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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께미 -

"……말해 봐……. 내…… 뭐지…?"

동오는 요즘 들어 계속 악몽을 꿨다. 답지 않은 일이다.

시기 명확, 원인 불명. 정말 갑자기 최근 들어서 꾸기 시작했다. 잠을 설쳐서 악몽을 꾼 것인지, 악몽을 꿔서 잠을 설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동오는 최근 들어 몸 상태가 가장 쓰레기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음……. 수면 위생이라는 게 있는데요. 잠에 들 때 최적의 수면 상태를 위해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게 중요하다는 개념이에요. 예를 들어 자기 전에 휴대폰을 좀 멀리 놔둔다든가, 잠들기 전 1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누워만 있는다든가."

계속되는 수면장애로 전문의를 찾았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자기 전까지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건 그의 의지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그마저도 최근엔 귀찮고 지겨워서 미뤄뒀던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껏 쓰레기통 안에서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비척비척 걸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남자는 알아보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몰골이었다. 이대로 마스크나 모자를 쓰지 않고 요 앞에 잠깐이라도 외출했다가는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익명 게시판에 '건축학과 ㅊㄷㅇ 요즘 꼬라지 뭐냐 못 알아볼 뻔' 등의 목격담이나 올릴 판이었다.

 

뻔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5년 사귀어온 연인과 사이가 틀어졌다. 싸우고 한동안 말도 안 섞는 정도야 연애 중반부턴 종종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완전히 돌아선 건 처음이었다. 목청을 높여가며 잔뜩 싸워놓고, 흥분이 가라앉은 뒤 다시 사과하면 받아주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오던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동오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집 꼬라지만 보여줘도 이 집 주인 제정신이 아니네요,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배달음식만 잔뜩 시켰다. 남은 음식은 포장 용기그대로 냉장고에 쑤셔넣었다. 옷도 정리하기가 싫었다. 입을 옷이 다 떨어지면 그제서야 한꺼번에 세탁기에 넣고 대충 돌렸다. 여름이라 옷들이 가벼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면도도 씻는 것도 귀찮아서 가끔 몸이 가렵거나 번들거리는 게 거슬릴 때만 가볍게 샤워했다. 온갖 인스턴트와 배달음식 포장 쓰레기, 훌렁훌렁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끔 갈라서던 순간의 끔찍한 감정들이 생각나 괴로울 때면 인터넷 서핑을 했다. 괜찮은 물건이 보이면 그냥 아무거나 막 샀다. 그리고 배달이 오면 대충 구석에 열지도 않고 처박아뒀다. 그러다 다시 기억이 슬금슬금 비집고 올라와 머리채를 잡아대면 포장된 상자를 열었다. 그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설레는 마음만 가질 수 있었다. 애초에 뭘 샀는지 기억도 안 났기 때문에 상자를 열 때마다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간만에 연락한 아들 목소리가 영 이상한 데다, 근황을 물으니 자꾸 대답을 회피하길래 기어이 부모가 찾아와 이 돼지우리를 보고야 말았다. 그의 부모가 등짝을 때리며 정신과 명함을 동오의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겨우 끌고 갔더랜다. 동오는 정신과 의사에게 연애하다 헤어져서 힘들다는 얘길 해도 될지 몰라서 그냥 단순 수면부족으로만 상담을 받았다. 의사가 뭔갈 눈치 챈 건지 아닌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의사가 하는 말은 딱히 관심이 없었고, 그냥 약이나 처방 받고 먹으란 대로 먹으면 되겠지 싶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다 학사경고를 받고 유급할 위기에 처해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동오는 그제서야 방을 정리하겠답시고 둘러본 것이다. 어쩌면 방금 인터넷에서 '당신은 지금 잘 살고 있나요' 따위의 익명 게시글 같은 걸 봐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부모님이 병원에 끌고 갈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방은 슥 보자마자 바로 한숨만 나오는 꼬라지였다. 이 정도로 퀴퀴한 냄새가 나는데 코가 마비돼서 아무것도 못 맡았다니. 동오는 자신을 잘 알았다. 정신을 차린 지금 방을 치워놔야지, 안 그러면 아예 손도 안 대겠지. 귀찮지만 하나씩 치웠다.

언제 마지막으로 입었는지 기억 안 나는 셔츠랑 바지들. 냄새를 맡아도 쉰내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안 돼서 그냥 전부 세탁기에 넣었다. 겸사겸사 창문까지 벌컥 열었다. 이게 상쾌한 공기인가? 싶은 게 콧속으로 수욱 들어왔다. 환기도 잠시. 어제였나, 그저께였나. 어쩌면 3일 전에 먹고 싸매둔 배달음식 쓰레기들. 마찬가지로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택배 상자들. 차곡차곡 정리하는 건 의외로 잡생각을 지워줘서, 쇼핑과 충동구매만큼 효과가 있었다. 상자더미가 하나씩 줄어들자 그 속에 파묻혀있던 개봉도 안 한 인형이 하나 드러났다.

특이하다. 동오가 인형을 보고 가진 첫인상은 그랬다. 귀여운 캐릭터나 동물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꽤 디테일하게 본뜬 모습. 다만 얼굴과 몸통이 비슷한 비율을 가진 2~3등신. 팔다리도 꽤 귀여운 비율로 적당히 길쭉하게 달려있었다. 표정은 어쩐지 맹하게 생겼다. 까슬까슬한 더벅머리까지 섬세했다. 이래서 샀던 건가? 중고였던 걸 샀었나, 퀄리티에 비해 가격이 엄청 싸서 샀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쓸데없다. 이런 것도 다 정리해야 된다. 동오는 인형을 같이 재활용 상자에 담아서 내놨다. 휴. 손바닥을 탁탁 털며 방 안을 둘러봤다. 훨씬 깔끔해진 모습을 보니 꽤 뿌듯했다. 몸이 힘들었어서 그런가 더욱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어서 개운했다.

"……."

개운함도 잠시. 너무 깔끔해진 집은, 여기엔 정말로 헤어진 연인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동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간만의 노동이 허무하게도 다시 우울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꼬르르르륵.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와 방안에 울렸다. 때마침 잡생각 방해해줘서 고맙다 허기야. 간단히 배를 채우기 위해 또 배달음식을 시키려다, 모처럼인데 그냥 요리해먹자 싶어 인덕션 앞에 섰다. 위이잉거리며 팬이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정신을 다시 음식에 집중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 프라이팬, 전 애인이 집들이 기념으로 사줬던 거다. 이 요리, 간단하면서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거라 이 집에 처음 온 전 애인에게 해줬던 음식이다. 온갖 곳에 그의 흔적과 그와의 추억이 녹아 있어 도저히 정신 차리기가 힘들었다. 대충 빨리 먹고 해치워야지. 플레이팅도 귀찮아 냄비째로 식탁으로 옮기던 동오는 발밑에 걸린 물건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우당탕탕.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다행히 냄비를 완전히 엎진 않았지만, 관성 탓에 음식물이 흘러넘쳐 바닥에 지저분하게 떨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거리며 허파를 뚫고 짜증을 뱉어버릴 것만 같았다. 방금 청소한 바닥에 좋다고 드러누운 음식을 먹을 순 없으니 다 버려야겠지. 냄비 안에 쓸쓸하게 남은 0.3인분을 먹을지,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싹 버리고 끼니를 거를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임마."

동오의 혼잣말이 아니었다. 발밑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남은 거라도 먹으면 되잖아."

동오는 드디어 자신이 정신이 나간 건지 의심스러웠다. 방금 땅바닥에 엎어진 찌개가 나에게 말을 건네다니. 흐, 흐억. 이곳이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건물이었다는 걸 가까스로 떠올린 덕에 동오는 시원하게 내지르려던 비명을 겨우 참았다. 뭐지? 대체 뭐지? 온갖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걸레를 꺼내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열어 바닥을 열심히 문질러 닦았다.

바닥에 흘린 음식물이 서서히 줄어들자 말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끄아악, 흡. 방음, 방음. 동오는 소름이 끼쳤지만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비명을 멈췄다. 방금 박스에 담아 현관 밖으로 내다 버린 인형이었다.

"빨리~ 음식 좀 마저 닦아. 너 땜에 먹지도 못하는 걸 잔뜩 뒤집어 썼잖아. 기분 나쁘다고."

