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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客

- なにこ -

※ 주의 요소 ※

범죄(사채, 돈 세탁, 청부살인, 불법 밀반입, 마약, 동물학대, 서류위조) 요소, 부상 및 사망 소재


작 내에 사용된 지명은 배경의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요소로 차용되었을 뿐
실제 지역과는 무관한 점을 밝힙니다.

encounter

바닷가에 도착한 남자가 한숨을 쉬며 주저앉듯 모래사장 위로 철퍼덕 몸을 앉혔다. 남자는 아주 고단한 일을 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땀에 절어 있었고,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남자는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려는 듯, 입고 있는 흰 정장의 재킷을 벗어 간단히 개어 제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넥타이를 끌어내리고,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두 개 풀어냈다. 소매의 단추도 풀어내, 소맷단을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 남자는 조금 느슨해진 차림새로 팔을 뒤로 해 몸을 지지했다. 팔과 어깨에 기댄 몸이 점점 아래로 꺼져, 어깨가 잔뜩 솟아 올라 있었다. 남자는 흰 정장 바지 사이로 모래사장의 모래가 엉겨드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다리도 쭉 뻗어 한 쪽 발목 위에 다른 쪽 발목을 올려두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바닷바람이 남자를 향해 부드럽게 불어와 남자의 젖은 머리칼을 살랑였다. 남자는 코끝을 간질이는 바닷바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웠다. 그것도 잠시, 남자는 이내 다시 수심이 깃든 얼굴을 하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열었다. 손을 사용해야 하는 탓에 뒤로 기대었던 팔을 앞으로 가져오느라 구부정해진 자세로 남자는 담뱃갑 안에 하나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다시 팔을 뒤로 해 몸을 기댄 남자가 이내 다시 편안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평온함을 연상시키는 지붕의 굴뚝처럼, 남자의 입에 솟아오른 담배가 연기를 위로 천천히 피워 올렸다.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이 시렸기 때문이었다. 시야가 차단된 남자의 다른 감각이 서서히 열렸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남자의 귓가를 간지럽히고, 모래사장을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평화로운 이 순간을 만끽했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남자는 목을 더 뒤로 젖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 이를 향해 눈을 떴다. 남자가 몸을 기대어 앉은 상반신 만한 정도의 어린 아이였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코가 오뚝한 게, 어린 아이 치고도 퍽 잘생긴 얼굴이었다. 남자는 아이를 편히 보기 위해 팔에 기대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뒤로 돌아보려다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게 떠올라, 남자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모래사장 위에 던졌다. 아이는 남자가 던진 담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다시 남자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 쓰레기 버리면 안 돼요. 담배도 피우면 안 돼요."

눈 만큼이나 똘망똘망하게 말을 한 아이는 가슴께에 'Be Nice!'라고 적힌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래, 내가 미안."

아이는 남자를 한동안 더 바라보다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도망가듯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남자는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도 이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돌아가야 할 곳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남자는 돌아가야 했다.

 

 

 

 

白客

なにこ

 

 

 

​​​​be a long night

최동오는 이명헌이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아직 얼굴이 앳되기 때문에 접객을 하기엔 미덥지 않은 정우성을 대신할 새 얼굴이라고 했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사실은 그게 이명헌이 떼어놓지 못하고 달고 온 ‘혹’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특히 신현철은 그 ’혹‘의 존재에 대해 유난스러우리 만치 비호를 표했는데, 아무도 그런 현철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몸집이 커져 봐야 덜미만 잡히고 꼬리만 밟힌다고 현철의 동생인 현필을 영입하는 걸로 현철과 사흘 밤낮을 실랑이를 벌였던 이명헌이, 하루아침에 혹을 달고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신현철은 이명헌이 달고 온 혹, 최동오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 대해 한 마디로 일축했다. ’지 어릴 적 생각이 났겠지’. 비소와 조소가 섞인 말이었다.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이명헌은 원래 농구를 하던 사람이었고, 이명헌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당시 돈놀이를 하던 도 사장의 돈을 끌어 썼다가 망하는 바람에, 이명헌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현철의 말은 어딘가, 이명헌이 여기로 흘러 들어왔다기 보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딱히 따져 묻지는 않았다. 여기서 과거를 털어봐야 유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신현철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우리 중에는 그나마 멀끔해 보이는 정성구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돈놀이하던 도 사장 밑에서 만났으니 사정이야 다 빤하지 않겠는가. 이제 차이는 도 사장의 돈을 얼마나 끌어 쓰고 망했냐는 것인데, 이명헌은 그 어린 시절부터 농구를 했다고 했으니 아마 나나 현철에 비해서는 더 많은 돈이 오고 갔을 것이다. 근거 없는 추측이었다.

 

최동오는 최현호 부장 판사의 아들이었다. 최현호 부장 판사는 근래에 가장 두각을 보이는 부장 판사였다. 그 쪽엔 일절 관심도 없는 내가 뉴스에서 몇 번이나 이름을 보았을 정도였다. 도 사장을 찾아오는 손님들 중에서는 최현호 부장 판사의 정계 진출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최현호 부장 판사가 정말로 정계 진출 의사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최현호는 도 사장을 찾는 몇 손님에 의해 의뢰되었고, 그 최현호를 담당했던 사람이 이명헌이었다.

최현호는 최근 들어 발군의 능력으로 두각을 보이는 부장 판사였으니, 최현호의 죽음에 대해 딴지를 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의 정계 진출을 바라며 서포트를 자원하던 이들과 그 밑에서 일하던 이들과 그의 가족들까지, 최현호는 부검을 요청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시끄러워질 수 있어서 이명헌 혼자 배정되었다. 도 사장이 믿고 쓰는 에이스인 정우성 대신에 이명헌이 간 것은, 이명헌이 여태 누구의 눈에 뜨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명헌은 가끔 농구 할 때 버릇이 남아있는지, 여전히 농구를 하는 사람 같은 말을 하곤 했는데, 이렇게 혼자 단독 배정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주장이 나서 줘야 할 때도 있는 법.‘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 현장에는 없었다. 그저 이명헌 혼자 다짐하고 혼자 만족하는 말로,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런 이명헌이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28인치 캐리어 안에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것들을 잔뜩 담은 혹, 최동오 하나를 달고 돌아왔다. 자세한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이명헌은 이제 그 모든 일을 도 사장이 한 짓처럼 꾸며내는 프레임을 짜야 했다.

