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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의 법칙

- 샤인 -

규칙 3. 저녁 밥은 되도록 같이 먹기 (일이 있을 땐 미리 말할 것.)

 

시발, 진짜 이딴 규칙은 왜 만들어가지고. 불만을 가득 담아 삐죽 튀어나온 입에서 욕지거리가 확확 나왔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규칙을 정해놓고 살자며 웃는 낯짝으로 종이를 내밀던 장본인은 도대체 어디를 갔는지 저녁 시간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규칙은 지가 만들어 놓고, 말도 없이 안 들어와? 동오는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넘은 밤에 아직까지 연락 한 통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명헌의 태도가 너무나 괘씸했다.

명헌과 함께 산 지도 어언 2년 차가 됐다. 같은 대학에 같은 과, 고등학교부터 대학 생활까지 함께 된 질긴 인연이었다. 같은 대학에 진학이 확정되자마자 동오에게 룸메이트를 제안한 건 명헌이였다. 명헌은 대학교마저 빡센 규칙이 가득한 기숙사 생활을 또다시 겪을 순 없지 않냐며, 갓 20살 성인이 된 이팔청춘이 자취해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늘어놨다. 명헌의 말대로 정해진 시간에 매일 책상에 앉아 점호해야 하는 군대식 기숙사 생활을 3년이나 겪었으니 기숙사 생활엔 이골이 날 만도 했다. 지겨운 기숙사 생활을 벗어난 청춘 가득한 20대의 시작을 떠올린 동오는 망설임 없이 명헌의 룸메이트 제안을 수락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둘은 자취방을 구하러 다녔다.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는 햇빛이 잘 안 들어오는데, 여기는 학교랑 거리가 좀 멀고, 여긴 주변에 마트나 편의점이 없어. 동오와 명헌이 집을 보면서 하나하나 단점을 집어낼 때마다 집주인들은 '하하, 남자분들이 상당히 꼼꼼하시네.' 별것도 아닌 거에 까탈스럽게 군다는 식으로 대했지만, 이왕 집을 구하는 거 누군가의 통제도 간섭도 없는 오로지 둘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기에 더욱 좋은 집을 구하고 싶었다. 십여 개쯤의 매물을 본 끝에, 드디어 두 사람 앞에 나타난 맘에 쏙 드는 투룸을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했다. 힘들어도 발품을 판 의미가 있었다. 햇빛도 잘 들어오고 집 주변에 인프라가 잘 되어 있었고 학교와도 가까워 도보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계약을 마치자마자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썼던 짐들을 그대로 자취방으로 가져와 옮기니, 다른 부가적인 것들은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최대한 소비를 아끼기 위해 풀 옵션인 집을 고집한 탓에 딱히 구매 할것도 없었다. 그냥 밥 한 끼 차려 먹을 냄비와 그릇, 그리고 수저 두 벌 정도만 있으면 됐다. 

 

"너넨 고등학교 때도 붙어 다니더니, 안 지겹냐?" 

 

대학 입학식이 열리기 전, 전국구의 대학으로 떠난 산왕 동기들이 한데 모였다. 까까머리를 벗어나 성인이 된 것을 자축, 그리고 3년 동안 지긋지긋했던 서로의 얼굴을 매일 같이 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축배를 들자며 모인 술자리에서 술 한 잔만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성구가 동오와 명헌을 향해 지독하게 붙어 다닌다며 한소리를 늘어놨다.

어차피 방을 같이 쓰는 것도 아닌데용?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명헌이 잔을 내려놓자, 낙수가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명헌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같이 사는 건 완전 다르지. 너네 기숙사도 같은 방 써본 적 없어서 서로 어떤지 잘 모르잖아." 

"맞춰 살면 됨, 뿅"

"생활 습관이라는 건 맞춘다고 되는 게 아니다. 원래 친한 사이일수록 같이 살거나 여행 가는 거 아니랬어."

"그런거 신경 안써, 뿅. 내 넓은 아량과 이해심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뿅." 

 

에휴, 니가 그럼 그렇지. 속 좋은 소리만 하는 명헌의 반응에 낙수는 반쯤 포기한 듯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명헌과 낙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현철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오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정말 괜찮겠냐? 동오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물어왔다. 나온 지 오래돼 식어 빠진 오뎅탕의 국물을 휘젓던 동오는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현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안다. 그리고 낙수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도 뻔했다. 안 괜찮은 건 또 뭐가 있나 싶었다. 산왕 동기 중에서 유일하게 같은 대학에 진학한 동오와 명헌을 향해 묘한 걱정의 시선이 붙어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두 사람 중 동오뿐인 듯했다.

 

"뭐든 알아서 잘 되지 않을까." 

오뎅탕을 휘젓던 동오가 일말의 희망도 함께 담아 한 숟갈 꿀꺽 삼켰다. 

"뭐, 너희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왠지 조만간 속 터져 죽는다고 하는 거 아닌가 몰라. "

마치 앞길을 내다볼 수 있다는 듯, 동오를 향해 히쭉이며 웃는 현철의 얼굴이 어찌나 얄미운지.

 "절대 네가 재밌어 할 만한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넌 닥치고 술이나 마셔. 동오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병을 집어 들곤 현철의 빈 잔에 술을 콸콸 들이 부었다. 

 

 

"친한 친구여도 같이 살거나 해외 여행가면 남 되는 경우가 많다잖아용? 우리 몇 가지 규칙을 정해용."

  낙수의 말이 신경이 쓰였던 걸까? 명헌은 아이들과 술자리를 가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큰 글씨로 써 내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규칙이 싫다고 기숙사를 벗어나자 해놓고, 규칙이라니? 조금은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명헌이 내민 몇 가지 규칙들은 전에 살던 기숙사에 비하면 빡셀 것도 없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이명헌이 청소기를 돌리면 최동오가 분리수거를 하고, 최동오가 빨래 당번인 날엔 이명헌이 설거지를 하며 어지르지르고 살지 말자는 식의 그런 정말 기본적인 규칙. 이정도야 뭐, 당연한 거지. 동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명헌이 정한 규칙들을 눈으로 쭉 내리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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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중에 3번에 해당하는 사항은 좀 특이하긴 했다. 저녁은 되도록 같이 먹자, 뿅. 어쨌거나 룸메이트잖아용? 아침 점심은 수업을 듣거나 훈련을 하다 보면 함께 못 먹을 수도 있으니 모든 일과가 끝난 저녁만큼은 얼굴을 마주 보며 저녁 한 끼를 먹자는 명헌의 의견이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규칙으로 정해야 하나, 유별나다 싶기도 한데 사실 어려운 것도 없었다. 과가 같으니, 교양과목을 듣거나 팀플레이 과제를 할 때를 제외하면, 전공 수업도 같았고 함께 농구 훈련도 받아야 했으며 어울리는 동기도 같으니, 사실상 24시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붙어 다녔다. 그러니 규칙 3에 해당하는 [저녁 식사는 함께하기]도 함께 안 먹은 날을 새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간혹 일이 생겨 저녁을 함께 못 먹는 상황이 오면 [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오키 알겠음] 간단하게 전해주면 끝이었다. 동오와 명헌이 룸메이트가 된 2년 동안은 남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서로 부딪히는 일 하나 없이 정말 평온함 그 자체였다. 불과 일주일 전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지금처럼 늦은 시간까지 연락 한 통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이명헌은 한 번도 없던 상황이고, 여태껏 2년 동안 자신들이 지켜온 규칙에 있어서도 안될 상황이었다. 설마, 다퉜다고 이러는 거야? 2년의 동거생활의 끝을 알리는 찾아온 폭풍이 찾아온 걸까. 동오는 툭 건드리면 팡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른 속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그래도 끓어오르는 답답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싸움의 발단은 이명헌였다. 