동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집어들었다. 찌개가 축축히 스며든 인형은 딱히 말한다고 입모양이 변하거나 몸을 움직이진 않았다. 발성기관이 없는데, 분명히 말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찝찝하다고! 빨리 닦아!"

아, 알겠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거구나. 동오는 간결하게 결론지었다. 분명 아까 내놓은 인형이 제발로 걸어들어와 자기 발을 걸고, 찌개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향해 빨리 닦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아까 인형을 버리는 걸 깜빡했고, 그래서 걸려 넘어졌고, 다시 생긴 집안일에 한숨이 푹푹 나오고 이걸 다 언제 치우나 한탄을 한 나머지 빨리 닦으라는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이다!

"야, 들여보내! 들여보내 달라고!"

동오는 환청?을 무시했다. 다시 현관문을 열고 밖에 놔둔 박스 안으로 인형을 휙 던져넣었다. 깔끔한 2점슛. 돌아와 어질러진 방안을 닦자니 입맛이 똑 떨어져서 뭘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에휴. 0.3인분이 담긴 냄비째로 싱크대에 엎어버리곤 침대에 쓰러질 듯 누워 잠을 청했다.

눈을 감자 이번엔 상상이 멈추질 않았다. 음식 닦으라고 호통치는 인형.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내가 아니라 전 애인이 마주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특유의 맹한 얼굴에 갑자기 놀란 표정이 확 생겨나겠지. 아니면 방금 겪은 일을 얘기해주면 뭐라고 반응할까. 직접 한 번 보자며 붙들어놓고 이것저것 탐문할지도 모르겠다.

또 이런다. 생각을 안 하려고 몸을 고되게 하면 금방 지친다. 지친 몸을 냉큼 눕히고 얼른 잠들려고 하면 또 상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잠을 방해한다. 동오는 자신이 저녁을 걸러서 저녁약을 안 먹은 탓에 잠이 안 와 이러는 거라며 벌떡 일어나 약을 찾았다. 쓰디쓴 알약이 물에 살짝 녹아 혀를 스치고 목구멍을 넘어갔다. 혀끝에 남은 씁쓸함이 거슬려 동오는 물을 거듭 마셨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약효가 도는지 안 도는지. 휴대폰으로 그 녀석 SNS 염탐이나 하면서 잠들까 했다가, 그냥 잔잔한 클래식 음악 하나 틀어두고 잤다. 자기 전에 떠오르는 잡생각들 때문에 휴대폰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어렵다고 얘기하자 전문의가 알려준 방법 중 하나였다.

겨우 아무 생각 안 하고 곤히 잠이 찾아와 의식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쯤 또다시 귓가에 환청이 울렸다. 잠에 빠지려던 의식이 짜증과 함께 살짝 돌아왔다. 주인의 뇌보다 먼저 감각을 찾은 후각이 썩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맡았다. 내가 아까 설거지를 안 하고 잠들어서 그런가? 그런데 왜 이렇게 가까이서 나는 것 같지?

"닦아달라니까, 그냥 내다 버리면 어떡해!"

"으아아아악!"

이번엔 비명을 참지 못했다. 기겁했다. 암만 봐도 입도 팔도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이 맞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말소리가 들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잠결에 깬 것도 짜증난데, 지금쯤 가위를 눌리고 있거나 하여튼 악몽을 꾸고 있는 거 아닐까? 시간 때우려고 찾아봤던 수많은 괴담들이여, 드디어 나에게 힘을 줄 때다. 뭐랬더라? 가위 풀리게 하려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코끝을 두드리랬나? 이건 쥐 났을 때랬나? 하긴 손부터 안 움직이는데 어떡하지. 변태같은 상상을 하면 된댔나? 실없는 생각을 하랬나?

온갖 생각이 무색하게 동오의 몸은 잘만 움직였다. 딱히 가위에 눌린 것 같지 않았다. 의지대로 몸을 일으키고 의지대로 손이 움직였다. 아주 생생한 꿈인가보다. 그래서 인형을 다시 들고 나가서 내다버렸다. 이번엔 기어나오지 못하게 위에 다른 상자를 겹겹이 꾹꾹 쌓아올렸다. 터덜터덜 침대에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다. 이번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빠르게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꿈에는 간만에 명헌이 나왔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도 뚜렷하게 떠올리기 힘들다던데. 꿈 속의 명헌은 굉장히 또렷했다. 서글서글한 눈매, 다부진 눈썹, 우뚝한 코, 살짝 도톰한 입술까지.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해 동오는 이게 꿈인 줄도 몰랐다.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무슨 말을 해도 간질간질했고, 그의 곁에 서면 느껴지는 시원한 향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가끔 명헌이 실없는 농담을 하면 동오는 시원하게 웃었다. 화목했다. 이발조차 할 시간이 없어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보며 자길 놀리는 모습도 귀여웠다. 사이좋게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같이 이발소에 가서 깎아보자는 얘기가 나와 동네 이발소로 향하기도 했다.

걷는 내내 동오는 즐거웠다. 아까 먹은 음식 얘기, 아까 같이 본 영화 얘기를 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가 슬슬 끝날 무렵 이발소에 도착해 천을 두르고 나란히 앉았다. 갓 깎은 채 거울을 보며 나란히 앉은 모습을 보니, 일정 길이 이상 자라면 칼같이 이발을 했었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너는 그때랑 달라진 게 전혀 없네. 너도. 그때 생각난다. 나도.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때 뒤에 서있던 이발사가 갑자기 말했다.

"내 이름이 뭐지?"

동오는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명헌을 쳐다보았다. 명헌은 아무것도 못 들은 듯, 특유의 평온한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저 포커페이스. 한때 동오가 속을 가늠하기 힘들게 만들었던, 감정을 알기 어려웠던,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러나 이제는 누구보다 그 기저에 깔린 생각을 금방 눈치챌 수 있는. 오래도록 함께 한 세월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동오는 명헌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게 의아했다.

"내 이름을 말해 봐..."

이발사가 또 이상한 말을 했다. 동오는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이발사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져물으려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발사는 아까 내다버린 그 인형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인형이 이 이발사의 얼굴을 한 것이겠다. 오래 전 경기에서 마주쳤던 그 얼굴. 짧게 깎은 더벅머리, 힘이 풀린 눈동자, 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 턱에 작게 난 흉터까지.

 

벌써 몇 년 전 일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실내 가득한 습기에 땀이 죽죽 유니폼을 적셨다. 훅훅한 숨을 뱉으면서 노려본 마킹 상대가 토할 듯이 했던 말들. 완전히 맛이 간 상대는 오히려 동오가 예측하기 힘들었다. 딱 1점 차이로 처음 졌던 그 경기는 동오에게 자책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덮고 열기를 식히며 몇 번이고 곱씹었다. 1점. 겨우 1점 차이. 자신이 제대로 마킹했더라면. 그때 그 3점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파울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가능성이 동오의 머리를 채웠다. 농구는 팀플레이니까, 어느 실점도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며 어느 득점도 누구 한 사람만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당시엔 그랬다.

그렇다고 그 일이 동오에게 몇 년째 꿈에 나올 정도로 트라우마로 남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처음 패배를 겪고 한 일주일 정도는 계속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도 굉장히 최근이었다. 그래서 의아한 것이다. 이미 잊혔을 일이 왜 이제 와서야 꿈에 불쑥 들이미는가. 뭐, 그 일이 사실은 완전히 잊히지 않고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튀어나온 걸 수도 있지. 하지만 전혀 그럴 계기가…

 

그 순간 동오는 눈을 떴다. 오싹한 공기가 기도를 타고 폐를 천천히 채웠다. 옆을 돌아본 동오는 슬슬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인정할 때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 인형. 몇 번이고 내다버리고 정리하고 음식까지 엎었던 인형이 놓여있었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나?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 무시했던 괴담 같은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뿐. 동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인형인지 미친인지. 이 미친 인형과 미친 상황에 동오는 인터넷을 켰다. 인형에 관한 모든 것을 뒤져볼 심산이었다. [인형이 자꾸 집에], [인형], [저주인형], [저주 푸는 법], [인형 숨바꼭질], [인형 처분], [저주인형 찢으면 어떻게], 따위의 검색어가 줄줄이 이어졌다. (인형이 뒤늦게 검색기록을 알고 까무러치게 기절할 뻔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검색이 흘러흘러 인형의 유래까지 빠삭하게 꿴 인형 척척박사가 될 무렵 보다못한 인형이 계속 말을 걸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달라고."