원래도 이명헌은 도 사장 밑에서 나오고 싶어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본인은 이 일로 바짝 당겨 벌고는 그 뒤부터는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고 종종 말하고 다녔다. 도 사장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누군가 밑에서 일한다는 건 끝이 깔끔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특히 이 바닥에서는 더 그랬다. 그래서 이명헌은 은퇴의 일환으로 자기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기 위한 큰 그림의 시작이었다. 최현호 부장 판사 사망 사건을 도 사장의 일로 만들어내고, 도 사장의 손님들을 다 제가 데려오는 것. 그게 이명헌의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혹이 달려 있었으면 안 됐지만, 어쩐지 혹은 계속 이명헌 옆에 달려 있었다.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다. 어쩌다 달린 혹이 아니라, 어쩌면 달고 싶어서 단 키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최현호 부장 판사의 정계 진출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이명헌의 최동오가 혹이었는지 키링이었는지 역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우리 중에는 신현철 만이 최동오를 '키링'으로 여겼는데, 나는 솔직히 말하면 신현철의 최동오를 향한 비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정성구는 왼팔 자리를 빼앗겨서 배가 아픈 거 아니냐는 제법 그럴듯한 추측을 해 보였는데, 그렇다기에 최동오는 너무 순진했다. 아무튼 최동오와 이명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명헌의 수작질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내가 여기서 백객을 운영하고 있다는 게 그 수작질이 성공했다는 방증이었다. 이명헌은 도 사장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도 사장 밑에서 같이 일하던 나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해코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명헌은 해코지 하지 않겠지만, 오른팔을 학교에 보내놓고 몸을 사리고 있는 도 사장은 해코지를 할 소지가 다분했다. 도 사장 밑에서 아주 오랜 시간 있었던 우리는 그 미래를 익히 예상했다. 그래서 신현철과 정성구는 이명헌의 옆에 남았다. 나는 언제든지 그만둘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칼에 맞더라도 지금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나는 내가 일하던 식당이 도 사장 손에 넘어가면서, 그 가게에 있던 기물들이 도 사장에게 넘겨지듯이 같이 넘겨졌다. 그때 내 나이는 열여섯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도 사장에게 가게를 넘길 수밖에 없던 가여운 정 씨 아저씨가 직접 알려준 칼질뿐이었다. 나는 그 칼질로 생선 대가리나 눈알을 떼어내는 일을 했었는데, 도 감독은 내 그런 하찮은 능력도 귀히 여겨 나에게 비슷한 일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생선의 대가리를 따는 일과 사람의 목을 따는 일은 일견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같은 일이 될 수는 없는지라, 나는 언제든 도망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도망쳤다가 잡혀 오기도 여러 번이었고, 그때마다 손목이 잘리네 마네 했지만, 이 손목이 없으면 아쉬운 쪽은 결국 내가 아니라 도 사장 쪽이었으므로 내 손목은 언제나 멀쩡히 남아있었다. 그런 내게, 이명헌이 준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기회를 잡아 사람의 목을 베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이명헌은 내 몫의 돈을 나눠주었고, 나는 그 돈으로 식당을 차리고 싶었다. 근데 이 식당을 차리려고 보니까, 사업자등록을 해야 했는데, 나는 애초에 출생신고조차 된 적이 없는 무적자였기 때문에 애초에 등록 자체가 불가능했다. 신현철이나 정성구 이름을 빌리기엔 자칫 잘못하다간 모두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고 이름을 믿고 빌릴 만한 제삼자도 없었다. 이명헌은 제 이름이라도 갖다 쓰라고 했지만, 나는 되도록 그들의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도 사장에게 덜미를 잡히려고 내놓는 꼴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선뜻 제 이름을 내어준 게 최동오였다. 어릴 때부터 제 이름으로 된 남의 재산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던 최동오는, 갑자기 제 이름 밑에 식당 하나 생긴다고 해서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미덥지는 않았지만, 개 중엔 가장 안전한 이름이었다. 그렇게 최동오는 내게 이 식당을 내어주었다.

조촐한 개업식 날, 최동오는 이명헌의 옆자리에 앉아 턱을 괸 채로 그런 말을 했다. 내가 죽으면 여긴 어떻게 돼? 나는 식당을 개업하자마자 잃을 수는 없었기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학을 뗐지만, 이명헌은 담배나 뻑뻑 피우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 저 앞에 등이나 하나 달아줄게, 흰색으로. 그 이상한 대화에 신현철은 인상을 찌푸렸고, 정성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맞은편에 선 나만, 이름을 빌려 받은 주인이 된 도리로다가 그 대화의 진위를 살펴야 했다.

 

백객은 아이러니하게도 동네에서 유일하게 젊은 여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일단 여기서 일하는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아침 6-7시까지 불을 켜고 장사하기 일쑤라 애매한 시간에 집에 가기 위해 그들이 일어나야 하는 일도 잘 없었다. 어차피 동네 한 가운데에 있어서 택시를 타기엔 돈이 아까운 거리에 집이 있을 사람들이었지만, 밤거리를 걷는다는 건 퍽 무서운 일이란 걸 그들이 아는 만큼 우리도 알고 있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밤거리에서 생명의 위협을 어떤 방식으로든 느껴본 자만 알 수 있는 공포였다. 개 중엔 자주 본 만큼 우리에게 친근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때때로 무례했어도 기본적으로 예의를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추태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젊은 여자들이 자주 드나드니 그에 따라 예의라곤 배워본 적 없거나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몰상식한 늙은 파리들도 자연스레 꼬이게 됐는데, 백객엔 일단 신현철이 매일 상주하고 있는 탓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바 테이블의 가장 바깥 자리에 그 거대한 덩치를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스툴에 걸쳐 앉아 있는 신현철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겁을 주기 딱 좋았다. 종종 멀쩡한 손님들도 쫓은 탓에 장사 망치지 말고 꺼지란 소리도 몇 번이나 했지만, 결론적으론 신현철의 존재가 백객의 매상에는 퍽 도움을 주었다. 늙은 파리들은 젊은 여자들을 보고 따라 들어왔다가 신현철의 기세와 술값에 기함하고는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일쑤였다. 개중에는 기세 좋게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도 있었는데, 끝내는 술에 취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쫓겨났다.