 

 

"자, 애들아. 이명헌 소개팅한다."

 

과방 소파에 뻔질나게 누워있다 수겸의 한 마디에 단발의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난 건 정대만, 그 옆에서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만 크게 뜬 채 끔벅인 건 최동오였다. 이명헌이 소개팅이라고? 대만의 눈이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은 하이에나처럼 반짝였다. 수겸이 자신이 듣는 교양 수업에서 팀플을 하며 알게 된 타과생과 친해져 자기 친구 중 괜찮은 솔로들을 연결해 주기로 한 모양새였다.

 

"왜 많고 많은 사람 중 이명헌이야?"

"재밌는 사람 소개해 달라는데, 넌 재미가 없다."

 

가슴에서 훅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는 동오의 속을 알 수가 없는지, 1초의 망설임 없이 말하는 수겸의 대답에 대만이 옆에서 얄밉게 깔깔 웃어 댔다.

 

"아 미친, 이명헌이 재밌다고? 하긴 우리 중에선 그나마 이상해서 웃기긴 하지."

"최동오가 제일 재미없고."

"인정, 제일 재미없지."

 

대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겸의 말에 동의했다. 대학 친구래 봤자 같은 과에 입학한 농구특기생 동기인 최동오, 이명헌, 정대만, 김수겸 이 4명이 전부였는데 대만은 미국에 있는 오래된 애인이 있었고, 일전부터 동오는 소개팅이란 단어만 꺼내도 작위적인 만남은 질색이라며 선을 딱 그었다. 수겸도 최근에 잘 되어 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말대로 넷 중에 딱 괜찮은 사람은 이명헌뿐이었을 거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용,뿅,삐뇽'다양한 접미사를 붙이는 덕에 주변 사람들이 금세 즐거워하기도 했고, 우직한 면도 있으니 애인감으론 나쁘지 않으니까.

 소개팅 당사자보다 더 궁금한 게 많은 대만이 수겸에게 명헌의 소개팅 상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덕에 동오는 궁금했던 것들을 제 입으로 직접 묻지 않고 소개팅 상대에 대한 몇 가지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다. 상대는 경영과 1학년. 흔히 경영대 여신 하면 떠오르는 큰 눈에 높은 코,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이 조건을 모두 채운, 눈에 띄는 미모의 소유자로 경영과 내에선 유명 인사라고 했다.

오, 오 대박인데? 이명헌 웬 열. 수겸의 말 한마디마다 대만이 리액션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대만의 리액션이 꽤나 좋았는지 수겸은 묻지도 않은 것들도 술술 이야기 해주기 시작했다. 수겸의 세세한 설명을 따라 머릿속에 명헌이 만날 -별을 따놓은 듯한 반짝이는 눈동자에 종이도 베일 듯 날카로운 콧날, 앵두 같은 입술, 백설 공주같이 하얗고 라푼젤같이 매끈한 머리칼을 가진- 경영대 여신의 얼굴이 점점 완성될수록 대만의 환호는 커졌고 동오의 찌푸려진 미간의 넓이는 더더욱 좁아졌다. 수겸의 설명에 따라 탄생한 경영과 최강 미인을 만나게 된 당사자 이명헌은, 정작 수겸의 옆에서 어떤 반응도 호응도 없이 가만히 앉아 책상에 고개를 숙인 채 리포트 작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소개팅하는데?"

"내일 수업 다 끝나고 나서, 오후 6시."

 

명헌의 소개팅 날짜는 금요일 밤, 바로 내일이었다. 와 대박, 소개팅 현장을 훔쳐보러 가자며 신나게 종알대는 대만의 말을 듣던 동오에게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명헌이 갑자기 소개팅이라고? 난데없는 이명헌의 소개팅 소식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학교에 가면 저절로 연애도 할 수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농구나 해!'라는 이야기를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들으며 버텨온 고등 3년의 시간. 벚꽃 잎 휘날리고 라일락 뭉개 핀 교정을 애인의 손을 잡고 하하 호호 웃으며 걷는 캠퍼스 생활을 꿈꿔왔을 법도 한데, 평소 작위적인 소개팅은 질색이라며 말하는 동오만큼이나 명헌 또한 소개팅에 있어선 회의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갓 입학하고 나서 여기저기에서 명헌을 불러댔지만, 명헌은 한 번도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었다. 동오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명헌과 자신이 금요일 밤에 약속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오랜만에 산왕 동기들과 만나기로 예전부터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대만아, 아무래도 네가 기대하는 그 소개팅은 못 볼 듯싶다? 명헌이 소개팅에 나갈 수 없는 사유가 생기자, 순간 짜증이 났던 동오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혹시나, 이명헌이 김수겸의 강요에 소개팅을 거절하지 못한 걸 수 도 있잖아? 그럼, 명헌에게도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다. 이명헌의 소개팅이 시작도 못 한 채 쫑이 난다는 사실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본인만 알아차릴 정도로 아주 조그맣게 들썩이던 입꼬리를 최대한 내린 동오가 이명헌, 리포트에 열중인 명헌을 불렀다.

 

"이명헌. 우리 내일 약속. 애들 만나기로 했잖아."

"아, 맞다. 나 그거 못 갈 거 같은데, 뿅."

 

리포트에 고정된 시선이 그제야 동오를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유독 명헌의 표정이 무표정하다. 감정을 전혀 읽어낼 수 없는 표정. 뭐지, 이 알 수 없는 기분은? 처음으로 명헌이 낯설게 느껴지는 와중에, 오래된 선약마저 깨고 굳이 소개팅을 나가겠다는 명헌이 좀 채 이해가 안 됐다.

 

"뭐? 예전부터 잡은 약속이잖아?"