"하……. 뭔데."

인형은 분통이 터졌다. 아니, 이 자식이 아까부터 내 말은 듣는둥 마는둥 건성으로 답하더니, '저주인형 저주 푸는 법! 저도 정말 알고 싶은데요~' 따위의 쓰잘데기 없는 글이 써진 블로그를 보고서야 드디어 자길 봐주는 게 아닌가. 물론 끝까지 한숨 쉬는 태도가 맘에 안 들었지만 아직은 지적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좀 빨아줘. 음식물 묻어서 찝찝하단 말이야."

"집에도 알아서 들어오는데 스스로 씻지도 못해?"

"그게……. 나도 집에 자꾸 어떻게 돌아와지는지 모르겠어.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깨면 계속 여기 있었단 말이야."

너무 바보 같아서 무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인형을 어쩌면 좋을까. 일단 동오는 인형을 뿍뿍 소리가 나게 씻겨줬다. 겸사겸사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며 반응을 지켜봤다. 하지만 딱히 통각은 없는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찝찝하다는 것도 역시 그냥 기분의 문제였던 건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뭐 사람처럼 감각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진짜 말만 통하는 인형이었다.

입이 그저 장식일 뿐인 인형은 씻겨지는 내내 한 시도 쉬지 않고 말을 해댔다. 일부러 얼굴을 중심적으로 꾹꾹 눌러댔는데도 열심히 말하더라. 물리적으로 그 주둥아리를 막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동오는 대꾸 않고 속으로만 계속 생각했다. 얘는 대체 뭐지? 얘는 뭐가 문제지? 왜 하필 나의 집에?

"……해서 정신 차려보니 여기였다는 거야."

"……."

"듣고 있어? 야."

동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의 말을 종합하자면 이랬다. 다 낡아빠진 공장에서 갑자기 눈을 뜨게 된 인형은 주위에 자신 말고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자아를 가졌다는 것은 자각했지만 무엇을 바탕으로 생각이라는 게 굴러가야 하는지 정해지지 않았다.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면 마치 인간이 꿈을 꾸는 것처럼 어떤 장면들이 생생히 머릿속에 들어오는데, 특정인의 기억 같았다. 다시 정신이 들면 낯선 풍경이었다. 언제는 골동품 가게의 진열대 속. 언제는 평범하고 깨끗한 매장의 매대 속. 정신을 잃으면 특정인의 기억이 새어들어오고 정신을 차리면 평범한 인형처럼 투명한 상자에 갇혀 진열되어있기를 반복.

그 특정인. 듣다 보니 누구 얘기인지 동오는 슬슬 눈치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형도 기억을 다 짚으면 알겠지. 중학 농구 MVP, 쐈다 하면 3점슛, 무릎 부상으로 탈선해서 양아치 짓, 앞니도 빠지고, 존경하는 선생님 덕에 마음 잡고 농구부 재입부, 갖은 농구 강호 학교들과 만나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낀 이야기에, 자신과 만난 산왕-북산전까지. 인형이 지루한 부분마저도 하도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전부 얘기하는 바람에 누구 이야기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무석중학교, 북산고등학교 출신 정대만. 다른 인물의 섞임 없이, 정대만의 1인칭 기억만을 주입받은 이 인형은 자신이 인형이라는 자각이 있으면서도 행동 양식이 그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성격과 말투가 진짜 정대만과 인형 본연의 것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인형은 자신이 인형인지 정대만인지 착각할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사실상 본인이 정대만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제작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도, 그 사람이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줬는지도 모르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자신은 '대만 인형'일 것이라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물론, 진짜 인형이 움직이진 않았지만 행동이 가능했다면 마치 그랬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동오는 졸지에 자신에게 한때 깊은 기억을 새겼던 인물의 너무나도 자세한 과거사를 알아버려서 좀 불편했다. 비록 동오가 자신의 과거를 알았다는 걸 진짜 정대만은 알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복잡한 현실에 더 복잡한 괴담이 섞여들어오니 번잡스럽던 머릿속은 더 거북해져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안 선생님은 나의, 아니, 정대만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너도 그런 사람이 있어?"

묵묵히 인형을 쥐어짜고 볕 드는 창가에 널어두는 동안 동오의 머릿속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있구나? 말 좀 해봐. 아까부터 나만 떠들잖아. 뭐 딱히 목이 아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기분상 좀 무안하다고."

"……이명헌."

잠시간 찾아온 정적. 인형의 표정이 변할 수만 있었으면 지금쯤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하는 뻘한 생각이 동오의 머리를 스쳤다.

"내가, 아니, 정대만이 아는, 아니 나도 아는 거 맞구나. 그 이명헌?"

"그래."

동오는 그 평온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제 속은 뒤틀리는 걸 새삼 깨달았다. 좀처럼 속내를 알기 어려운 얼굴은 때때로 그에게 변하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주었지만 때때로 미지라는 불안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도 그랬다. 이대로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지면 다시는 얼굴 보고 지내기 힘드려나. 만나자고 연락한다면야 언제고 나올 녀석이지만 매번 핑계를 만들어내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동오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명헌을 잠시 사람 없는 뒤뜰로 끌고 와 세워놨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같은 학교, 같은 농구부, 같은 학년이라는 이유가 없어진다면 우리가 계속 볼 수가 있을까. 너랑 농구하는 거 즐거웠다, 또 농구할 수 있을까. 너랑 농구 말고도 다른 재미있는 거 해보고 싶다고 불러낼까. 그냥 단순히 얼굴 보고 싶어질 때는 어떡하지, 따위의 말들이 동오의 머리를 어지러히 휘저어놓아서 할 말도 방해할 쯤.

명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동오는 졸업 이후에도 명헌과 계속 연락하고 싶을 땐 연락하고, 보고 싶을 땐 얼굴을 보고, 닿고 싶을 땐 닿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뒤늦게 동창들에게 얘기했을 때에서야 자기가 졸업식 날 하고 싶었던 게 흔히들 얘기하는 '고백'이었음을 깨달았다. 고백을 위해 뒤뜰로 데려와놓고 한참을 말없이 세워둔 자신을 보며 명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답답했을까. 그래서 먼저 말을 꺼낸 걸까. 명헌이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신은 명헌과 가끔만 연락하고 얼굴은 더 가끔만 보는 사이이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평탄하고, 무던하고, 때론 지루한. 그저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체험할 순 없고 가정만 남은 지나온 미래는 의미 없다. 확실한 건 명헌은 이미 동오의 삶을 바꿨다. 그 전환점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였을 수도 있고, 졸업식 날이었을 수도 있고, 한창 연애 중인 때였을 수도 있고, 헤어진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명확한 전환점을 찾을 수 있을까. 변화란 어쩌면 서서히 스며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기찻길처럼, 변함 없이 직진으로 달렸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굽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구처럼, 평평한 땅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둥근 땅 위에 서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동오는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중간중간 생략해가며 간간히 대만 인형에게 털어놓았다. 대만 인형도 구체적인 얘기를 요구하진 않았다. 동오가 늘어놓은 문장들 속 연결새를 알아서 메워나갔다. 동오는 그것만으로도 조금 후련해졌다. 어쩌면 진작 속내를 터놓을 상대가 필요했던 걸지도 몰랐다. 이미 자신의 삶이 존재하고 병원을 나서면 환자의 이야기는 병원에 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전문의가 아니라, 거처가 속박되어 있어 이곳을 영영 떠날 수 없는, 출처도 모르고 영문도 모를 저주인형은 그 상대로 꽤나 적절했다.

"안 선생님 덕분에 다시 마음 다잡고 들어갔지만 말이지. 당연히 첫인상이 주먹다짐이었던 애들이랑 시작부터 합이 잘 맞았을 리가 없었거든. 티는 안 냈지만 좀 힘들어했어."

"......"

"그래도 너희랑 경기할 쯤엔 많이 좋아졌지. 어쩌면 회복하는 시간이 굉장히 긴 상처였던 걸지도 몰라. 무릎도, 대인관계도."