신현철이 도 사장 밑에서나 하던 문지기를 아직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명헌은 가끔 가게에 들릴 때면, 문지기처럼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신현철을 보며 혀를 찼지만, 우리들 중에 도 사장 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선 신현철이나, 칼로 다른 존재의 대가리를 따내는 일을 하는 나나, 뒷돈 만지느라 빡세게 계산기 두드리는 정성구나 다 사정은 비슷했다. 최동오와 동업을 한다는 이명헌으로부터 도움을 요청 받아 일을 돕는다는 정성구로부터 비화를 들어보면 이명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명헌이 새로 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일을 도와준다는 정성구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정성구가 아는 건 둘이 배를 탄다는 것이었다. 정성구는 배가 나가고 들어올 때 맞춰서 항구에 나가면 배에서 내리는 이명헌을 본다고도 했다. 그에 비하면 도 사장 밑에서도 이명헌이랑 꽤 자주 합을 맞춘 탓에 '그 배'에 여러 번 타 봤다는 정우성도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정우성의 말에 의하면 '돈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파티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걸로 사업을 해봐야 약 장사 밖에 안 됐는데,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약 장사는 돈이 되지가 않는다는 걸. 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면야 단가를 세게 쳐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이명헌한테만 약을 사는 게 아니니 그렇게 많이 가격을 칠 수도 없을 터였다. 나와 신현철은 정성구와 정우성, 두 사람이 준 정보를 기반으로 그 둘이 하고 다니는 일에 대해 머리를 맞댄 적도 있었지만 정보가 너무 단편적이었으므로, 제대로 된 것을 추리해낸 적은 없었다.

 

배를 이용해 사업을 하기 때문인지 이명헌이 가게에 등장하는 날에는 그날 비 예보가 있었거나 비가 오는 날이었다. 부지런한 이명헌은 아침에서 점심 사이에 일기 예보를 확인하는지, 내가 자고 일어나면 꼭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 가도 되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이명헌이 오는 날은 언제나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나한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돈을 어디서 어떻게 벌어오는지 모르지만 술값을 안 내고 간 적도 없고, 이명헌이 와서 쓰고 가는 돈이나 다른 손님들이 종일 와서 쓰고 가는 돈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동오라도 오는 날에는 판이 좀 커졌다. 최동오는 항상 가게 장식용으로 비치해 둔 고급 사케들을 털었기 때문이었다. 신현철은 그런 최동오를 향해 '입도 고급인 새끼'라고 했지만, 그런 비아냥에 최동오는 일말의 타격도 입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 소리 내 웃으며 하는 말이라고는, 값 비싼 술을 마셔야 뒤탈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이유는 술의 가격이 저렴할수록 '술'이 아닌 다른 것들이 가미되기 때문이라는 건데, 일견 맞는 말이긴 했지만 가격이 비싼 술이라고 해서 에탄올만 100% 들어 있는 일은 없었으므로 꼭 맞는 말도 아니었다. 이명헌은 최동오가 오는 날이면 꼭 신현철이 앉은 자리에서 세네 자리를 띄워 앉았다. 최동오는 언제나 이명헌이 신현철과 띄워둔 자리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신현철은 그 행위에 대해 '뭔가 견제 받는 기분'이라고 했지만, 나는 동업자들끼리 조용히 할 얘기가 있나 보다 하고 가볍게 생각할 뿐이었다. 최동오는 제가 비싼 고급 사케들을 다 털어 마시는 게 미안했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새로 전시하라며 다른 비싼 술들을 사 오곤 했는데, 이자카야에는 맞지 않는 양주들이라 그 술들은 결국 우리끼리 마시고 해치우는 술이 되었다.

 

장마철이 오면서 이명헌은 가게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매일 문을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장마철에는 나도 다른 손님들을 같이 받기 시작했다. 어떤 손님은 비 오는 날이면 문 안 여는 줄 알았다며 우산 밑으로 떨어진 비에 젖은 어깨를 털며 말했다. 바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명헌이 뭔가 찔리는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 이후로 이명헌은 장마철이면 괜히 눈치 받는 게 싫은 사람처럼 가장 안쪽의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서빙하기 귀찮으니까 바 테이블로 나오래도 꼭 그 자리에 앉았다. 최동오라도 오는 날이면 사정이 좀 나았다. 구석지고 어두운 삶이라곤 자라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최동오는 그런 자리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명헌이 조명 환한 곳으로 나와야 했다. 둘이 바 테이블에 앉지 않고, 일반 2인용 테이블에 앉더라도 최동오가 오는 날엔 최동오가 직접 저들이 주문한 것들을 가져갔으므로 내가 이명헌을 응대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 날은 비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굳게 닫아둔 목재 문 너머로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오냐며 언제나 이명헌보다 1시간 정도 늦게 오는 최동오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며 구시렁거렸다.

"우산이 하나도 소용이 없어."

"맨날 자동차가 모든 입구까지 데려다주는 삶만 살아봐서 이런 날 우산은 원래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냐."

신현철이 이죽댔다.

"나는 내 손으로 우산 써 본 적이 없어서 몰랐지."

최동오가 받아치는 말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최동오라면 진짜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 재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따지자면 둘 다였고, 신현철은 표정으로 보아하니 후자인 것 같았다. 옷에 젖은 물기들을 털어내느라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최동오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마주친 얼굴들은 상당히 가관이었을 것이다. 표정을 지은 나도 내 주위로 고개를 둘러본 표정들이 가관이라고 느껴졌는데 그런 이의 얼굴들 한 번에 본 최동오의 감상은 강했을 것이다. 한참이나 제 눈앞의 표정들을 보느라 눈을 끔벅이던 최동오는 갑자기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뭐야, 너네 이런 얘기 재미있어 하는 거 아니었어?"

머쓱해 하는 최동오를 보며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이명헌이었다. 최동오는 이명헌의 맞은 편 자리의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웃는 이명헌을 제법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게 웃자고 한 소리였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판에, 이명헌이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웃고 있으니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건 그 둘을 제외한 셋이었다. 그나마 그 둘과 얼굴을 자주 보는 정성구는 잠깐 둘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한 손바닥 위에 다른 손을 주먹 쥐어 올렸다.

"동오 너가 당했네, 명헌이한테."

최동오는 정성구의 말에 이명헌을 한참 노려보다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명헌이 그럼 그렇지."

최동오의 푸념 섞인 말에 이명헌은 웃음을 좀 추스르며 대꾸했다.

"니가 하면 당연히 재미없지."

상황을 보아하니 이명헌이 최동오한테 우리들끼리 있을 때 이런 식으로 자주 말하고 논다고 귀띔을 해준 모양이었는데, 화자가 최동오인 바람에 망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떤 개그는 '당사자성'이 아주 중요해진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최동오 딴에는 웃자고 개소리를 한 번 해 본 모양인데, 최동오는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재벌의 손자였으므로 그 '개소리'가 '개소리'로 성립되지 않는 탓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애초에 그런 말이 '개소리'로 성립되려면 그런 경험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거나 그만큼 그 '개소리'에 당사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어야 했는데, 반대로 최동오는 그 '개소리'의 당사자성이 너무 높은 게 문제였다. 술도 저렴한 걸 마시면 뒤탈 생긴다고, 전시용 고급 사케들만 털어 마시는 최동오가 그런 말을 했으니 그 말을 개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했다.