"아, 아무래도 내일은 소개팅 가야 할 거 같다, 뿅"

"갑자기 왜 소개팅인데?"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좀 전해줘, 뿅."

 

미안함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불참 소식을 대신 알려달라는 명헌은 다시 작성하던 리포트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에 무거운 추가 쿵, 하고 발끝까지 떨어져 내린다. 제가 아는 이명헌은 절대 잡혀있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을 사람이었고, 지금처럼 갑자기 잡힌 소개팅을 우선으로 할 애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소개팅해선 안 됐다.

아니 나는? 명헌아, 우리…. 서로...? 5년을 간직해 왔던 명헌과 자신의 관계가 한 순간에 부정되며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아 동오의 머릿속이 새하얘져 모든 사고회로가 멈춰버렸다. 이명헌의 소개팅을 몰래 쫓아가자는 대만의 말에 너나 잘하라는 수겸의 말이 한 귀로 흘러 들어가 빠져나가야 하는데, 마치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뼈를 때려온다.

너나 잘해. 너나 잘해 최동오 너나 잘해…

이명헌, 너 진짜 무슨 생각인 건데? 진짜 네 마음은 뭔데? 동오는 속을 알 수 없는 명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결국 이 사달이 났구먼."

 

성구가 시뻘게진 얼굴로 글라스 잔에 술을 가득 따른 뒤 동오에게 건넸다. 동오는 군말 없이 성구가 준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뜨거운 술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혀에 닿는 술맛이 썼다. 첫 잔이 쓴 날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취하지 않으려나 보다, 그럼 어디 한 번 끝까지 달린다. 동오는 술이 가득 담긴 글라스 잔을 남김없이 비우고 성구에게 한 잔 더 달라며 잔을 내밀었다.

 

"적당히 마셔라, 취한 애 챙기는 거 싫다. "

"오늘 안 취할 삘인데."

"그런 말 하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던데?"

 

중간에서 현철이 동오의 잔을 뺏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잔소리 섞인 현철의 타박이 이어졌지만, 동오의 귀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걔는 무슨 생각으로 소개팅한대?"

"얘가 알면 이러고 있겠냐?"

"진짜 이명헌의 속을 알 수가 없다."

 

낙수와 현철, 성구가 차례대로 말을 한다. 아이들도 의아해하는 이명헌의 소개팅. 너네도 모르는데 나라고 알겠냐, 종알종알하는 아이들 틈에서 동오는 말없이 한숨만 길게 들이쉬고 술잔만 연거푸 입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 이명헌은 최동오를 좋아한다. ]

 

산왕 동기인 현철과 낙수, 성구 모두가 알 정도로 이명헌은 최동오를 좋아했다. 제 딴엔 우정이라고 하는 행동은 다른 친구들과 비교했을 땐 확실히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일부러 동오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간다던가, 걷다가 손끝을 툭 스치며 닿는다던가, 가만 앉아있는 동오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는다거나 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전혀 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스킨십을 종종 하곤 했다. 가끔 동오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는 게, 같은 남자 얼굴인데 뭐가 부끄러운가 싶어 한 편으론 귀엽기도 했다. 동오에게만 조금 다른, 명헌의 행동들이 단순한 친구 그 이상에서 비롯한다는 걸 동오는 물론 주변 사람들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이명헌이 소개팅이라고? 벼락같이 내리친 명헌의 소식은, 동오뿐만 아니라 산왕 아이들 모두를 대혼란에 빠트리게 할만한 특종이자 특보였다. 그 덕에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어야 할 술자리 주제가 긴급하게 변경됐다.

아아, 오늘의 담론 주제를 알려드립니다. 오늘의 술자리 주제는 [왜 이명헌은 최동오를 두고 소개팅하러 갔는가?]. 숟가락 마이크를 든 성구가 사회자를 자처했다. 어디 한 번,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의견을 내주실 분은 손을 들어 발언권을…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성구가 현철과 낙수에게 각자의 숟가락을 쥐여준다. 이명헌은 이 자리에 없다지만 그 주제의 당사자 중 하나인 동오는 꼼짝도 못 하고 담론의 현장 패널로 강제 참석하게 됐다. 장난하냐? 당사자 앞에 두고 그런 이야길 하고 싶어? 자신을 안주 삼아 떠드는 소리가 짜증이 났지만, 가타부타하지 말라 할 힘도 없었다. 

 

"5년이면 강산의 반은 변했을 텐데 아직까지 제 마음 하나 못 알아차리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성구가 쥐여준 숟가락 마이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던 낙수가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끌끌 찼다. 이명헌이 절대 눈치가 없는 새끼가 아닌데. 뒤따라오는 말에 모른 척 밟아 눌러두고 있었던 생각들이 머리채가 잡힌 채로 강제로 수면위로 올라온다. 저 뜻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약속 때문에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용, 너도 오늘 애들 만나니까 저녁 먹고 들어올 거지용? 저녁 꼭 먹고 들어와용.

 

모임에 오기 전, 명헌의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먼저 나가보겠다며 집 밖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 소개팅을 가기 위해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명헌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평소 트레이닝 복 아니면 편한 청바지와 후드티 차림을 좋아하던 명헌이 오랜만에 단정하게 꾸민 모습이 귀여워 보여 스스로 짜증이 났다. 갑자기 소개팅을 왜 하는 거냐고, 다시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걸 그랬나 살짝 후회도 됐다. 그 와중에 저녁을 꼭 챙겨 먹으라며 속없이 말을 하는 명헌이 미웠다. 지금 그 여자를 만나서 뭘 하고 있을까? 동오의 머리속은 온통 이명헌의 소개팅으로 가득했다. 동오는 낙수 앞에 놓인 술병을 낚아채 현철이 치워둔 글라스 잔을 들고 와 술을 콸콸 들이부었다. 큰 잔에 술이 채워지는 만큼 명헌을 향한 동오의 근심도 가득 채워졌다.

 

"그러니까, 명헌한테 말해주자 했잖아."

"이명헌 씨. 당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당신은 최동오를 좋아합니다. 하고? 아 생각만 해도 존나 웃기네."

 

놀리긴 제일 열심히 놀려도, 동오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한 성구의 진한 눈썹꼬리가 더욱 축 처진다. 5년 동안 서로 삽질을 하며 돌고 도는 두 친구의 상황이  성구의 말을 듣던 현철이 키득 웃곤 잔을 들어 내밀었다. 야 일단 한잔하자, 술잔을 든 넷의 손이 테이블 한가운데 모여 잔을 부딪쳤다. 짠 소리와 함께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안주를 하나 입에 넣은 현철이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런 걸 우리가 말해주는 거 자체가 이미 글러 먹은 거 아니냐? 아직도 지 마음 못 알아차리는 걔가 등신이지"

"그건 그렇긴 해."