자기 일 아니라고 인형은 꽤 신랄하게 말했다. 동오는 대만 인형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상처. 회복. 관계. 어느 순간부터 동오와 명헌 사이를 채운 단어들.

 

연애 3년차. 상대에 대해 모를 게 없다고 슬슬 자부할 수 있는 시기. 상대가 무슨 음식을 싫어하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활동을 좋아하고 어떤 활동은 싫어하는지, 재미있게 본 영화는 뭐고, 같이 어떤 시간들을 보냈고, 남들 해본다는 데이트 코스들을 따라해본 감상은 어떠한지 속속들이 나누고.

그러다 문득 미래에 대한 얘기가 나왔더랜다. 처음엔 단순한 진로 고민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지금, 과가 나랑 잘 맞는지, 이 과에서 어떤 직업을 찾아야 할지 같은 것들. 간혹 과 수석을 할 정도로 우수했던 명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유학을 입에 올렸다. 동오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서로가 언제나 가까이 있던 장소를 떠나 타지에 있느라 안 그래도 얼굴을 자주 못 보는데. 아예 해외로 유학이라니. 자신이 갈 일도, 명헌이 갈 일도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고민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동오도 지금 있는 곳에서 꽤 우수했기 때문에, 유학을 갈 성적 자체는 충분했지만 갈 방법을 찾아본 적도 없었다. 명헌이 대뜸 나 유학 간다고 통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선택지에 올려두지도 않았던 자신과 다르게 선택지에 올려두고 고려를 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동오는 흔들렸다. 작은 흔들림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 사실이 동오에게 열등감을 가져왔다.

너는 언제나 그렇게 평온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 상대방 속은 어떤 줄 모르고 긁어대. 동오는 그간 크고 작게 가졌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설렘과 긴장 속에 상대에게 말할 생각도 못하고 묵혀뒀던 마음들을. 모호하게 떠올랐던 생각들은 입을 거치면서 말이 되어 명확한 형태를 가졌다. 그 말이 도로 동오의 마음에 박혔다. 막연한 불만이었던 것들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큰 분노가 되었다.

동오는 당분간 생각할 시간을 갖자며 그대로 만남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동오는 자신의 말을 듣던 명헌의 표정을 떠올렸다. 둥글게 올라간 눈썹. 평소보다 훨씬 커진 눈. 다물지 못하고 살짝 벌어진 입. 확실히 그 순간의 명헌은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평소라면 상대를 진정시켰을 동오는 그날따라 그 표정마저도 불만이었다. 내가 설마 이런 생각을 할 줄 정말 몰랐나? 나에게 그 정도로 관심이 없나? 쟤는 정말 내 생각이라곤 조금도 안 하는 건가?

 

명헌의 평온한 태도가 버팀목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큰 변화 없는 그의 표정에서도 미세한 감정을 짚어내며 그조차도 귀엽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저 얼굴에 숨은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채는 건 나뿐일 거라고 자부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게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왜 늘 나만 너를 읽는 쪽이어야 하는 건지, 너는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정말 맞는 건지 의심하는 것조차도 괴로웠다. 더는 생각하기 괴로워 그 길로 명헌의 연락을 모두 무시했다. 차단을 하진 않았다. 비상 연락망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온갖 악한 것들이 다 새어나간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겨우 붙어 남아있는, 마치 희망같은 책임감이었다.

 

명헌은 처음 이틀 간 얘기 좀 하자며 계속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오더니 사흘째부터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동오는 자신이 먼저 연락할까 고민하다가 그마저도 낭비같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이레째 되는 날, 눈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한 동오에게 절대 답장을 안 할 수 없는 문자가 한 통 덜렁 와 있었다.

[같이 살자. 짐 다 쌌어.]

너는 내가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일부터 벌려놓냐고 따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당장 달려가서 명헌의 얼굴을 보고 끌어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무슨 정신으로 통화를 마쳤는지 모르겠다. 옷만 대충 챙겨입고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어떻게 뭘 타고 만나러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 동오는 이미 명헌의 짐을 양손에 들고 자신의 집에 데려온 상태였다.

어벙벙한 상태로 짐 푸는 걸 도왔다. 한동안은 이 집에 사람이 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서, 욕실에 노크도 안 하고 불쑥 들어가는 등 온갖 실수를 다 했다. 적응한 뒤에는 꽤 행복했다. 대화도 전보다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집에 오면 사람이 있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 저녁엔 같이 예능이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도로 대판 싸우고 나니 더 돈독해질 수 있었다.

 

"그럼 그 후로는 어땠냐?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썩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동오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뒤늦게 작게 고개를 까딱, 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처음 싸우는 게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아니었다. 같이 사니까 좋았지만 그만큼 부딪힐 일이 더 많았다. 대판 싸우고 또 화해하고, 죽일 듯이 화 내다가도 죽고 못 살겠다고 붙어지내고. 언제는 동오가 먼저 잘못하고, 언제는 명헌이 먼저 잘못하고. 별별 이유로 언성을 높이거나 침묵하여 화를 삭였다.

동거를 이렇게 쉽게 결정해선 안 됐다는 생각과 후회가 자꾸 비집고 올라왔다. 그 후회를 기어코 명헌에게 뱉은 날이면 명헌은 외박하여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동오는 다시 불안해하며 명헌의 거취에 온 신경을 쏟았다. 명헌이 집에 다시 들어오면 또 며칠간은 명헌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명헌도 얌전히 그 다정을 받았다. 외출하고 올 때면 동오가 좋아하는 음식을 한두 개씩 포장해서 갖다줬다.

그러다 또 사소한 일로 서로 빈정이 상하면 싸웠다. 그래도 둘 다 서로에게 단 한 번도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 아무리 머리 끝까지 화가 났어도 차마 상대를 때릴 수는 없을 만큼 아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센 두 남성이 폭력까지 휘두르며 싸웠다간 이 집안 살림살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그걸 또 다음 날 정신 차린 자신들이 치워야 한다는 암묵적인 귀찮음 덕분이었다.

 

눈을 뜨면 상대가 있다. 그 사실이 언제는 미치도록 좋았고 언제는 미치도록 싫었다. 감정이 널을 뛰는 동안 상대에 대한 집념과 의존은 커졌다. 적어도 동오는 그랬다. 명헌도 그랬는지는, 글쎄, 동오는 여전히 알기 힘들었다.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명헌은 바다를 좋아했다. 대판 싸우고 어영부영 화해해서 어색한 다음 날이면 동오는 명헌에게 나가자고 얘기했다. 자차가 없어서 같이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서 바다를 보러 갔다. 가는 길에 대책 없이 아무 가게나 슬쩍슬쩍 들어가 끼니를 해결했다. 어쩌다 맛없는 음식점에 걸리면 아무 말없이 다 먹어치우고 나와선 바다로 가는 길에 실컷 음식점 뒷담을 깠다. 대부분은 평범한 음식점이어서,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얘기하며 집에서 어떻게 흉내내볼 수 있을지 토론도 했다. 정말 가끔 가다 진짜 맛있고 괜찮은 음식점에 얻어걸리면, 기록해뒀다가 다음 번에 비슷한 경로로 오게 되면 한 번 더 들르자고 얘기했다. 하지만 같은 바다를 가더라도 매번 다른 타이밍에 다른 음식이 땡기는 바람에 그 약속은 딱히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었다.

그렇게 늘 다르기만 한 짧은 여행 끝에 바다에 도착하면, 늘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언제나 그랬다. 일부러 해가 질 시간에 맞춰서 식사 시간이나 교통 수단을 조정했다. 매번 서쪽에 있는 바다로 향했기 때문에 노을이 짙게 깔리는 수평선을 볼 수 있었다. 둘은 말없이 수평선 너머로 해가 붉은 융단을 깔며 사라지는 모습을 푸르고 새까만 장막이 하늘을 덮을 때까지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들 나름의 화해였다. 명헌이 좋아하는 곳에서 동오가 좋아하는 풍경을 보는 것.

 

연애 5년차, 동거 2년차. 갖은 이유로 싸우고 헤어지고, 헤어져서도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치고, 다시 화해하고, 만나서 정을 나누고, 여전히 서로를 놓지 못하고. 지독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도 다 우리같은 걱정을 하는지, 연애 프로그램은 정말 어느 채널이든 꼭 있었다. 볼 게 없어 그걸 틀어놓고 각자 딴짓을 하다가 다시 프로그램을 봤다가 반복하고 있었다.