나는 끝까지 웃지 못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이 이럴 때 사용되는 건지 몰라도, 그래도 끈끈하기로는 가장 끈끈했던 우리 넷의 어떤 유대관계가 끊어진 기분이 들었다. 최동오가 이명헌이 달고 온 혹이 아니라 키링이라는 확신이 든 것은 그즈음이었다.

 

최동오와 이명헌이 단 둘이 있는 모습을 눈여겨보다가, 어떤 회의감이 들어 그것을 그만두었을 즈음에 최동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최동오의 행방이 묘연해진 뒤, 이명헌은 전과 달리 거의 매일 같이 가게를 찾았다. 일이 끝나면 오는 것 같았다. 이명헌이 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했는데, 이명헌이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으니 알 방도가 없었다. 정성구는 출근하는 날이 늘었다고 했는데, 여전히 배에 타는 건 이명헌 혼자라고 했다. 최동오의 행방이 묘연해졌어도 사업이 굴러가는 걸 보아하니, 일 쪽으로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다고 또 우리끼리 추측할 뿐이었다.

최동오의 행방이 묘연해질 즈음에 정우성도 연락이 두절됐다. 정우성은 프리랜서처럼 도 사장 밑에서도 일을 하고 쉬는 날 시간이 맞으면 이명헌 밑에서도 일을 했는데, 우리는 정우성의 연락이 끊겼을 때 모두 그 덜미가 잡혔겠거니 생각했다. 슬슬 도 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가 됐으니, 정우성도 몸을 사려야 할 거라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신현철은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촉이 좋았다. 그런 신현철이 둘 사이의 뭔가 연관이 있을 거라며 정우성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명헌은 마치 신현철이 추측하는 게 다 틀렸다는 사람처럼 그런 이야길 옆에서 들으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신현철이 '진짜' 뭐가 이상하다고 말을 꺼낸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을 때였다. 정우성의 집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땅 위에 멀쩡하게 있던 집이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는 일은 불가능했으니, 물리적으로 없어졌다기 보단 서류상으로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는 것에 가까웠다. 현필은 행정구역이 다른 동네의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현필은 신현철이 같이 데려다가 일을 하자고 이명헌과 실랑이를 벌일 때에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정우성을 찾지 못한 신현철이 제 동생에게 정우성의 집 주소라도 찾아보라 시킨 모양이었다. 정우성의 집 주소는 충남 보령의 어느 작은 섬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 곳엔 정우성의 흔적조차 없었다고 했다. 정우성이 단순히 연락을 끊은 정도가 아니라,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신현철은 다음 날부터 이명헌을 들들 볶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우리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신현철이 이명헌을 들들 볶다 못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장사를 접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신현철은 매일 이명헌이 나타나기만을 벼르고 있었고, 신현철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명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니 속이 답답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명헌은 끝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 동업자가 아니니, 내부의 이야기를 알려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정성구한테라도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에 이명헌은 정성구도 동업자가 아니라고만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만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일주일 뒤에도, 이 주일 뒤에도, 일주일만 기다리라는 말은 계속 반복됐다. 그 일주일이 뭔지 알지 못해 속이 답답했던 건 그 말을 처음 한두 번 들었을 때나 그랬고, 그 이후에는 별 다른 일이 없어져 다들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현철은 아예 이명헌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모양이었고, 이명헌은 이번에도 신현철의 태도가 어떻든 크게 상관 없어 보였다. 이명헌의 동업자는 이제 완전히 최동오가 아니라 정성구 같아 보일 만큼, 정성구가 출근하는 날이 잦아졌다. 정성구는 출근하는 날이 늘 수록 가게에 얼굴 비추는 일이 적어졌는데, 이명헌은 여전히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었다. 하도 이명헌만 드나들기에 혹시 정성구만 일 시키고 너는 노는 거 아니냐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명헌은 그저 낄낄 웃었다. 이명헌이 웃는 얼굴을 보고 기분 나쁘다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최동오가 자취를 감춘 지는 3개월이 지났고, 장맛비에 장사 망했다며 툴툴거리던 이명헌은 이제 추워서 장사를 어떻게 해야 하냐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바다 환경이라는 게 날씨를 많이 탄다는 건 알았지만, 기온까지 무시 못 할 일인가 싶어 궁금했지만 자세히 내막을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명헌이 알려주지 않을 게 뻔했다. 술집의 장사는 안 될 것 같은 날에도 잘 되고, 또 잘 될 것 같은 날에는 안 되기 마련이라 나는 가게 장사 걱정을 접은 지 반년 쯤 되어가던 날이었다. 가게 셔터를 내리고 집에 가려는데 이명헌이 대뜸 그런 말을 해왔다.

"내일 쉬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나는 셔터를 내리다 말고 이명헌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명헌의 속은 참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쉬는 거 봤냐."

셔터를 마저 내리고 셔터 끝에 자물쇠를 채우며 대꾸했다. 이명헌은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우는 나를 한참 지켜보다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뭐야."

"내일 여기서 해야 할 게 있어서, 가게 좀 빌리자."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말 똑바로 해."

"그냥, 좀 할 게 있어. 여기서 해야 하는 거라 그러니까 가게 좀 빌리자."

짜증이 치솟는 와중에도 이명헌의 얼굴이 보였다. 여태까지 보인 적 없는 낯이었다.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만사가 여유롭다는 듯이 천하 태평한 얼굴을 하던 그 이명헌이, 그런 얼굴을 하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명헌은 계속 굴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보인 채로 있었고, 나는 이명헌의 얼굴을 살피다가 끝내 열쇠를 넘겨주었다. 어렴풋이 최동오와 관련된 일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동오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백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힘들었다. 서류 상으로 백객은 최동오의 것이었고, 최동오가 없었으면 백객이 만들어지지도 못했을 거라, 최동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언제든지 최동오가 달라고 하면 내어줄 의사도 있을 정도였다.

"두 시간 늦게 올 거야. 그 정도면 돼?"

"해볼게."

열쇠를 받은 이명헌은 중얼거림처럼 대답했다. 이명헌이 그럴 사람은 아니었지만, 혹시 이 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치를까 싶어 두 시간만 빌려주었는데도 이명헌은 군말이 없었다. 뒷맛이 영 깔끔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맛은 진짜 음식이든 아니든 꼭 사람을 탈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아침부터 추척추적 뭔가가 쏟아졌다. 손을 뻗어보니 작고 하얀 알갱이가 손에 닿자마자 바스러지며 녹았다. 신발 아래 바닥이 얼룩져있는 걸 보아하니 진눈깨비인 모양이었다. 무슨 날씨가 이러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레 평소처럼 베란다에 맨발로 담배를 피우러 나가려다가, 베란다 위에도 든 진눈깨비 때문에 축축해진 바닥 때문에 다시 문을 닫았다. 가게에 출근해 일하기 전에 담배나 피우고 해야겠다 싶어 평소보다 준비를 서둘렀다. 이명헌에게 준다던 두 시간의 유예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지금 쯤 집에서 나가 설렁설렁 출근하다 보면 이명헌이 하겠다던 뭔가는 다 끝났을지도 몰랐다.