 

 성구가 현철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어라, 근데 알고 봤더니 명헌이 동오가 좋아하는 게 아니었던 거 아니라면? 대단한 추리를 해낸 듯 테이블을 탁, 치는 성구의 옆구리를 곧바로 낙수가 팔꿈치로 툭 쳤다. 멍청아, 눈치 챙겨. 들릴 듯 말 듯 낮게 하는 낙수의 목소리에 아차 싶은 성구가 동오의 눈치를 살폈다. 이명헌이 최동오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가설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문제는 동오였다.

 최동오도 이명헌을 좋아했다.  좋은 친구로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으로서 명헌은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독특한 말투를 사용하고 엉성하게 구는 때가 많아 늘 빈틈이 많아 보이지만 코트 위에선 틈새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내릴 줄 알고, 주장으로서 묵직하고 듬직한 모습을 보여줬다. 허술함과 완벽함을 모두 갖춘 이명헌의 극과 극의 모습이 좋았다. 허술한 부분은 자신이 옆에서 챙겨주고 싶었고, 완벽한 부분은 닮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면 좋아하는 티를  못 숨기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런 이명헌이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행동과는 확실히 다른, 자신을 향한 좀 더 애정이 깃든 행동을 보인다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명헌에게 휘감겨 버렸다. (이명헌 자신이 최동오를 좋아해서 유독 챙겨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동오가 명헌에게 아무런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훈련이 끝나고 명헌이 목을 축이려 할 때 병뚜껑을 딴 물을 건넨다거나, 비 오듯 땀이 흘러내리는 명헌에게 제일 먼저 수건을 건네주던 것처럼, 동오의 시선과 행동 하나하나가 언제나 명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추후엔 주변에서 동오도 명헌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는데, 웃기게도 그 당사자 이명헌만 끝까지 못 알아챘다.

쌍방으로 지랄해요. 도대체 너희는 언제까지 그럴 셈이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숙사 생활을 청산하며 짐을 챙기던 때에, 룸메이트였던 현철이 물어오는 질문에  '명헌이가 조만간 깨달을 때까지.' 하고 흘러가듯 말했었는데. 이젠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 자식 깨닫긴 하는 거야? 썸아닌 썸, 삽질만 가득한 참 이상한 관계가 무려 5년 넘게 유지되고 있었다. 동오가 명헌의 룸메이트 제안을 냉큼 받아버린 것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게 되면 이 애매한 관계도 조만간 다 끝날 거라는 조그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명헌의 눈빛만 봐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성구의 말처럼, 이명헌이 최동오를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산왕의 모든 아이들이 착각했을 정도로, 정말 이명헌만의 특별한 우정이 최동오에게 작동한 거라면 어떡하지? 이쯤이면 동오도 억울할 만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둘의 관계는 캠퍼스를 거닐며 하하 호호 웃는 연인으로서 마무리되길 원했건만. 벼락같은 이명헌의 소개팅 소식으로 인해  평온을 유지던 동오의 가슴에 거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닥쳤다.

 

 소주 두 병 반을 대차게 까고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온 동오는 늦은 시간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명헌을 확인하고 멍청이, 미련한 놈, 나쁜 놈. 닿지도 않을 욕을 내뱉으며 씻지도 못한 채 제 방 침대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명헌을 하도 생각한 탓인 건지, 그날 밤 동오의 꿈에 명헌이 나왔다. 동오, 최동오. 제 이름을 부르며 볼을 톡톡 두드리는 그 손길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참 부드러웠다. 이명헌을 보면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는데, 꿈에서만큼은 다정히 구는 이명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눈만 감고 있는 자신이 참 싫었다.

술을 빠른 시간 안에 연거푸 마신 탓일까, 숙취로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니 침대 협탁 위에 숙취해소제와 제산제가 놓여있다. 자신보다 늦게 집에 들어온 명헌이 동오가 일어나자마자 먹을 수 있게 협탁 위에 두고 간 모양이었다. 숙취해소제를 마시고 제산제를 뜯어 쭉 짜 들이키는 동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도대체 어느 친구 사이가 이러냐? 또다시 차오르는 감정에 울컥하려는 틈에 불현듯 술자리에서 낙수와 나눴던 말이 동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야, 너도 소개팅을 해. 그러고 이명헌 반응을 보면 되잖아.

 

이명헌도 소개팅하는데 너라고 못할 게 뭐 있냐? 낙수의 말에 옳소, 맞장구를 치며 성구가 추임새를 넣었었다. 낙수의 말처럼, 그렇게 소개팅을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동오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명헌 반응이 여전히 똑같으면 이 지긋지긋한 친구를 가장한 이상한 관계도 말끔히 청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우리 학교 후배 소개해 줄게, 일단 만나봐. 얘는 친구로도 지내고 괜찮은 애야. 낙수의 말에 동오가 그 자리에서 낙수 후배의 연락처를 일단 건네받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부추기는 소리에 (야 얼른 연락해 봐!, 얼른 메시지 갈겨!) 그래, 못할 건 뭐냐는 이상한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냉큼 휴대전화를 들어 낙수가 넘겨준 연락처로 문자를 남겼었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로 시작하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문자를.

헐, 나 그럼 어제 연락 주고받은 거야? 그걸 기억도 못 하고 있었다고? 술에 꼴아 잊고 있던 기억이 이제야 번뜩 떠올랐다. 동오는 급히 제 휴대전화를 찾았다. 아 씨 어디 간 거야, 사라진 휴대전화를 찾기 위해 어제 입었든 옷가지와 들고 갔든 가방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식은 땀이 슬슬 나기 시작할 때 쯤, 침대와 벽 틈에 슉 빠져있는 휴대전화를 간신히 발견해 침대 프레임을 들어내고서야 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급히 휴대폰 메시지의 목록을 확인했다. 메시지의 제일 첫 번째 어제의 흔적이 떡하니 보였다.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취하지 않을 삘이라고 호언장담하듯 내뱉었던 자신을 보며 그러게 적당히 처먹었어야지,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라간 미소를 짓는 현철의 얼굴이 제 주변을 둥둥 떠다닌다.

 [안녕하세요?^^]로 시작된 대화는 꽤 진행된 상태였다. 심지어 소개팅 날짜까지 잡혀있었다. 최동오의 소개팅은 7일 뒤,  다음 주 토요일 오후 4시였다.

 

 

"소개팅 어땠냐?"

 

쿨럭,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가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학생회관의 카페에 앉아 무료히 각자 할 일을 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던져지는 대만의 질문에 놀란 건 동오였다. 손에 들린 커피잔을 내려놓고 대만을 쳐다보니 대만의 눈빛은 세상 궁금한 게 많은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하다. 동오는 입에 묻은 커피를 손등으로 슬쩍 닦아내며 반짝거리는 대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대만의 시선은 명헌을 향하고 있다. 정작 질문의 대상인 이명헌은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케이크를 포크로 크게  찔러 넣고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제 입으로 넣기 바빴다.

