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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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다.
신탁이 내려왔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요람에 얌전히 누워있는 아이는 왕국의 하나뿐인 왕자였고 후계자였으며 한 부부가 오랫동안 바라온 자식이었다.
신은 모호함으로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 두려움으로 힘을 키우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 누구보다 신실했던 왕과 왕비에게 내려온 아이의 미래는 축복도 무엇도 아닌 예언에 가까웠다. 저주라고 하기에이미 정해진 운명을 말하는 것이기에 어쩌면 이것은 관대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인간 중에 자신의 최후를 아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왕국의 반절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나 왕자가 태어난 이후로 바다와 인접한 곳들에 성벽이 높게 세워졌다. 지도의 절반이 하얗게 칠해졌고 그 누구도 바다를 입에 담지 않았다. 왕자가 걷기 시작할 무렵 이웃한 왕국과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사이 왕자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비상한 머리는 왕자가 가진 수많은 장점 중의 하나였다. 그런 왕자의 관심사는 한가지였다. 성벽 가까이 위치한 길고 뾰족한 탑. 그 탑에는 무엇이 있는지. 누가 살고 있는지. 왜 자신은 가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왕자는 항상 밤이 되면 창가에 앉아 먼 탑을 바라보았다.
운명은 이뤄지기에 운명이다. 세 여신의 손가락에 늘어져 있는 실들의 가닥은 목을 죄어온다. 신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을 한낱 인간이 바꿀 수 있겠는가?'
왕자는 결심한 듯 문을 열고 나온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날이다. 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릿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성벽을 아무리 높게 쌓아도 자유로이 부는 바람을 막지는 못한다. 그 바람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입구에는 아무도 없다. 왕자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가고 꼭대기에 도착한다.
기대로 숨이 가빠진다. 커다랗게 뚫린 벽 사이로 새파랗고 넓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바람은 더 거세게 불고 파도는 불길처럼 휘몰아친다. 왕자는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떨어진다.
눈을 감은 얼굴은 고요했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다. 인간이라면 바닷속에서 숨을 쉬지 못할 텐데 괴로움이 느껴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은 생기가 느껴졌다. 저 얼굴에는 고동색이나 검은색 눈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 눈 색깔이 궁금해서.
검은색 눈이다. 완전히 검은색은 아니고 고동색이 섞인 눈이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신이란 걸 알고 나서도 덤덤한 태도였다.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그를 잡고서 말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너는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없겠네 뿅"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 능력으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뿅"
왕자는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던 왕과 왕비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곧 바다를 막고 있던 성벽은 무너졌고 왕자는 기뻐했다. 그동안 왕국을 괴롭게 한 왕자의 저주는 없어졌다. 왕은 왕자를 후계자로서 대하기 시작했다. 후계자가 해야 하는 많은 일 중의 하나는 전쟁에 나가는 것이다.
왕자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바닷가에 갔다. 창과 검술을 연마하는 것에 대부분 시간을 썼다. 신은 가만히 앉아 왕자가 훈련하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고 떄로는 물고기로 변해 주변에서 헤엄을 쳤다. 그럴 때면 왕자는 굳은 얼굴을 풀고서 신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신도 이유 없이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모습, 담백한 태도, 잘생긴 얼굴, 약간 소심한 성격,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
그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은 항상 위대하지만, 신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비극을 낳는다.
명헌은 자신이 지금까지 봐온 것을 믿었다.
'꽃으로 피워내고 별자리로 만들고 하지만 그뿐이지. 그 사랑을 기념할 뿐 영원하지 않다'
사랑하는 비극을 알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은 잔인한 최후를 맞이했고 신은 찰나를 슬퍼할 뿐 잊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른다면 괜찮을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이라면 그 무엇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동오가 명헌을 사랑하지 않는 한 비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면 왕자는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신은 그렇게 믿었다.
왕자가 크게 다치고 돌아왔다. 창이 어깨를 관통했고 치료를 했지만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왕과 왕비는 침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왕자가 어서 정신을 차리기를 기도했다.
그 때 신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나타난 신은 알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고 전장을 누비다 창에 찔린 광경을 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상처 위에 약을 붓고 의미 모를 단어를 속삭였다. 왕자는 곧 눈을 떴고 그 앞에는 눈물을 흘리는 신이 있었다.
왕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은 사라졌다.
전쟁이 끝났다. 왕국의 오랜 소원이었으나 왕자는 후련하지 않았다. 승리의 주역은 왕자였다. 한 번 큰 상처를 입은 뒤로 기적같이 회복한 왕자는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무기의 끝에는 각오가 실렸다. 집념이 보였다. 그것이 어떤 집념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전쟁터에서 미친 듯이 싸우는 왕자의 모습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마치 전쟁의 신 같은 모습이라 아무도 왕자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전쟁의 끝을 알린 왕자는 지친 걸음으로 성에 돌아왔다.
연회가 열린 성에는 웃음도 기쁨도 넘쳤지만 왕자만은 그러지 못했다. 머지않아 왕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모든 걸 얻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탑을 오르며 왕자는 그날을 회상한다.
처음으로 세상이 선명하게 느껴졌던 그날을.
파랗던 물결과 그 위를 수놓는 햇살 그리고...
꼭대기에는 신이 서 있었다. 새까만 그 눈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감정도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모른다. 다만 그를 향한 마음을 깨달았다.
"당신을 만난 처음부터 느꼈어요."
"..."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당신이 속삭인 그 말은 기억합니다. 그건 내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왔으니까,"
"..."
"당신을 사랑해요"
동오의 말이 끝나고 명헌은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운명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왕자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색을 잃었다.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것이 죄였을까. 신은 자신을 경멸하는 것일까. 내가 싫어진 것일까. 불확실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왕자는 방과 바닷가와 탑을 오가며 마음을 정리하려 애썼다. 날이 지날수록 왕자는 피폐해졌다.
어느 날 밤 왕자는 달빛에 이끌려 신전에 들어섰다. 모두가 자고 있을 무렵 신전은 조용히 왕자를 맞이했다. 기도가 통한 것인지 제단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화살이 놓여 있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 화살의 주인도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왕자는 품속에 화살을 넣고 다시 달빛의 안내를 받아 바닷가로 향했다.
어쩌면 바닷가로 나가지 않았다면 운명이 바뀌었을까.
그가 사랑을 입에 담은 순간 세상은 빛이 나고 그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수 없었다.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결국은 운명대로 흘러간다면 그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으로 죽지 않도록. 그래서 심장으로 향하는 화살을 방관했다.
신은 무너졌다.
화살은 빛을 잃었다.
이미 사랑을 아는 심장은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동오는 명헌을 품에 안고서 절망했다.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감정을 품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이런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절규하는 동오를 보고 명헌은 말했다.
"사랑해"
"저도..."
동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두웠던 하늘에 해가 서서히 뜨고 있다. 그 얼굴은 잠을 자는 것처럼 느껴졌다.
떨어진 눈물은 바다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바다는 밝게 빛난다.
왕자는 신을 품에 안고 지평선을 향해 걸어간다.
그 둘을 완전히 삼킨 바다는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