바스라져 녹는 눈에 신발이 젖지 않게끔 발등 부분이 코팅된 재질로 된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 위로 신은 흰 양말로 걸을 때마다 밟혔던 눈이 튀어 흰 양말이 잔뜩 얼룩이 졌다. 편의점으로 가 양말을 하나 새로 살까 싶었지만, 어차피 일하는 동안엔 발을 보일 일이 잘 없으므로 그냥 가게로 향했다. 매일 하는 루틴이나 다름 없는 출근 전 담배 피우기를 하지 못해서 그런지 자꾸 속이 답답해 한숨이 나왔다. 집에서 가게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였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우산 대를 어깨에 기대어 놓고 잠시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눈길에 차가 미끄러졌는지 엄청 큰 클랙슨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큰 소리에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웬 흰색 차가 보도블록 위 전봇대를 들이 박은 채였다. 출근길에 좀처럼 볼 수 없는 큰 사고라서 잠시 상황을 살펴보다가 신호가 바뀌는 걸 확인하고 다시 발을 옮겼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이명헌은 가게 처마 밑에 웅크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처마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등허리가 눈에 젖어 있었는데도 뭔가에 열중이었다. 뭐하냐고 아는 체를 하며 다가가려던 내 시야에 이명헌의 거대한 몸 밑으로 흰색의 뭔가가 보였다. 자세히 보기 위해 잰걸음으로 다가가니 이명헌은 매일 가게에 걸어두었던 등을 만지고 있었다. 그걸 왜 만지냐는 말을 하려다가 문득 개업식 날 농처럼 오고 가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죽으면 여긴 어떻게 돼?'

'저 앞에 등이나 하나 달아줄게, 흰색으로.'

그 때 그냥 정성구처럼 들어도 못 들은 척이나 하고 있을 걸,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으므로 나는 우산을 바깥으로 기울여 눈에 맞는 이명헌의 등허리를 막아주었다. 우산을 씌우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니 이명헌은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등을 재조립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이걸 두 시간 동안 잡고 있었냐."

"불이 안 들어와."

"참, 너도 너다."

비아냥 같은 말에 이명헌은 헛웃음을 쳤지만 등을 내치지는 않았다. 나는 우산을 씌워주던 것을 그만두고 이명헌의 옆에 앉아 등을 재조립하는 것을 도왔다. 전선을 말끔히 정리하면 거짓말처럼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명헌은 내가 하는 양을 보고는 낄낄댔다. 우리는 몇 번 더 그 등을 가지고 씨름을 하다가, 불이 들어오는 것에 만족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전선이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채로 깃대에 다시 등을 꽂자 중력 때문에 등이 축 처져 떨어졌다.

"원래는 저 뚜껑이 등을 잡고 있어야 하는 거잖아."

"나도 알 거든."

진눈깨비가 축 처진 등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자칫 잘못하다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모양새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깃대 끝의 뚜껑에 매달린 전등이 힘없이 나부꼈다. 이명헌은 뭐 하나 깔끔한 게 하나 없다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드디어 불을 붙였다. 이명헌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자 나도 출근 전에 눈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나온 게 떠올랐다.

조용히 담배만 피우던 이명헌이 대뜸 그런 소리를 했다.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이명헌을 바라보니, 이명헌이 웃고 있었다. 그게 웃을 만한 일인가, 싶어 곰곰이 이명헌이 말한 문장을 되새겨 봤지만 별로 웃긴 내용은 아니었다. 이명헌이 뜻 모를 말을 하는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말들은 대개 농구 관련된 말이었기 때문에 농구 얘기가 전혀 아닌 지금은 좀 의아했다.

"그게 뭔 말이냐."

내가 되묻자 이명헌은 다 피운 담배를 눈 때문에 질척해진 바닥 위로 집어던지며 작게 숨을 뱉었다.

이명헌이 말할 때마다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입에서 새는 입김은 담배 연기처럼 꼭 허옇고 흐릿해서 얼핏 보기엔 담배 연기처럼 보일 것도 같았다. 이명헌은 제 할 말을 마치고서는 이제 가야겠다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나는 가는 이명헌의 뒷모습에서 머리 위로 흩어지는 입김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입김은 너무 허옇고 흐릿해서 멀리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명헌의 등은 계속 걸었다. 이명헌과 내가 엉망진창으로 걸었던 등이 약한 바람에도 힘없이 나부꼈다.

 

prodigal night

다른 사람들이 최동오를 어떻게 봤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뿔뿔이 흩어지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촉이 꽤 좋은 편이고, 동시에 사람 보는 눈도 좋았다. 정성구나 김낙수는 내가 이명헌과 현필이 문제로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최동오를 탐탁지 않아 한다거나, 아니면 이명헌의 오른팔 자리를 그에게 뺏겨 배 아파한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최동오는 우리와 동류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익사자의 유품이었다. 익사자의 유품은 대개 가격부터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사람의 유품은 오래된 고급 시계였고, 어떤 사람의 유품은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중저가의 구두였고, 어떤 사람의 유품은 다 헤져 버린 가죽 지갑이었으며, 또 어떤 사람의 유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중에 고급 시계는 이명헌이었고, 중저가의 구두는 정성구였으며, 다 헤진 가죽 지갑은 김낙수였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나였다. 우리는 모두 어떻게든 살아 남아보려던 이들의 발버둥이 실패한 결과였다.