아, 어땠냐니까? 예뻤냐? 대만의 계속되는 물음에, 입에 넣은 케이크를 우물우물 삼키던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헌의 제스처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대만이 신이 나서 따발총처럼 질문을 날리기 시작했다. 대박! 분위기는 어땠어? 다음 약속은?? 대만의 궁금증이 점점 높아질수록 동오의 두 귀도 쫑긋 세워지지만, 입꼬리는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명헌이 소개팅을 다녀온 후, 두 사람의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을 맞이해  아침은 뭘 먹을지 함께 고민하고, 낮에는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도서관에 다녀왔다. 밤에는 명헌이 좋아하던 드라마의 새로운 시즌이 나와서 함께 시청했다. 함께 있는 동안 동오는 명헌에게 소개팅이 어땠냐고 묻지 않았다. 명헌도 제가 다녀온 소개팅과 관련해서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소개팅과 관련된 이야기를 사전에 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명헌의 소개팅 결과가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말 궁금했다. 소개팅을 처음 하는 이명헌이 떨진 않았을지, 과연 어떤 말을 처음 꺼냈을지도 궁금하고 '용, 뿅,삐뇽'거리는 대화를 나눴을련지, 어떤 분위기에서 마무리가 됐을지 너무 궁금했다. 특히 [애프터 신청]이 이루어졌는지.

 하지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엔 막상 입 밖으로 꺼내기가 참 어려웠다. 거기에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본인의 소개팅이, 스스로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괜히 명헌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소개팅에 대한 이야기는 입을 꾹 닫고 함구하게 되고 명헌의 소개팅에 대해선 전혀 묻지를 못했다. 그저 동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명헌이 만난 '경영대 여신'과 연락을 계속 주고받는지 힐끔힐끔 명헌을 훔쳐보는 일이었다. 명헌은 자신과 함께 있는 주말동안  휴대폰을 중간중간 들여다보며 누군가와 문자를 하긴 하는데, 이게 경영대 여신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지 영 감이 오지 않았다. 명헌을 향한 대만의 질문 공세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이런 건 함부로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용."

"참나, 뻐기기는. 그래서 애프터 했냐고, 어?"

"몰라용."

 

뭐 묻는다고 네가 대답을 하겠냐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영혼 없이 말하는 명헌의 반응에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대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휴대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더 안 물어봐? 정대만, 너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잖아,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지! 동오가 눈빛으로 대만을 쏘아붙였지만, 알 턱이 없는 대만은 의자에 제 몸을 푹 기대앉아 휴대폰 속 웃긴 영상을 보며 낄낄 웃어댈 뿐이었다.

 

"잘 안됐어용"

"뭐? 잘 안됐다고?"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명헌이 뒤늦게 대만의 말에 덧붙였다. 명헌의 목소리를 따라 동오의 시선이 명헌을 향했다. 그 찰나, 동오와 명헌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동오가 곧장 시선을 돌렸다. 왜, 별로였어? 물어오는 대만의 말에 명헌은 그냥용,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자! 체육관으로 출발하자고."

 

교양수업을 끝마치고 온 수겸이 나타나자 소개팅과 관련된 대화는 일단락됐다. 각자 남은 커피를 들이켜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헌의 소개팅에 대해서 궁금한 건 아직 있었지만, 그래도 명헌의 입에서 소개팅이 흐지부지 끝났단 말을 들으니, 주말 내내 답답했던 마음이 훅 가라앉는다. 다행이다. 동오의 축 내려갔던 입꼬리가 다시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신경 쓰였던 짐 하나가 해결되어 홀가분했다.

 

"이명헌. 너는 나랑 얘기 좀 하자."

 

수겸이 일어나는 명헌의 팔을 이끌고 어깨동무했다. 동오와 대만의 옆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는 두 사람은  명헌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을 하는데 간밤의 소개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이명헌은 너 두고 왜 소개팅 한거냐?"

 

알 수가 없네, 동오의 옆에 서서 휴대폰을 보던 대만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린다. 대만의 말에 동오는 걸음을 멈췄다. 동오가 멈춰 서던 말던 대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동오를 지나 제일 앞으로 걸어간다. 동그래진 눈을 꿈뻑꿈뻑 거리던 동오는 더 이상 명헌의 소개팅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접기로 했다. 명헌이 자신을 좋아하는게 맞는가, 란 문제 하나만으로도 생각하기 벅찼다. 일단 명헌 스스로 소개팅이 잘 안됐다고 하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안심이 됐다. 계속 신경 쓰이던 문제 하나가 해결됐으니 동오는 소개팅과 관련된 건 마음 편히 모두 잊기로 했다. 그런데, 잊어버리면 안 될 것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바로....

 

 

 

 

"최동오. 너 내일 소개팅, 뿅?"

 

벌컥, 명헌이 예고도 없이 방문을 박차게 열고 들어왔다. 책상에 앉아 전공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동오가 동그래진 눈을 끔벅거리며 명헌을 쳐다보았다. 명헌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뭐야 갑자기?"

"너 소개팅 하냐고, 뿅"

 

동오가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자, 명헌이 뚜벅뚜벅 다가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동오의 얼굴에 내밀었다. 명헌이 건넨 휴대폰을 받아 드니 산왕 동기들과의 단체 대화방이 보였다. 공부를 하고 있느라, 연락이 이렇게 쌓여있는 줄도 몰랐다. 동오는 손가락로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며 꽤 길게 주고받은 대화방의 대화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김낙수] 최동오, 내일 나도 간다. 

[정성구] 오 벌써 내일임? 

[김낙수] ㅇㅇ 얘가 쑥쓰럽다고 나도 나와달래.

[정성구] 아 궁금한데ㅋㅋ 나도 가도 돼? (윙크)

[김낙수] 지랄 ㄴ

[정성구] 우리 낙수 존나 야박하네ㅜ

[이명헌] 내일 뭐가 있나용?

[김낙수] 그런게 있음

[이명헌] ?

[정성구] 그러니까 우리 모이는 날 왔어야지ㅋㅋ

[신현철] ㅋㅋㅋㅋㅋㅋㅋ

[이명헌] 아 뭔데용 빨리 말해용

[신현철] 최동오 소개팅ㅋ

 

맞다. 나 소개팅 하기로 했지.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명헌의 소개팅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가 정작 본인의 소개팅을 잊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동오의 얼굴을 빤히 보던 명헌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동오의 손에 들려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갔다.

 

"왜?, 뿅"

"어?"