또 사소한 시작이었다. 때마침 나온 사연은 동오와 명헌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상황이 꼭 들어맞았다. 약속이라도 하듯 둘 다 프로그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사연을 끝까지 지켜봤다. 마침내 다른 사연으로 넘어갈 적에 둘은 고개를 돌리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도 보고 있었냐."

"……."

잠깐의 침묵. 프로그램 패널들의 조언까지 제대로 들은 건지 만 건지, 둘은 또다시 말다툼을 했다. 완전 네 얘기였다, 아니다 이건 네 얘기다. 패널들은 사연자 쪽이 잘못한 거라고 하지 않았냐, 아니다 그 사람은 애인 쪽에 잘못이 있다고 했었다, 그럼 너는 우리 관계가 다 내 잘못이라는 거냐 등.

또다시 침묵. 식식거리며 분을 참는 소리만이 프로그램 소리와 뒤섞여 방을 채웠다. 동오의 눈을 빤히 쳐다만 보던 명헌은 조용히 기기에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을 꺼버리곤 다시 동오를 바라보았다. 명백한 도발이네. 동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숨을 푹 쉬면서 양손으로 자신의 허리춤을 짚었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여전히 명헌은 말이 없었다. 동오도 침묵하고 싶었다.

동오는 지금까지의 인간 관계에서 늘 말없고 과묵한 쪽을 유지해왔다. 명헌을 만나면서도 그다지 말이 많아지지도 않았다. 둘 다 서로에게 꼭 필요한 말만 해왔다. 그래도 서로의 의중을 파악할 만큼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러다 처음으로 대판 싸웠다. 대화가 적었서. 그 후로 일부러 대화를 많이 하는 쪽으로 유도해왔다. 그렇게 2년을 더 지내왔다. 분에 맞지도 않는 수다를 떨면서.

 

침묵이 이어질수록 2년 전 그 때로 돌아간 기분에 동오는 미칠 것 같았다. 둘 중 하나라도 말을 꺼내야 한다는 압박에 스스로가 계속해서 시달려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또 화를 냈다. 화내면서 하는 말은, 쓸모없는 시시껄렁한 수다가 아니라 꼭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어떤 만족감을 줬기 때문이었다.

너는 늘 그런 식이지. 상대 속이 어떤 줄도 모르고 그 평온한 얼굴로 긁어대. 2년 전과 같은 말을 했다. 동오는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동거를 이렇게 쉽게 결정할 게 아니었다고 후회해. 너랑 싸울 때마다. 그런데 이제야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너도 그런 후회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후회하냐? 너도?

"……삐뇽."

예전에 쓰던 그 말버릇을 지금? 우리 싸우는데? 동오는 정말이지 명헌의 머릿속을 열어서 낱낱이 읽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와의 관계를 후회하지 않냐. 그냥 물어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동오는 대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늘 그 질문만은 피해왔다. 기껏 꺼낸 질문이 나랑 같이 산 거 후회하냐는 거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저렇다.

동오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고 혼란스러웠다. 너는 내가 하지도 않은 고백을 받아준 그 순간을 후회할까? 너는 나랑 관계를 맺은 모든 순간을 후회할까? 너는 나와 대판 싸우고서 나에게 동거하자고 말을 꺼낸 걸 후회할까? 동오는 혼란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열어 겨우 다음 말을 꺼냈다.

"우리… 생각할 시간 좀 갖자."

명헌은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동오는 너는 이번에 나갈 필요 없다고, 내가 나가서 자고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짐을 챙겨 싸구려 모텔로 향해 하룻밤 잠을 청했다.

생각을 정리했다. 명헌은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런 질문 자체가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해서 당황해서 말했던 걸까. 어느 쪽이 답이든 동오는 답을 듣기를 회피했다. 다시 마주치면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짜증내서 미안했다고 할지, 아무렇지 않은 척 아예 언급을 하지 말지,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얘기할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명헌과 먹었던 음식점에 들러 저녁을 포장했다. 명헌이 좋아한다고 본인 입으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저번에 같이 먹었을 때 명헌의 표정이 꽤 괜찮았던 기억이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명헌은 없었다. 씻고 있진 않았다. 찾아보니 옷도 신발도 없었다. 잠시 외출한 게 분명했다. 사람 한 명 없다고 집이 이렇게까지 허전해질 줄은 몰랐다. 동오는 침대에 누워 명헌이 언제쯤 올까, 음식 냉장고에 넣어둘까 생각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로 허전할 리가 없었다. 동오는 이상하리만치 깔끔해진 집안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명헌의 흔적이 없었다. 2년 전, 명헌이 집에 들어오기 직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혼자 사는 집처럼 깨끗했다.

정신없이 폰을 켜서 명헌에게 계속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예 신호조차 가지 않았다. 차단 당했다. 동오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차단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주했다.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본인 입장으로만 생각이 갇혀있어 전혀 몰랐다. 확실히 동오는 오랫동안 명헌을 인내해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명헌도 꽤 오랜 시간동안 동오를 인내했다. 사랑은 인내와 포용의 시간을 늘려줄 뿐 상대를 포용 가능한 모습으로 변화시키진 않았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명헌 덕에 동오의 인생이 바뀌었다지만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헌이 사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연애도 못해볼 팔자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오가 그 뒤뜰에 명헌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단단한 나무와도 같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인생이 휘어지고 사랑이란 이름 덕에 휜 채로 묶였다. 그 끈이 떨어지면 제자리로 돌아갈 텐데. 그 과정에서 거칠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지가 부러지기도 했다.

 

동오는 후회했다.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뒤늦게 마음이 정리된 명헌이 차단을 풀어서 연락 정도는 겨우 할 수 있었다. 연락이 가능해지자마자 달려가 울고 빌고 용서를 구하고 화도 내봤지만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명헌은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고 얘기했다. 그 말에 동오는 무너졌다. 하필이면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통했다. 그래, 여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인 것이다. 동오는 마침내 찾아온 이별을 받아들이고 명헌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그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쇼핑 중독에 빠져 허우적댈 때 대만 인형이 집에 온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 살려고?"

"……몰라."

"다시 연락해볼 마음은 있냐?"

"……모른다고."

"상대방 마음도?"

"……모른다니까…."

동오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대만 인형은 속이 답답했다. 움직일 줄도 모르고 그저 의사소통만 가능한 탓에 대신 시원하게 문자라도 대신 보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뭐 조언을 해줄래도 저딴 태도니 똑바로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동오 역시 여전히 답답했다. 분명 자기 얘길 털어놓는 건 속 시원하긴 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었다. 여전히 집에는 명헌이 없고, 여전히 명헌과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없었다. 가끔은 차라리 지금이 낫다고, 서로를 병들게 하며 붙잡아두느니 혼자가 낫다고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돌아서면 그와 행복했던 기억 때문에 힘들었다. 둘이 있을 때가 더 나은지, 혼자일 때가 더 나은지 저울질 하기가 괴로웠다. 너무 오랫동안 둘이 함께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더 오랜 기간동안 혼자라는 감각을 받은 채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운이 쭉 빠졌다. 다시 찾아온 정적은 그를 미치게 했다. 고요가 괴롭고 숨이 막혀 동오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잠에 들면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된다. 배고프면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인형이 말을 걸면 몇 번 대답해주고, 조용해지면 다시 잠에 빠지길 며칠. 꿈에는 가끔 명헌이 나왔다. 언제는 데이트를 하고, 언제는 대판 싸웠다. 깨고 나면 우울한 건 마찬가지라 그냥 계속 잤다.

 

길게 꿈을 꿨다. 고등학생 때였다. 사귀던 시절의 꿈은 그간 많이 꿨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동오는 이번엔 특이하게도 바로 꿈인 것도 알아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깰 방법은 없는 것 같아 멍하니 꿈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때의 자신은 적어도 지금보단 꽤 건강해보였다. 시간을 쪼개서 훈련하고, 농구하고, 공부했다. 즐거워보였다. 저마다의 개성을 품은 부원 모두가 톱니처럼 맞물려 시너지를 발휘해 멋진 팀을 만든다는 사실은 꽤 자부심을 주는 일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자각도 못한 채 현실에 충실하며 사는 모습도 부러웠다. 지금의 자신은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도 애써 외면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지 않은가.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팀으로서 명헌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은 퍽 귀여워보일 정도였다.