하지만 최동오는 달랐다. 최동오는 변사자의 신원 확인용 소지품에 가까웠다. 우리의 것들은 바닥에 암만 펼쳐 늘어놓는다 한들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최동오의 것은 바닥에 펼쳐 늘어놓는 순간 누군가가 분명히 알아본다. 그게 우리와 최동오의 차이였다. 그리고 이 '누군가가 반드시 알아보는' 변사자의 신원 확인용 소지품은 대개 그것을 알아본 이로 하여금 울분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나는 최동오가 우리를 흩어놓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최동오가 이명헌에게 '혹'처럼 달려오자마자 이명헌은 우리를 제외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 중에서 손을 털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건 김낙수 혼자였는데, 그런 김낙수에겐 가게도 하나 차려줬지만, 그런 의사를 밝히지 않은 나나 정성구에게는 이렇다 할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나는 졸지에 한 순간 백수로 전락했다. 내가 김낙수의 가게에서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문지기 역할을 했던 것은, 그렇게라도 시간을 때우지 않으면 하루가 지독히 길었기 때문이었다. 정성구는 돈을 만질 줄 안다는 이유로 종종 이명헌의 일을 돕는 것 같았지만, 그런 정성구조차도 이명헌이 정확히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몰랐다. 이명헌은 혹을 달고 오자마자 도 사장을 등 졌고, 우리를 쫓아냈다. 김낙수는 제 발로 나갔다고 믿는지, 가게 일에 제법 만족스러워 하는 듯해 보였지만, 가끔 일을 도와준다던 정성구도 나도 이 상황이 퍽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명헌의 일을 돕는 사람 중에는 정성구 말고도 정우성도 있었다. 정우성은 이명헌의 일을 돕고 나면 김낙수의 가게에 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는 했는데, 그마저도 두루뭉술하거나 정말 하는 일은 그게 아닐 것 같은 느낌만 풀풀 풍기는 이야기였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돈 많은 사람들이 파티를 연'다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나올 수 있을 만한 수익이라 함은 '약' 밖에 없었다. 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약을 판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것보다야 더 가격을 높게 쳐서 팔 수는 있었겠지만, 이명헌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고객들이 약을 구매해 본 경험이 이명헌에게만 있는 게 아닐 테니 그렇게 높게까지 부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애당초, '약' 사업은 도 사장 밑에서 도망쳐 나오면 새로 돈을 벌기 위해 할 만한 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지워졌다. 요새는 약을 만드는 사람들도, 파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져서, 약의 순도도, 수익성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약' 사업을 이명헌이 굳이 우리를 다 제외하고 할 리가 없었다. 나만 하더라도 도 사장 밑에서 주로 하던 일 중의 하나가 약쟁이들 찾아가 밀린 돈 받아오기였는데, 그들의 습성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있는 전문가를 근처에 두고 혼자 일을 할 만큼 이명헌은 머저리가 아니었다. 정우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알 만한 것들이라곤 사업장이 '배'라는 점과 '돈 많은 사람들'이 주 고객이라는 점이었다. 그 고객들이 파티를 여는 게, 과연 이명헌에게 어떤 수익을 가져다줄까.

나는 이명헌이 숨기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명헌은 비가 오는 날이면 장사를 못한다면서 김낙수의 가게에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최동오도 꼭 같이 나타났다. 동시에 나타난 것은 아니고, 둘의 시차가 한 시간 정도 있었다. 매번 똑같이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나니, 오히려 수상했다. 최동오는 제법 우리 사이에 섞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그것을 달갑지 않아 하는 쪽은 정작 내가 아니라 이명헌이었다.

김낙수는 이명헌이 오는 날이면 항상 백객의 문을 닫았는데, 그것도 매일 같이 비가 내리는 본격적인 장마에 접어들면서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매일 장사를 안 할 순 없었을 테다. 이명헌도 그걸 아는지 매번 바 테이블에 앉던 것을 구석진 자리로 옮겨 나름 손님인 척 가장을 하기 시작했고, 최동오도 그 손님의 일행인 척 이명헌의 맞은편에 따로 앉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던 날, 밤 9시가 되어가는데 한 팀도 들어오지 않아 오늘 장사를 접을지 말지 김낙수가 고민을 하기 시작할 때 쯤 백객의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이 하나 있었다. 목재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성인 여성의 얼굴을 딱 가리는 높이의 짧은 커튼을 손으로 걷어내며 들어온 그 손님은 김낙수를 보더니 붙임성 좋게 말을 붙여왔다.

"사장님, 비 오는 날에는 장사 안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 때 김낙수가 있는 사회성 없는 인성 다 끌어다가 손님을 응대하는 걸 지켜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 손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혼자 와서 치킨 가라아게를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셨다. 치킨 가라아게 한 접시와 김낙수가 서비스로 준 새우튀김 세 피스까지 깔끔하게 비워낸 그 손님은 계산하고 나갈 때, 또 김낙수를 향해 '사장님'이라 부르며 말을 붙여왔다.

"비가 와서 요새는 손님 많이 없겠다, 그쵸, 사장님."

김낙수는 포스기 앞에서 계산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도 손님 없었으면 장사 일찍 접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럼 제가 오늘 사장님의 조기 퇴근을 실패하게 한 거네요."

손님의 농에 김낙수는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사장이 일찍 들어간다고 뭐 좋나요."

김낙수의 대꾸에 그 손님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장사가 잘 돼서 늦게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다고, 김낙수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장맛비는 끊길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고, 김낙수는 손님이 나가고 난 뒤에 백객의 문에 달린 'open' 팻말을 뒤돌려 'close'로 만들었다. 정성구가 손님이 더 올 수도 있는데 왜 닫냐며 김낙수를 가볍게 타박했고, 김낙수는 이제는 쥐새끼도 안 올 시간이라며 칼같이 받아쳤다. 김낙수의 백객은 결국 우리들의 아지트로 전락해 버리는 거냐며 정성구가 장난을 치는 사이, 이명헌과 함께 다른 테이블에 떨어져 앉아있던 최동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낙수가 사장이면 난 뭐야? 여기 가게 명의는 내 거잖아."

그랬다. 이 땅도, 이 건물도, 이 가게의 사업자등록증도 다 최동오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꼭 지금 말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름 좀 빌려줬다고 이 가게에서 꼭 한 자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계약서를 쓰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그 말에 내가 다 기분이 상했다. 김낙수가 사업자등록증 신청하려고 다 늦은 출생 신고를 하러 갔다가 본인이 본인이라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말에 속수무책으로 돌아와야 했다는 걸 최동오가 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성구는 묘하게 내 분위기를 읽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수습에 나섰다.

"글쎄, 그러면 뭐라고 하냐. 명의는 동오 네 거고, 일은 낙수가 하는데, 낙수가 사장이니까, 회장? 회장 쯤 되려나?"

정성구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혼자 답했다.

"그래, 사장 위에 회장이니까, 회장 쯤 되겠다. 최 회장인 거네."

제게 직함이 주어진다는 게 제법 맘에 들었는지 올라가던 최동오의 입꼬리가 '최 회장' 소리에 일순 굳었다.

"회장은 별로. 회장 말고 다른 거 또 뭐 있지?"