"왜 소개팅 하냐고, 뿅"

 

명헌의 물음에 뭐라 말을 꺼내야 할 지 생각 했다. 왜 소개팅을 하느냐고? 이게 너가 소개팅을 한다해서 술김에, 홧김에 하게 된거야. 라고 사실 그대로 말하자니 스스로가 참 옹졸하고 못난 것만 같아 동오가 애둘러 말을 했다.

 

"지난 주에 애들하고 만났을 때, 갑자기 잡힌거야. "

"그럼 나는?

"어?"

"그럼 나는 어떡해?"

 

어떡하냐고?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올랐다. 명헌의 물음이 마치 나를 두고 어딜 가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명헌아, 어떡하냐는 의미가 혹시.. 며칠간 제 머릿속을 맴돌던 문제의 답이 해결되는 건가, 동오의 마음이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명헌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그 말을 하려는 -

 

"동오, 그러면 나 저녁은 어떻게 해, 뿅?"

 

우리 규칙 3번. 저녁은 되도록 같이 먹을 것, 뿅. 난데없이 저녁 타령을 하면서 규칙을 읊어대는 명헌의 말에,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다. 사람이 이렇게 벙찔 수 있나 싶었다. 밥을 같이 먹기 위해 소개팅을 가지 말라 한다니. 이명헌의 난데없는 발언에 모든 전력이 한순간 팍 나가 최동오의 모든게 완전히 정지되었다. 

 

 

동오의 왼쪽 다리가 쉴 새 없이 덜덜덜 떨린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무의식적으로 제 손톱을 딱딱 씹어댔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가 낙수와 낙수의 후배를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호구조사를 하며 하하하- 사무적인 웃음을 짓고 있어야 하는데. 동오는 집 근처 공원의 벤치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 동오, 그러면 나 저녁은 어떻게 해, 뿅?

 

어젯밤 이명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웅웅 맴돈다. 최동오의 소개팅을 향한 이명헌의 반응은 하나였다. 나 저녁은용? 혼자 밥 먹는 거 외롭잖아용. 자기는 소개팅을 나갈 때 나에게 저녁을 꼭 챙겨 먹을 말하고선, 정작 내가 소개팅을 나간다고 하니 저녁은 어떡하냐고 물어온다. 이명헌의 이런 행동들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건지 확신히 안섰다.  애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 특별한 프렌드쉽 였더라면 어떡하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소개팅에 못 갈 거 같다. 약속 시간 30분 전, 낙수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미안하다고, 내가 아무래도 지금 나살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사과를 했다. 낙수는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별다른 말 없이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벤치에 앉아 복잡한 머릿속을 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미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고민은 몸집을 더더욱 불려 이미 손 쓸 수가 없을 무게를 불러냈다. 고민을 드러내야 하는데, 들어낼 수가 없다.  도대체 이명헌의 마음은 무엇일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동오가 공원에 오기 전부터 정자에 앉아 바둑을 두던 할아버지들도 다들 집으로 들어가신 건지 어느새 공원에 사람이 텅 비어 있었다. 동오는 왼손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은 5시 반. 약속을 나가겠다고 집을 나선 지도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동오는 집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집에 들르기 전에, 마트에 들려 소주를 4병을 샀다. 아무래도 술의 힘이 필요했다.

 

술이 든 봉지를 털레털레 집에 들어가니 거실에 앉아있던 명헌이 동오를 보고 함지박 하게 웃는다. 뭐야, 소개팅 벌써 끝났냐, 뿅? 들뜬 명헌의 목소리와 얼굴만 보면, 누가 봐도 저를 좋아하는 게 맞다. 이게 그동안 내 착각이었다면,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착각할 정도였다면 이건 이명헌이 나쁜 거였다. 동오는 명헌을 향해 들고 있던 봉지를 흔들었다. 오늘 저녁은 반주다.

밥을 먹으며 반주를 곁들이니 술이 술술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정리를 한 뒤, 2차로 술을 깠다. 동오가 사 온 술도 어느새 3병을 돌파했다. 동오가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꼴꼴꼴- 채워지는 술잔에 동오의 근심도 함께 채워지는 것 같다. 명헌아. 동오의 낮은 부름에 명헌이 하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동오를 바라봤다. 동오는 잔에 채워진 술을 한 잔 마셨다. 술이 달다. 오늘은 아무래도 취할 것 같다. 명헌을 부른 동오는 음,  몇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명헌아. 너 어제, 진짜 진심으로 말한 거야?"

 

뿅? 마른안주를 씹던 명헌이 동오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명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녁밥 먹어야 소개팅 가지 말라 했잖아. 정말, 그뿐이야?"

"…별 뜻 없어. 혼자 밥 먹기 외로워서, 그런 거다. 뿅"

"정말로?"

"뭘 바라는 거야. 동오, 뿅"

 

갑자기 차오르는 답답함에 동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들이켠 숨은 가슴 끝까지 차오른다. 후 내뱉은 숨엔 답답함이 가득 붙어있다. 명헌아, 정말 네 마음은 그런 거 야? 5년동안 너랑 나랑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게 정말 나의 착각이었던 거야? 속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정리하듯 동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 그뿐이야? 처음 듣는 낮은 동오의 표정과 목소리에 놀란 명헌이 아무 말 않고 동오를 바라봤다.

 

"이명헌, 넌 되면서 난 안돼?"

"뭐?"

"너, 내가 소개팅한다니까 일부러 그런 거잖아. 일부러 규칙 운운하며, 못 가게 한 거 아냐?  넌 소개팅해도 되는데, 난 안되는 이유가 뭐냐고."

 

갑작스러운 동오의 질문에 당황한 명헌의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명헌, 너 나를-"

 

최동오, 그만 이야기하자. 동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명헌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쾅! 강하게 닫히는 문소리가 마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명헌의 마음과 같이 느껴졌다. 하, 미치겠다. 식탁 위에 팔을 올리고 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이러려고 이랬던 게 아닌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동오의 입에서 깊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5년을 지내면서 처음으로 다퉜다. 서로 욕을 하고 때리며 싸운 건 아니지만,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하나씩 만든 것 같다. 동오는 어질러진 식탁을 정리하고, 명헌이 나오길 기다렸으나 명헌은 아침이 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쾅 닫힌 명헌의 방문은 명헌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늦은 아침이 돼서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얕게 들었던 잠이 깨고 눈이 번뜩 떠졌다. 동오가 곧장 방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쪽을 내다보니, 현관 앞에 명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명헌. 어디가."

"…나, 나갔다 올게."

 

동오의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상태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 명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아침 11시에 나간 명헌은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이런 명헌의 태도가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제 감정을 잘 모르고 있을 명헌에게 자신이 너무 몰아세운 게 아닐까, 후회가 됐다.