일상은 말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꿈이라 그런가 시간 감각이 현실과는 많이 달랐다. 어느 새 북산과의 경기 날까지 왔다. 첫 패배의 날. 새삼 저 날의 자신에게 정대만의 페이크에 속지나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꿈 속의 정대만은 어째 더 피로해보였다. 피골이 상접한 것이 그 인형의 미묘하게 초췌한 몰골과 겹쳐보였다. 꿈 속 정대만은 이번엔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명헌은 이명헌…… 최동오는 최동오……."

"……?"

"명헌…아……. 자냐… 생각나서…"

"뭐?"

"…연락…해본다……."

"안 돼!"

꿈에서 지른 건지 현실에서 지른 건지 분간 안 될 정도로 비명을 꽥 지르며 동오는 눈을 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히 얌전히 잠들었던 것 같은데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아, 제발, 설마, 설마, 설마. 아니겠지. 동오는 화면을 얼른 들여다 보았다. 동오의 엄지손가락은 이미 전송 버튼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자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눈이 마주쳤다.

"아니이……. 왠지 네가 자고 있을 때면 저주로 조종하기 더 쉬운 것 같아서……. 연습 삼아……."

캐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변명을 좔좔 늘여놓는다. 그러니까 그동안 동오가 살아있는 시체처럼 먹고 자고 반복하는 동안 이 인형은 어떻게든 자신의 상태를 알아보고 싶어서 여러 실험을 해봤다는 거다. 그 중에 자신이 동오의 꿈에 자주 등장했다는 사실을 이용, 혹시 무의식에 빠져 있을 땐 조종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노력해봤다는 얘기였다.

"그 연습을 왜 하필 이걸… 이딴 걸로 해보는 건데?"

"네가 꿈에서까지 간절하게 떠올리고 있는 거여서……."

"……."

"그냥 아무거나 시키려니 안 되더라. 개연성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가 보더라고."

"하……."

보낸 메시지 취소는 이미 시간이 지나버려서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취소해도 취소된 메시지라고 상대에게 뜰 테지. 그럼 그 내용이 뭐든 새벽에 상대 생각하다가 문자 보내놓고 급하게 취소한 것처럼 보일 테니 취소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누가 봐도 그게 맞긴 하지만 적어도 동오는 자신이 '직접' 한 게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동오는 명헌에게서 뭐라고 답장이 오든 이보단 덜 구질구질하게 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본인의 상태만큼이나 구질구질하다는 건 알지도 못했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봤는지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아 동오는 굳이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대로 잊어버리려고 했다. 서둘러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동오는 빤히 인형을 쳐다보다 말고 달칵거리며 중고 마켓에 인형 판매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잠깐, 잠깐. 미안하다고!"

쳇, 들켜버렸나. 하긴 팔아서 소유권을 넘기는 행위를 해도 인형이 다시 이 집에 되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예 이 집과 함께 팔아버려야 하나. 에이, 됐다. 대출도 다 못 갚았고 새 집은 또 언제 구하겠어. 이사는 또 언제 하고. 현실적으로 번거롭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접해서 저주도 똑바로 못 내리는―그러나 길이길이 남을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만들어주는 저주라면 성공한 것일지도 모르는― 띨띨한 저주인형 하나 피하겠다고 번거로운 일을 다시 해야 한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한참을 고민하던 동오는 인형을 어디서 샀는지 자신이 주로 들락거렸던 쇼핑몰을 하나씩 찾아봤다. 대만 인형은 미심쩍다는 듯이 옆에서 화면을 같이 봤다. 한창 정신 없을 때 충동적으로 산 물건인지라, 뭐 어디 사은품으로 딸려온 건지, 중고샵에서 산 건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최근 세 달 간의 구매 내역을 샅샅이 뒤져도 알 수 없었다. 하다못해 카드 내역과 그간 산 물건의 가격들을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찾아도 비어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인형, 갑자기 이 집에 온 것이다. 산 적도 없는데. 다른 택배와 섞여서 아주 자연스럽게.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찾는 거야? 설마……."

"……."

이 인형이 또 눈치챘나.

"내가 어디서 왔는지… 찾아주려고?!"

"어…… 응."

인형은 감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중고 판매가 안 된다면 사이트를 통한 환불 절차라도 밟으려고 쇼핑몰 탭을 십수 개 띄워둔 동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은 신이 잔뜩 나서 또 혼자 나불나불 이야기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사실 좀 궁금하긴 했거든, 나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왜 하필 내가 정대만의 기억을 받은 건지. 왜 내가 정대만인지! 게다가 정대만, 친구도 많은데 걔들 다 냅두고 하필이면 너희 집에 온 건지도.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야."

이런 단순무식한 녀석한테 경기에서 그렇게 휘둘렸다니 그때의 내가 어리긴 어렸나보군. 동오는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렇게 된 김에 마지막으로 인형의 부탁이나 들어줄까 싶었다. 환불 규정이 띄워져 있던 사이트를 전부 닫고 새로운 검색 엔진을 띄우며 물었다.

"처음 눈 떴을 때. 기억나는 풍경이 있으면 말해봐."

"으음……. 불은 다 꺼져있었고, 창문이 몇 개 깨져서 그 안으로 빛이 겨우 들어오는 정도였어."

이어진 설명은 이랬다. 색이 빛에 바래긴 했지만 특이하게 내부가 노란색과 하늘색으로 도색되어 있었고 창밖으로 보인 풍경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네모낳고 기다란 조명들이 열을 맞춰 천장에 박혀 있고, 붉은 철골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 단서들로 동오는 몇몇 폐쇄된 인형 공장을 찾았다.

"아니야. 이건 조명이 동그랗잖아."

"이 정도로 파란색이기보단 좀 더 하늘색에 가까웠어."

"아냐, 여긴 주위에 건물이 너무 많잖아. 내가 본 건 완전 허허벌판이었어."

동오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치닫는 것을 느꼈다. 야, 네가 찾아. 내가 이 몸으로 어떻게 찾아……. 제대로 기억하는 건 맞아? 어, 그건 진짜 확실해. 무슨 원리인지 인형은 몸은 못 움직여도 기억력만큼은 카메라처럼 정확한 모양이었다. 밸런스 하나는 끝내주네.

"아무리 찾아도 이거밖에 없는데……. 다른 디테일 중에 생각나는 건 더 없어? 꼭 공장 생김새 말고도."

"음… 근데 이게 중요할진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에 놓여있던 박스가 있었거든? 근데 거기에 나같은 인형이 없었어."

"그야 너같은 이상한 인형은 만들기 힘들겠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냥 거기에 인형이 없었어."

"뭐? 그럼 뭐가 있었는데?"

"신발. 운동화 같은 거."

"……."

제일 중요한 얘기였잖아 이 자식아……. 동오는 말을 삼켰다. 검지와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검색어에서 '인형'을 지우고 '신발'을 입력했다. 인형 공장만 다섯 페이지 넘게 찾아도 나오지 않던 답이 두 페이지만에 나왔다.

"어, 여기 맞는 것 같아. 내 기억보다 좀 더 색이 바랬긴 한데……. 여기, 깨진 창문 옆에 있는 벽에 난 긁힌 자국이 똑같아."

 

더 질질 끌 이유도 없었다. 전철 몇 번 타고 버스 타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동오는 곧장 표를 예매하곤 물통, 옷가지, 지갑 등을 잡히는 대로 가방에 쑤셔넣고 집을 나섰다. 물론 대만 인형과 함께. 집 밖을 나서면 자동으로 집 안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일은 동오가 잠들 때만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대만 인형은 너 실행력 좋다며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혀는 없지만. 그냥 충동적인 건데 되게 좋게 봐주네, 라는 대꾸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 진짜로 말했다간 자신이 지금 충동을 못 이기는 상태라고 인정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아서 동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새벽 첫 차를 타는 승객은 상당히 적었다. 전날부터 밤 새서 술 마신 듯 곯아떨어진 취객 하나, 이 시간부터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 몇. 한산한 칸에 앉아 가방 속에 얼굴을 처박고 소근거리는 체격 좋은 청년 하나. 피곤에 쩔어 꾸벅꾸벅 조는 승객들은 누가 봐도 수상쩍은 청년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덕분에 가는 내내 동오는 때로는 멍 때리며 창밖을 보고 때로는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며 잠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하도 많이 잤더니 딱히 졸렸던 것도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잠들면 기껏 멀리까지 나온 대만 인형이 도로 집으로 돌아가버릴까 봐 일부러 버틴 것도 있었다.