최동오는 회장, 사장, 전무, 상무, 이사 같은 직함들에 제 성 씨를 붙여 하나하나 발음해 보다가 '최 실장'에서 멈추었다. 이유는 제가 낙하산으로 제 할아버지의 기업에서 잠시 일을 했을 때, 제 직함이 '실장'이었기 때문에 그 직함으로 불리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줄줄 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김낙수는 생각보다 이런 상황에 유연했다. 최동오의 말에 '보통 드라마 같은 거에서 재벌 3세는 '실장'이 아니라 '본부장' 아니냐'고 물었다. 최동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도 모른다는 그 얼굴에 절로 비웃음이 샜다. 정성구는 무슨 미취학 아동의 고집을 달래는 것처럼 '그래서 최 실장이라도 하겠느냐'고 물었고, 그제야 모든 상황을 관망하던 이명헌이 나섰다.

"니가 여기서 그런 걸 왜 해."

이명헌의 말도 날카로웠고, 눈도 매서웠다. 나는 이명헌이 그렇게 나오자, 갑자기 흥미가 막 일었다. 제 손으로 데려왔지만, 우리와 한데 묶어두고 싶지는 않은 것 같은, 그 묘한 기미가 읽혔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뭘까, 싶어 의자를 돌려 넷이 있는 쪽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제법 기분 나쁠 법한 말에도 김낙수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뒷정리를 마저 했고, 최동오도 별로 타격은 없어 보였다. 정성구만 사이에서 쩔쩔거리며 '웃자고 하는 얘기 아니겠냐'며 이명헌을 달랬다. 이명헌도 분위기를 맥없이 끊어둔 게 미안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김낙수가 이제 사장 소리도 듣는다며 하는 말에 김낙수는 가게 연 지가 벌써 3개월이라며 들을 때 됐다고 받아쳤다. 최동오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이명헌을 중심으로 옮겨져 있었다. 최동오가 정말 이 가게에서 한자리를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사장 소리를 들은 김낙수를 한 번 놀려보고 싶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자신이 만들어 둔 분위기를 맥없이 끊었는데도 최동오는 불쾌하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얼굴 위로 띄우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몇 번 눈을 끔뻑거리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그들이 하는 대화에 말을 얹었다.

"서당 개도 3개월이면 풍월을 읊는대잖냐."

"3년, 동오야. 3년."

"3년이면 사장 소리가 너무 이른 거 아냐?"

최동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어냈다. 사이에서 쩔쩔 매고 불편해하던 정성구도 가볍게 농담 따먹기를 하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이 해프닝으로 보건대, 이명헌은 최동오가 우리 사이에 깊게 엮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진짜로든 가짜로든 가게에는 있지도 않은 '실장' 자리를 최동오에게 내어준다고 한들, 최동오의 입지나 지위가 변치 않을 거라는 건 너무 명백했음에도 이명헌의 반응은 과민했다. 누가 봐도 오늘 얘기해놓고 내일이면 다 까먹을 이야기였음에도 그랬다. 어쩌면 이명헌이 최동오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다 배제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동오를 우리와 하나로 묶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다르게 말하면 이명헌에게 최동오가 특별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장마가 끝나고, 이명헌이 다시 우리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최동오도 보이지 않았다. 백객에는 고급 안주를 요리할 주방장이 고용되었다. 김낙수는 그를 무어라 부를지 고민하다가 끝내 최동오에게 주지 못했던 '실장'이라는 직함을 그에게 주었다. 이제 백객에는 사장 김낙수와 주방을 책임지는 '조 실장'과 문지기나 마찬가지인 내가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백객은 6개월 차가 되었고, 이제는 제법 단골도 생겼고, 입소문을 탔는지 전보다 꽤 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문지기로 있을 필요가 없이 젊은 여자들을 뒤따라온 늙은 파리들은 자리 하나 차지 못할 정도로 북적거렸고, 그 덕에 나는 김낙수를 도와 백객에서 종업원 일을 시작했다. 겨우 내 손 만하거나 내 몸의 반의반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접시들을 들고 나르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하염없이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것보다는 확실히 괜찮았다. 어릴 적부터 몸을 쓰고 돈을 벌어온 탓에 이렇게라도 몸을 쓰지 않으면 좀이 쑤셨다. 손님이 많아지고 일이 늘어나면서 김낙수는 정기 휴무일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이미 백객과 같은 부류의 업장을 여러 번 거쳐온 조 실장은 화요일이나 수요일처럼 매출이 제일 낮은 날로 정기 휴무일을 많이 갖는다고 충고도 해주었다. 일단 무엇보다 쉬는 날에는 무조건 그날 치의 돈을 벌지 못하는 거라 쉬는 날 없이 일해 온 나와 김낙수에 비해 조 실장은 주에 하루 이틀은 꼬박꼬박 쉬어오던 일반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조 실장을 위해서라도 백객에는 정기 휴무일이 필요했다.

백객의 정기 휴무일은 매주 화요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은 백객에 정기 휴무일이 생긴 첫날이었다. 김낙수는 자신을 데려다 키운 정 씨 아저씨의 제사를 지낸다고 했고, 나는 그간의 피로를 풀기 위해 하루를 온종일 쉬는 데에만 쓰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주 가던 대중탕에 들러 사우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초저녁부터 일찍 잠이 들었다. 도 사장 밑에서 일할 때에도, 지금에도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하는 생체 리듬 탓인지 일찍 잠이 든 게 무색하게 새벽 세 시쯤 눈이 뜨여졌다. 김낙수나 정성구에게 연락을 돌려 보았지만, 다 연락이 닿지 않아 집에서 티비를 틀고 채널이나 돌리고 있는데 정우성에게 연락이 왔다. 근 2주 만이었으니 꽤 반가운 연락에 어쩐 일이냐 물으며 운을 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만큼 밝지 않았다.

정우성은 그 새벽에 대뜸 나 보고 자기를 좀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 어디냐 물어보니 충남 보령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집이 시흥이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에 헛웃음이 절로 났지만, 정우성의 사정은 웃을 만한 사정이 아니었는지 답지 않게 올 수 있냐 없냐만 계속 되물어 보았다. 결국 정우성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그 새벽에 2시간 가까이 달려 보령에 도착했을 때 정우성의 몰골은 처참했다. 평소에 잘 입고 다니던 옷들은 어쨌는지, 누가 봐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차림새였다. 일단 바지 기장이 발목 위를 다 드러내고 있는 게 제일 이상했다. 이제 가을이라 새벽이 서늘하기는 했지만 오들오들 떨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우성은 나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떨고 있었다. 정우성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우성은 내 차 보조석에 앉고는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운전하는 사람 옆에 두고 뭐 하는 거냐 물으니, 내 말엔 대답을 않고 정우성이 갑자기 도 사장 이야기를 꺼냈다.

"형, 요새 도 사장한테 연락 온 적 있어요?"

"내가 그 인간이랑 연락을 왜 해?"