삐빅- 책상에 놓인 탁상시계가 작은 소리와 함께 밤 7시를 알렸다. 동오가 명헌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금세 내려놓았다. 동오는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로 복잡한 머리를 갈무리했다. 하지만 이리 튀고 저 튄 생각들은 한순간에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삐빅- 탁장 시계가 밤 8시의 알람을 울렸다. 저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저에게만 몰래 장난을 치던 녀석. 5년 동안 서로 좋아한다고 믿어왔는데, 그 믿음이 흔들리니 솔직히 무서웠다. 이명헌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어떡하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슬픔보다, 명헌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줘야 한다는 상실의 슬픔을 버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서야 새삼 느꼈다. 결국 명헌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해도 제가 품은 명헌을 향한 마음은 아무래도 접을 순 없는 모양이었다.

삐빅- 어느덧 전자시계가 밤 9시를 알릴 때, 동오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정대만이었다. 주말엔 연락해 올 일이 없는데, 대만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니 여보세요를 내뱉기 전부터 불쑥 어디냐 묻는 목소리엔 이미 술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긴 집이지"

-야 그럼 잘됐다. 여기로 와.

"오늘은  마실 생각 없다."

 -야 최동오! 이명헌 데려가, 너희 집으로 데려가!

 

갑작스러운 고함에 동오가 귀에 붙인 휴대폰을 멀리 떨어트렸다.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겸이었다. 스피커 기능을 활용하지 않았는데도 우량한 성량이 수화기를 뚫고 귓가를 팍팍 내리꽂았다. 떡이 된 이명헌을 데려가라는 수겸의 기함이 계속 뒤따랐다. 지금 거기가 어딘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동오가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술집에 들어가니 둥그런 은색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술병과 떨어진 숟가랏, 젓가락들이 바닥에 널려있었다. 이미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의 잔해는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할 정도였다. 난장판의 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인 수겸이 테이블에 앉아 다가오는 동오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명헌이랑 정대만은?"

"화장실. 이명헌 토할 거 같다 해서 정대만이 챙겨서 갔어."

 

자리에서 일어난 수겸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가방을 챙겼다. 웬만하면 취하지 않는 명헌이 취할 정도면, 술을 꽤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그래? 명헌이 술 적당히 마시게 좀 하지."

"걔가 말린다고 들을 애냐?"

"그거야 그렇지만."

 

에휴, 가방 이리 줘.  난장판의 현장에서  한숨을 푹 쉬고 수겸의 손에 들린 명헌의 가방을 달라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가방을 건네주지 않는다. 왜 안 주냐는 눈빛으로  수겸을 쳐다보니,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수겸이 표정엔 미묘한 궁금증이 서려 있다. 할 말이 있음, 말하라고는 뜻으로 동오가 턱을 올려 고개를 주억거리니, 그제야 수겸이 들고 있던 명헌의 가방을 동오에게 건넸다.

 

"너 이명헌한테 들은 거 뭐 없어?"

"어떤 거?"

"쟤 소개팅 말이야."

"…따로 들은 건 없어."

"아니 원래 그 소개팅. 원래 그거 너 소개해 달라 했던 건데, 이명헌이 굳이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해줬더니만."

 

수겸의 말에 동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좀 자세히 좀 말해봐. 동오의 물음에 수겸이 별일 아닌 듯이 심드렁하게, 길고 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기 시작했다.

 

수겸 say-그러니까, 원래 명헌의 소개팅은, 수겸과 같이 있던 동오를 보고 반한 경영대 여신의 부탁으로 시작됐다. '제 친구가 그 오빠  한 번만 주선해 달라하는데 정말 안돼요? ㅠㅠ 제가 과제 대신 해드릴게요' 교양에서 친해진 다른 과 후배의 간곡한 청원에 차마 거절할 수 없던 마음 여린 나는 고민했지. (이때 수겸은, 절대 과제를 대신 해준 다는 말에 혹 했던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평소에 소개팅이라 하면 진절머리를 내는 최동오를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최동오가 소개팅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최동오와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이명헌에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 구슬릴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지 않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지. 그래서 곧장 이명헌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내 이야길 한참 듣던 명헌이 '그 소개팅은 내가 하겠다. 뿅. 무조건 내가 하겠다, 뿅 ' 자신이 하겠다며, 굳~이 본인이 꼭 하겠다 해서, 왜 갑자기 소개팅하려나 싶어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최동오를 당장 못 소개해 줄 거면, 먼저 이명헌이라도 내보낸 다음에 최동오를 꼬시면 되지 않을까, 한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이명헌이 소개팅 나가서 걍 흐지부지 끝나고 말 줄 알았는데, 상대 쪽에서 명헌이가 맘에 들었었나봐.  한번 더 보자 했는데, 이명헌이지 바쁘다고 깠단다. 존나 어이없는 새끼. "

 

숨은 쉬고 말하는 건지, 따다다 쉬지 않고 내뱉는 길고 긴 수겸의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벙쪘다. 그런데 그 말들이 하나같이 뇌리에 꽂혔다. 그러니까, 이명헌이 최동오한테 들어온 소개팅을 -

 

"오, 최동오다!!"

"오, 최동오, 뿅!!"

 

고함을 지르듯 이름을 부르는 두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소음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대만과 명헌이 거의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냐?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엉겨 붙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아찔했다.  방금 통화할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던 대만은 그사이 술이 올라왔는지 제 옆에 있는 이명헌만큼이나 취해 있었다. 혀가 풀려 웅얼거리는 대만과 명헌이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낄낄 웃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얘네 뭐라는 거야? 동오가 수겸에게 물으니 난들 아냐.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자신이 쓴 모자의 챙을 잡고 고쳐 썼다.

 

"그런데, 너랑 이명헌이랑 도대체 무슨 사이냐?"

 

동오에게만 들릴 듯, 낮게 말하는 수겸을 쳐다봤다. 동오와 수겸의 눈이 마주치자, 역시나. 수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명헌이 네 소개팅 얘기에 유독 이상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설마 하긴 했는데. 오늘 술 마시자고 갑자기 불러서는 네 이름 부르면서 한숨만 푹푹 쉬더라."

 

뭐, 둘의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하고! 수겸이 동오의 등을 팍! 내리쳤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매운 손맛에 허리가 얼얼했다. 너는 이명헌 챙겨서 가. 나는 정대만 챙겨서 갈 테니까. 수겸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둘의 목뒤를 잡아채곤 테이블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이명헌."

