라가는 대회였기에 명헌은 가능하면 제가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결과를 손에 쥐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류전이라니. 꼬여버린 심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대신 명헌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눈앞의 상대를 지켜봤다. 산노라고 했던가?

 

산노와의 경기가 마무리된 후 명헌은 꽤 기분이 좋았다. 명헌의 기대치가 0에 수렴하는 것도, 산왕이 승리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명헌의 마음에 든 것은 본 경기가 끝나고 3:3 미니게임이었다. 몇 시간 전 툴툴거린 스스로가 머쓱하게 느껴질 정도로.

 

미니게임은 재미를 더한답시고 산노와 산왕 선수를 섞어 팀을 구성했는데, 명헌의 팀에는 마츠모토 미노루가 있었다. 경기 운영은 단순했다. 명헌이 공을 넘기면 마츠모토가 득점한다. 그리고 명헌은 단순을 넘어 명쾌하기까지 한 경기가 마음에 들었다. 명헌의 패스가 마츠모토의 슈팅으로 이어진 후 이내 들리는 골대 그물이 흔들리는 소리와 호각 소리. 이 모든 것이 물 흐르는 듯이 이어져 나갔다. 오늘 처음 공을 주고 받은 사이임에도 제법 호흡을 맞춰본 것 마냥. 방심하면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은 기분으로 명헌은 내내 코트에 서 있었다.

 

모든 경기가 끝난 후, 산왕도 산노도 이제 각자 자리를 찾아가려는 순간 명헌보다 조금 높은 시야에서 서툰 한국어가 들렸다. 마츠모토의 목소리였다.

 

“너와 또 경기하고 싶어. 명헌, 돌아가서 편지 보내도 될까요?”

 

남자끼리 편지라니, 낯간지럽지도 않나. 명헌은 시선을 올려 잠깐 마츠모토를 바라보았다. 아직 경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한 반짝이는 눈. 그리고 살짝 달아오른 얼굴. 명헌은 모습에서 좀 전의 경기를 읽었다. 그래, 얘랑 경기하는 건 재밌었으니까 뭐. 내민 마츠모토의 손과 학생수첩이 난처해지지 않도록 편지를 받을 주소를 슥슥 적어 내려갔다.

 

명헌이 주소를 다 써 내려간 후 마츠모토는 다시 한 번 이 주소가 정확한지 명헌에게 되물었다. 명헌은 그 모습이 꼭 편지를 보내겠다는 마츠모토의 어떤 의지 같아 보여서 살짝 우스웠다. 본인이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주는 주소에 ‘맞아, 그거’라는 명헌의 대답을 듣고나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감사인사를 재차 건네며 마츠모토가 일어서려던 때, 명헌은 마츠모토에게 되물었다.

 

“마츠모토 미노루? 네 주소도 알려줘야지용.”

 

***

 

첫 편지를 보내고 난 뒤 사실 마츠모토는 명헌에게 답장이 올 것이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편지의 마지막에 썼던 답장 기다리겠습니다-는 인사치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무리 인사로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는 조금 이상하지 않나 싶어서 쓴 말이었다. 그래서 명헌의 첫 번째 답장이 왔을 때, 마츠모토가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 의아함에 가까웠다. 게다가 명헌은 협회장기 대회를 한창 치르고 있을 터였는데. 한국의 고교농구는 잘 모르지만 건너건너 들은 바로는 인터하이 규모의 대회라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한창 정신없을 때 아닌가. 심지어 명헌은 주장인데. 명헌에게 편지 쓸만한 여유가 있었던가. 그 여유는 조금 사치스러운 거 아닌가라고 조금 비뚤어진 생각이 들 때 쯤 마츠모토는 명헌과의 짧은 경기를 떠올려보았다. 그래, 명헌이라면. 생각이 다시 제 방향을 찾았다.

 

명헌의 첫 편지를 보고 마츠모토는 무언가 제 안에 쑥 발을 밀어 넣은 느낌을 받았다. 문화차이라고는 하지만 편지 첫머리부터 아무것도 붙이지 않은 ‘To. 마츠모토 미노루’, 라니.

 

그런데 마츠모토는 이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츠모토와 명헌이 처음 만난 날, 한일 교류전에서의 명헌도 그랬다. 명헌이 마츠모토에게 보낸 것은 공이었지만, 마츠모토는 명헌으로부터 농구공 말고도 무언가를 더 건네받은 느낌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마츠모토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명헌을 붙잡고, 주소를 물어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제 됐다 싶어 일어나려는데 명헌이 제 이름을 부르며 주소를 물어보았다. 짙은 색의 두 눈이 마츠모토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아, 또 이 느낌. 마츠모토는 조금 답답해졌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무언가에 명확한 답을 내리고 싶어졌다.

첫 만남의 감상을 뒤로한 채, 마츠모토는 명헌의 답장을 계속 읽어나갔다. 편지에도 평소 말투대로 용을 붙일까 조금 고민했는데, 편지에 용은 조금 이상할 것 같아서 평범한 문장으로 썼다며, 읽을 때는 용을 상상해서 읽어달라는 명헌의 문장에 마츠모토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협회장배 농구대회 이야기. 계속되는 대회에 조금은 지친 터였는데 마츠모토의 편지 덕분에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고. 그리고 대회 결과는 제 손으로 쓰기는 조금 쑥스러워 기사로 대신한다고. 편지를 다시 살펴보니 봉투 속에 편지보다 조금 작게 오린 기사가 같이 동봉되어 있었다. 기사의 타이틀은 ‘최강 산왕, 또 한 번 스스로 갈아치우는 무패 기록’, 그리고 그 옆에 협회장기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명헌과 팀메이트의 사진. 마츠모토의 입에서 역시나-하는 짧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명헌의 편지는 추신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츠모토의 글씨가 멋있어서 힘줘서 글씨 쓰느라 손에 쥐가 난다며, 이 고생은 답장으로 받겠다는 내용의. 마츠모토는 그 문장에 명헌의 말버릇인 용을 붙여서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답장을 쓸 새로운 편지지를 찾아보자고. 어쩐지 답장을 보내는 데에 지난번에 쓴 편지지를 또 쓰고 싶진 않았다.

 

명헌의 편지는 추신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츠모토의 글씨가 멋있어서 힘줘서 글씨 쓰느라 손에 쥐가 난다며, 이 고생은 답장으로 받겠다는 내용의. 마츠모토는 그 문장에 명헌의 말버릇인 용을 붙여서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답장을 쓸 새로운 편지지를 찾아보자고. 어쩐지 답장을 보내는 데에 지난 번 사용한 편지지를 또 쓰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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