"좀 떨린다."

동감이었다. 이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혹시나 해서 오는 길에 공장 정보를 더 뒤져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담당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공장 전화번호가 적혀있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건 아니었다. 하다못해 부지를 소유한 사람이나 중개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기계음을 세 번 듣고서야 이쪽으로 수소문하는 건 포기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공장 위치까지 대략 1시간은 걸어야 했다. 지나가는 버스도 없는 곳이라 택시나 바이크 등 개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동오는 까짓 거 걸어가지 뭐, 했다가 대만 인형이 기겁을 하며 자전거라도 타라고 하는 통에 결국 공용 자전거를 빌렸다. 너 그러다 체력 다 떨어져서 내 출처 찾는 거 바로 포기하고 돌아서버리면 어쩔 거냐는 이유였다. 올 때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동오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터미널 근처, 그나마 건물이 점점히 놓인 곳을 지났다. 자전거를 빨리 몰수록 건물 높이가 점점 낮아져갔다. 땅바닥에 달라붙은 민가와 논밭이 펼쳐진 곳을 지났다. 지도에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허허벌판인 곳을 지났다. 어딜 가나 똑같은 풍경에 슬슬 방향이 헷갈릴 쯤 드디어 낡고 문드러진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미스터리한 일이 엮인 폐건물. 단어만 늘여놓으면 괴담 마니아들이 담력 시험이라든지 폐가 체험이라든지 구미가 당길 만한데도 몇 년간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을 만했다. 이딴 위치에 있는데 누가 오겠냐고. 기껏해야 어떤 살인마가 시체 숨기려고 이런 곳에 들어오지나 않았을까 상상만 해볼 뿐이다. 요 며칠 저주인형 때문에 괴담을 너무 많이 찾아봤나. 괜히 등골이 살짝 서늘해져 동오는 머쓱하게 뒷덜미를 슥슥 문지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세요?"

"야, 그러다 막… 막 뉴스에도 나온 도주한 살인마 같은 게 숨어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당당하게 물어봐?"

대만 인형도 똑같은 상상을 한 모양이었다. 명색이 저주인형 클리셰를 답습해놓고 잔뜩 쫄아있는 꼴이 너무 한심하게 웃겨서 동오는 저도 모르게 킥킥거렸다.

"왜… 왜 웃어? 무섭게."

저주인형이 살인마를 겁내더니 이젠 평범한 이별 후유증을 겪는 청년―그것도 자신의 저주의 대상이었던―을 겁내고 있었다…….

 

동오는 대답해주지 않고 건물 곳곳을 살폈다. 2층 높이의 공장은 1, 2층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뻥 뚫려 있었다. 구석에 종합 관리실로 보이는 곳이 2층에 위치해 있고 그리로 향하는 작은 계단이 나 있었다. 건물 중앙엔 기계들이 열을 맞춰 놓여있는데, 비전문가인 동오가 보기에 둘로 나누자면 한쪽은 재단하고 한쪽은 조립하는 형식인 듯했다.

"어! 저쪽에 있는 노란 상자! 저기야!"

대만 인형이 답지 않게 떨리는 소리로 외쳤다. 아직도 겁에 질린 건지, 아니면 상자를 찾은 기쁨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오는 대만 인형이 말한 노란 상자 쪽으로 향했다. 이마저도 인형은 팔을 못 움직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리킬 수가 없어서 한참 실랑이를 벌여 찾아낸 것이었다.

"저기! 저기 있잖아 저쪽이라고!"

"저기라고만 하면 어떻게 알아."

"그으러니까아 아~ 답답하네 저기 왼쪽으로 가보라고!"

"여긴가?"

"아니 그건 오른쪽이고."

네 기준으로 설명하면 어떡하냐. 냉큼 상자를 찾아 헤집었다. 다양한 사이즈, 다양한 디자인, 다양한 색상의 운동화들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어느 하나 똑같은 신발이 없었다. 마치 사람처럼. 그래도 어쨌든 전부 신발뿐인 이곳에서 갑자기 인형이 태어난 게 특이할 따름이다. 믿기진 않았지만 인형을 이루는 자재가 이곳의 운동화 재료랑 질감이 똑같았기 때문에 인형의 출생지는 이곳이 틀림없었다. 곧 폐쇄될 공장에서 누군가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어떤 일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동오는 평범했다. 적어도 스스로가 평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독하게 쌓여있던 신발들 속에서 무난하게 흰색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신발이 눈에 들었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운동화인 세계에서 홀로 인형인 그것은 마치 그 세계의 주인공 같았다. 그런 사람을 동오는 한 명 알고 있었다. 무패의 기록을 가진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 평범한 사람이라면 동요했을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지휘하던 사람. 언제나 앞장 선 채 등을 보이고 걷는 사람. 이 손을 잡으면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사람.

떠올리기만 해도 바다 냄새가 나는 사람. 그날도 대판 싸우고 화해의 바다에 도착했다. 명헌은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더니 바짓단을 돌돌 말아 걷어올렸다. 물에 발을 적시고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동오도 이내 명헌을 따라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짓단을 차곡차곡 접어 올렸다. 파도가 모래를 덮쳐 명헌의 발자국을 지웠다.

겨우 발을 적시는 것뿐이라지만 준비운동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가만히 서 있던 동오 앞으로 명헌이 다가왔다. 왼손을 내밀었다. 동오는 망설였다. 그 손을 오른손으로 잡는다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왼손으로 잡았다. 명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장 서 걸었다. 동오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명헌의 뒤에서 그를 따라갔다. 한 발 한 발, 명헌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맞췄다. 자신보다 한두 사이즈 더 큰 그의 발 안에 안전하게 들어찼다. 뒤늦게 다가온 파도가 또 한 번 모래를 훑어 발자국을 지우려 했지만 동오의 발자국은 남았다. 동오는 왜 명헌이 바다를 좋아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가고 싶다. 갑자기? 인형이 되묻자 동오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소리내서 말했나. 어쨌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인형이 알아봤자 뭐하겠냐.

"수확이 없네."

"그러게. 이제 내가 진열됐던 매장이라도 가봐야 하나.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엔 마트가……"

인형이 또 쫑알대기 시작했다. 또 어디로 가볼지 들뜬 인형과 다르게 동오는 허탈해 기운이 쭉 빠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로 아는 사실이지만 거기서 오는 무력감은 도저히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명헌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쭉 느꼈다. 끈적한 무력감 속에서 겨우 손을 뻗어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내려놓고 그 안에 잠기기를 반복했었다.

"…그때 어떤 애기가 나 보더니 자기 아빠한테 사달라고…"

대충 흘려들으며 그는 건물 뒷문으로 나섰다. 시원한 공기의 기습에 폐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낮게 깔리며 들이치는 햇빛에 절로 눈을 찡그렸다. 이동하는 데에만 몇 시간을 썼으니 아마 지금쯤 해가 지고 있는 중이겠지. 동오는 손을 눈썹까지 들어올려 눈에 겨우 손바닥만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제야 건물에 가려 숨어있던 호수가 보였다. 낮게 드리워진 햇살을 무수히 반사하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공장 뒤쪽엔 호수가 있었구나. 꽤 컸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 끝은 어쩌면 강이랑 연결되어 언젠가는 바다까지 흘러갈 수도 있지 않을까.

바다에 가고 싶다.

제 아무리 평범하고 무난한 운동화일지라도 물에 젖어 쿱쿱한 냄새를 풍기는 건 싫었다. 동오는 신발을 벗었다. 이 순간에도 계속 명헌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등을 내보일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나에게서 본인의 표현을 숨기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나를 믿고 등을 내준 걸까. 내가 너의 뒷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알까.