"동오다. 동오동오, 뿅"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

 

이명헌의 늘어지는 말투를 보아하니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신 듯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제게 화가 나있던 기분은 풀린 건지 동오를 향해 눈꼬리를 휘어가며 웃는다. 동오는 명헌의 팔목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이끌었다. 힘이 빠진 건지 저항 없이 쭉 이끌려 온다. 품에 안기듯 동오의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댄 명헌의 들뜬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뭘 잘했다고 웃어. 웃음이 나와?  규칙도 안 지키고, 연락도 없이 술을 퍼먹고 진탕 취해 있는 명헌이 얄미워 손을 들어 명헌의 귀를 잡고 흔들었다. 아 아파용. 명헌이 투정을 부리는 듯 벌게진 귀를 쓱쓱 문지르고 동오에게 기대어 왔다. 그렇게 다투고, 너도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했나보구나. 동오가 명헌의 등을 툭툭 토닥여 주니 명헌이 흐흐, 웃음을 흘린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진다. 뭐든 귀여워 보이기 시작하면 끝난 거라던데. 아무래도 이명헌에게 제대로 감긴 모양이다, 동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뭐가 중요하나 싶었다. 이명헌이 저를 좋아하던 아니던, 제 감정을 알던 모르던, 이렇게 명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작은 순간순간 하나가 좋다.

술집에 나와 택시를 잡았다. 반쯤 절어 죽어가는 정대만을 들쳐 업은 수겸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비틀거리는 이명헌의 왼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허리를 잡아 이끄니, 명헌이 제 품에 안겨 움직이는 꼴이 된다. 명헌의 축 처진 몸은 술에 불어 무게를 더 해냈다. 저보다 땅땅하고 무거운 놈을 끌고 가려니 영 힘들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힘겹게 명헌의 방 침대에  내려 놓으니, 아 아파용.  눈물이 살짝 맺힌 명현이 영화 속 눈빛이 그렁그렁한 고양이 같이 저를 올려다본다. 엄살은, 동오가 명헌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명헌 너 진짜 재수 없는 거 아냐?"

"나, 재수 없어?"

"어, 아주 많이 재수 없어."

"안 되는데, 미움받으면."

"왜, 미움받으면 너랑 같이 저녁 안 먹어 줄까봐?"

"내가 너 좋아하니까."

 

뭐라고? 취중 진담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이 명헌의 입에서 뱉어지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깜짝 놀라 누워있는 명헌을 내려다보니, 저를 올려다보며 시선을 부딪쳐 오는 명헌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명헌은 침대에 모로 누워 있던 바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최동오. 나 너 좋아해.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안 됐는데, 마음은 꽤 오래전부터 인거 같더라... 사실 네 소개팅도 내가 한다해서 나간거야. 그리고 어제도 네가 소개팅 간다 할때 말도 안되는 걸로 방해한 거 나도 알아. 근데 그런 핑계라도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

 

동오를 쳐다보며 읊조리듯 내뱉어지는 말엔 명헌이 그동안 숨겨둔 진심이 담겨있다. 늦게 알게 된 제 마음이 어쩌면 감당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명헌은 눈을 꾹 감았다.

                            

"동오야. 미안하다. 나는 너랑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어."

 

제 마음을 알아차린 지 얼마 안 된 명헌이, 동오의 마음을 알아차리기엔 아직 이른 모양이었다. 명헌아, 미안한데 나는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아. 이젠 진짜로, 5년의 길고 긴 헤맴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

 

"이명헌. 왜 너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어?"

"왜 너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냐고."

 

감았던 눈을 뜬 명헌의 표정이 일순간 굳는다. 시선이 마주하자, 동오가 조심스레 명헌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살짝 닿은 입술은 술을 먹은 탓인지 뜨뜻했다. 맞닿은 입술을 떼고 명헌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동오의 행동에 놀란 명헌의 눈이 커졌다.

 

"이명헌,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몰랐어?"

"진짜 나 좋아한다고?"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너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

 

5년을 좋아해 왔어. 신현철, 김낙수, 정성구도 알고 정대만, 김수겸도 다 알아. 근데 너만 모르더라. 다른 데선 눈치도 빠르고 기민하면서, 내 마음은 왜 못 알아차려? 동오가 명헌을 끌어안았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두 사람의 심장이 하나가 됐다. 뒤늦게 저를 좋아하는 것을 깨닫고 소개팅을 막으려고 한 이명헌은 참 발칙하다 싶으면서도, 그렇게 기민하고 눈치 빠른 이명헌이 좋아하는 감정 앞에선 맥도 못추리고 헤매고 있었다는 게 참 귀여웠다. 그리고 명헌이 제 마음을 조만간 알아차릴 거라는 핑계로 명헌에게 제 마음을 확실하게 알려 주지 못했던 게 미안했다.

 

"나는 당연히, 네가 나를, 좋아, 할 거라 생각을 못 했..."

"내가 늦어서 미안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명헌은 두 손을 꼭 쥐었다. 꽉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갈 정도로. 동오는 포옹을 풀고 명헌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길고 긴 시간 끝에, 드디어 마음이 만났다. 명헌아, 동오의 부름에  명헌이 흠칫 긴장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명헌아, 우리 사귀자."

 

동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헌이 동오의 뒤통수를 잡고 입술을 부딪쳐 와 왔다. 틈을 노려 들어온 혀가 집요하게 동오의 입 안을 헤집는다. 뭐가 그리 급한지 거칠게 혀를 얽혀들어 오는 탓에 앞니가 부딪혔는데도 명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혀로 동오의 혀를 누르고, 치열을 훑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린다.

 

삐용삐용, 긴급사태, 긴급사태! 지금껏 억누른 감정들 대거 폭파할 예정, 폭파할 예정!

 

여기서 더 이상 가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왔다. 어떻게든 이 이상은 안 된다. 동오 자신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달려드는 명헌을 억지로 밀어내니 비를 쫄딱 맞은 어린 고양이처럼 쳐다본다. 그런데 이제 그 눈빛에 욕심이 서려 있다. 자신과 같은. 그 욕심.

 

"명헌아, 안돼."

"왜 안돼?"

"술 깨고, 술 깨고 해"

"나 안 취했는데"

"어, 어. 그래 명헌이 너 안 취했어. 일단 자고,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우리."

 

급한 대로 명헌을 다시 침대에 눕힌 동오가 명헌의 머리에 베개를 베어주고, 명헌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뜨끈한 볼의 열기가 고스란히 손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그 열기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동오가 명헌의 눈을 조심스레 가리니, 나 아직 안 잘 거야. 5년 만에 알게된 건데 이대로 잘 수 없어…. 동오의 손목을 잡고 칭얼대던 명헌이 얼마 안 돼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손목을 꽉 잡은 손이 힘이 살짝 풀리자, 동오는 명헌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을 풀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축축해진 입술을 한 번 어루만졌다. 불에 덴 듯 아직도 입술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  확실한 관계 정립을 위해서 새로운 규칙을 세워야 하니까. 룸메이트가 아닌 애인의 법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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