동오는 그대로 물에 들어가려다 말고 양말도 벗어 운동화 안에 곱게 넣어뒀다. 그러고 보니 운동화 없이 양말만 신었던 적은 있어도 양말 없이 운동화만 신었던 적은 없었다. 고작 운동화와 양말을 보면서도 자신과 명헌 같다는 생각을 하고야 마는 자신이 때로 한심했다. 양말도 벗은 김에 왼쪽 바짓단을 한 단씩 차곡차곡 접어올렸다. 오른쪽도 그렇게 하자니 좀 귀찮아서 돌돌 말아서 끝까지 올렸다. 호수에 발을 담갔다. 발가락 사이로 물살이 간질거렸다.

바다에 가고 싶다.

호수랑 바다랑 큰 차이가 있을까. 잠길 수만 있다면 여기도 바다가 아닐까. 물살은 작은 파도다. 동오는 몇 걸음 더 내딛었다. 물이 종아리를 지나 오금까지 적셨다. 찰방거리는 물에 곱게 접은 바짓단이 닿을락말락했다. 해는 아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동오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오도 맞서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지. 휴대폰은 주머니에 없었다. 아까 가방에 넣어둔 모양이었다. 가방은 또 어디다 놨더라. 아, 그래. 무거워서 공장 입구에 내려놨던 것 같다. 사실 뭘 어디에 놔뒀든간에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바다에 가고 싶었다.

여기가 바다다. 동오와의 눈싸움에 기가 눌린 태양이 하늘에 붉은 패배의 깃발을 남기며 저물어갔다.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동오는 계속, 계속, 해와 눈높이를 맞추며 앞으로 걸어갔다. 물이 어느덧 가슴까지 차올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대로 흘러가면 바다에 갈 수 있으니까. 돌아가는 길은 더 이상 상관 없었다. 이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 돌아갈 곳에, 그가 보고 싶은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던 와중에 바다로 가는 길이 나타나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다에 도착할 것 같아. 잘 됐지. 동오는 중얼거리듯이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러나 대꾸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인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 자기 할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더 할 얘기가 없어져서 조용히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까 신발 벗으면서 옆에 놔뒀겠지.

 

따끔. 그때 동오의 오른손이 미친듯이 따가워졌다. 종이에 베인 상처가 물에 닿았을 때처럼. 화들짝 놀라 오른손을 물에서 건졌다. 그 손에는 물을 먹어 잔뜩 축축하고 무거워진 인형이 들려있었다. 언제 들고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손바닥이 어디에 세게 베이거나 긁힌 것처럼 쓰라렸다. 약이라도 발라야겠다, 아니, 인형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오는 허둥지둥 왔던 길로 돌아나왔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장소에 첨벙대는 소리만이 얕게 울려 퍼졌다.

뭍에 도착한 동오는 숨을 고르며 손바닥을 살폈다. 상처 하나 없이 말짱했다. 쥐어짤 듯 쓰라렸던 그 통증이 설마 착각이었나? 아, 맞다. 인형. 그는 인형도 마저 서둘러 살폈다. 인형은 물을 잔뜩 먹어 불어오른 것 빼곤 멀쩡했다. 머리에 음식물을 엎는 바람에 향긋해질 때까지 인형을 빨아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쫙 쥐어짜고 말려주면 괜찮을 것이다. 이번엔 비누가 없긴 하지만. 그는 최대한 인형을 쭉 짜고 건조한 바닥에 올려뒀다.

동오는 그제야 제 꼴을 봤다. 얼굴만 빼고 다 잠겼던지라 바지를 걷어올린 게 아무 소용 없었다. 열심히 접은 것도 말아올린 것도 죄다 풀려서 내려오고 살갗에 축축하게 들러붙었다. 해도 거의 다 져서 옷을 말릴래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속옷 빼고 하나씩 벗어서 꽉꽉 물기를 짜내고 도로 입었다. 양말이랑 신발만큼은 보송보송했다. 해가 들지 않자 호수는 오싹할 정도로 새까맸다.

더 이상 바다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동오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죽고 싶었던 걸까, 죽도록 살고 싶었던 걸까. 분명 바다로 가고 있으니 좋다,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프자마자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아니면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허접한 저주인형이 기어코 저주에 성공하기 직전이었던 걸까.

아무리 혼자 열심히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동오는 인형을 쿡쿡 찌르며 뭐라도 말 좀 해보라고 했다. 아까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냐고. 설마 바닷물 좀 먹었기로서니 삐쳤냐고. 그러나 인형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사람 하나 건물 하나 없는 곳. 순식간에 주위가 캄캄해졌다. 동오는 하는 수 없이 오른손엔 인형을, 왼손엔 양말을 소중하게 품은 신발을 들고 공장 안으로 도로 들어가 가방을 찾았다. 휴대폰 조명을 키고 대만 인형이 자신의 첫 출신지로 지목했던 노란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놓여있었다. 그 위에 인형을 올려두고 말을 걸었다.

"일어나 봐."

"……."

"아까 말 무시해서 미안. 이제 다 들어줄게."

"……."

"뭐라고 말 좀 해봐……."

"……."

"제발……."

마지막엔 조금 흐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동오는 인형을 포기하기로 했다. 인형이 태어난 그 자리에 두고 짐을 챙겨 공장을 나왔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그간의 일이 꿈 같았다. 나 진짜, 뭐에 제대로 씌였거나 홀렸거나 한 게 아닐까. 그래서 미쳤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사실 내가 실연을 겪고 정신줄을 놓아서 아무 인형이나 붙잡고, 전혀 상관 없는 인물의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말 걸면서 먼 여행 떠났던 게 아닐까. 여행이 끝날 때에서야 정신을 차린 게 아닐까. 대화하는 거 신기하다고 녹화라도 해볼걸 그랬나. 그럼 제정신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하는 인형에 대고 혼잣말을 늘어놓는 내 꼴이 데이터로 길이길이 남아있을 법도 했는데.

하지만 동오는 어쩐지 대만 인형을 단순한 자신의 착각으로,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들을 그저 낭비와 허깨비라고 결론짓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진짜였을 것이다. 그래서 공장까지 왔다. 그 인형을 위한다는 핑계로, 실은 도피하기 위해서. 되돌아갈 길도 알아놓지 않았다. 귀신 따위에 홀린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충동에 홀렸다.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물에 서서히 잠겨갈 때,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아예 깊은 데 빠져버릴 것만 같았을 때. 그때 인형이 자신의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내 나를 말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허접한 저주인형 평생의 저주를 다 쏟아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준 것이라고. 그게 틀림없다고 동오는 생각하기로 했다.

 

지이잉. 가방 속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나도. 가끔은.]

인형이 만들어주고 간 수치스러운 과거사는 이렇게 이어졌다.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는 힘들 것이다. '예전처럼'. 고등학생 때처럼. 갓 사귀기 시작했을 때처럼. 처음으로 대판 싸웠을 때처럼. 그 이후 엉망인 연인 시절을 보냈을 때처럼. 서로가 서로를 놓으면 안 될 것만 같았고, 서로에게 의존한 만큼 집착했고, 서로를 괴롭히면서 위안을 찾았던 때처럼.

나의 잘못과 상대의 잘못을 저울질하면 기분이 나아졌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자책과 후회와 원망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그러나 지금, 동오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과 끝을 모두 경험한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끝이 좋지 못했다 해서 지금까지 함께 한 시간들을 그저 낭비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가장 곁에 두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서로처럼 굴던 연인을 하루아침에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기가 더 힘들지 않겠나. 끔찍했던 시간보다 끔찍하게 행복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건 분명했으니까. 가끔은 서로 추억을 나누는 정도로 괜찮을 것이다. 아주 가끔.

바람이 불어왔다. 미처 다 짜내지 못한 물기가 흘러 양말과 신발을 적신 지 오래였다. 젖은 걸 말리는 일은 적시는 일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그러나 언젠간 반드시 마른다. 충분한 햇살만 있다면. 동오는 계속 페달을 밟았다. 더운 바람이 시원하게 옷을 감쌌다. 어쩐지 앞으로는 바다에 갈 일이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전철을 타고 몇 시간을 공들여야 갈 수 있던 바다. 그러나 날만 좋다면 노을은 언제 어디서든 질 것이다. 그 사실이 위안이 됐다. 그래서 동오는 핸들을 틀었다.

집으로 가자.

이제는 아무도 없을 그 집의 고독을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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