"아니면 뭐, 요새 도 사장이 다시 움직인다거나 그런 얘기 들은 건요?"

"이제 그 쪽에 발 담근 사람이 없는데 그런 걸 내가 어디서 들어."

"시발, 그럼 누구지."

정우성은 아주 불안한 사람처럼 다리를 달달 떨었다. 도 사장 밑에서 일하면서 여성 타겟에게 작업칠 때마다 없어선 안 될 무기라고 자랑하던 손도 얼마나 뜯어댔는지, 아주 그 꼬락서니가 볼 만 했다.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정우성은 아니라고 대답할 뿐 이렇다 할 말을 해주지 않았다. 상황도 모르고 새벽 나절부터 운전기사가 되어 보령에서 정우성의 집이 있는 광명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우성은 차에서 내리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다음에 백객에 놀러 오란 말에 정우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럴게요.'라며 께름칙하게 대답했다.

 

그 일이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이명헌이 매일 같이 백객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한 시간 텀을 두고 이명헌을 따라오는 최동오가 없는 걸 보면서, 우리는 모두 이명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지만, 이명헌이 아무것도 말을 해주지 않는 탓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일'이라는 건 이명헌이 아니라 최동오에게 일어난 게 분명했지만 둘이 계속 같이 일을 하고 다녔으니 최동오에게 일이 생긴다는 건 이명헌에게도 생긴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우리는 '이명헌에게 뭔 일이 났'다고 말을 했다.

정성구가 일하는 날이 늘어나자, 김낙수가 정성구에게 최동오의 행방을 물었다. 정성구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정성구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한 달 째 연락이 두절된 정우성이 떠올랐다. 정우성이 자길 보령으로 데려와달라고 한 이후로, 도 사장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정우성의 연락이 뜸해진 뒤로, 우리는 요새 연락 안 되는 거 다 도 사장 때문 아니냐면서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정우성은 단순히 몸을 사리느라 연락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정성구의 말을 듣는 순간,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둘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정우성을 찾으면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력이 쇠한 약쟁이들을 찾아내는 것과 사지 멀쩡한 정우성 하나를 찾아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어디 갈 만한 데도 짚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정우성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누군가의 기억에 쉽게 남을 만한 외모였음에도, 누구도 정우성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우성의 흔적을 한 톨도 찾지 못할수록, 정우성을 찾아야만 뭔가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직감이 강렬해졌다. 나는 방법을 찾다가 찾다가 결국 현필이에게 SOS를 쳤다. 현필이도 정우성이랑은 잘 지냈으니까 뭔가 소식을 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현필이가 정우성의 주소를 찾아봐 주길 바랐다. 현필이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정우성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직접 내 입으로 현필이에게 부당한 부탁을 해야만 했다. 정우성의 주소를 알아봐 달라는 말에 현필이는 월요일에 찾아봐 준다며,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월요일 아침 9시가 될 때까지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번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번복하지 않았다. 정우성을 찾아야만 했다. 정우성을 찾아야 이명헌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었다. 현필이 찾아본 바에 의하면 정우성의 서류 상 주소는 '충남 보령'이었다. 그 지명을 듣는 순간, 나는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새벽의 일이 떠올랐다. 정우성은 자기를 데리러 와달라 불러놓고 '도 사장'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때는 혼잣말처럼 뱉어져서 크게 신경 안 썼던 말이 떠올랐다.

'시발, 그럼 누구지.'

정우성은 그날 누군가를 만난 게 분명했다. 나는 현필이가 알려준 주소를 받아 적고, 일단 보령항으로 먼저 향했다. 낮에 가서 본 보령항은 사람이 배를 타는 항구가 아니었다. 화물 컨테이너를 싣고 나르는 선박들의 항구였다. 보령항 근처에는 사람보다 화물이 더 많이 보였다. 실제로 내가 본 사람의 머리보다 화물 컨테이너가 더 많았다. 나는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정우성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그런 사람은 여기서 본 적 없다는 말이 끊이질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내게 사람을 찾으려거든 대천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사람이 드나드는 곳은 그 쪽이라면서 말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대천항으로 가기 위해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대천항으로 가기 위해 돌아나가는 길목엔 컨테이너가 가득했다. 이렇게 컨테이너가 가득한 곳에서 정우성은 대체 누굴 만난 걸까. 지도 속의 보령항처럼 내 머릿속도 뿌옇게 아득하기만 하고 뭐 하나 선명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류상으로 정우성이 산다는 그 섬에는 정우성이 없었다. 정우성 같은 훤칠한 총각의 존재에 대해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두어 명 정도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그렇게 들여다봐 놓고 한다는 말이 '연예인이냐'는 질문이었으니 영양가 있는 관찰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뭐 하나 명확한 게 없었지만 나는 내 촉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백객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명헌을 추궁했다. 이명헌은 내가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 마디를 하지 않았다. 답답함에 절로 큰 소리가 났다. 이명헌이 큰 소리에 겁을 먹고 뭔가를 실토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이 꽉 막혀 내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 나는 이명헌에게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도 이명헌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정우성을 찾지 못했고, 오히려 시간이 몇 달이나 더 지난 뒤에 정우성이 나를 찾아왔다. 죽다 살아난 거라고 좀 반겨달라 말하는 정우성을 나는 영 반길 수가 없었다. 정우성은 혼자서 막 분위기를 유쾌하게 띄워보려는 사람처럼 애를 쓰다가 이내 제대로 웃지 않는 내 얼굴을 마주하고는 그 모든 것을 멈추었다.

"뭐냐."

"뭐긴요. 도 사장이지. 그거 알아요? 최 회장이 최동오 뒤에 사람 붙인 거?"

최 회장이라고 하면, 도 사장과 아주 오래 거래를 해 온 석호그룹의 총수이자 최동오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정우성은 그간 있었던 일을 내게 알려주었다. 시작은 내 예상대로 보령항으로 나를 불러낸 날이 맞았다. 원래 이명헌은 인천항 근처에서 일을 하는데, 그날은 대천항 근처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 누군가 붙은 것 같아서 보령항까지 빠진 것이고, 그 사람을 따돌리기 위해서 나를 불러냈다는 게 정우성의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도 사장 쪽 사람인 것 같아서 몸을 숨기고 다녔는데, 얼마 안 가 덜미를 잡혔다고 했다. 정우성은 최 회장이 최동오 뒤에 사람을 붙인 탓에, 제가 이명헌의 일을 도운 게 발각됐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우성의 꼬리가 너무 길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딱히 그것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근황이랍시고 전달하는 이야기들이 하나도 반갑지 않아서 한 번 구겨진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정우성은 그 날 자리를 파하기 전에 그런 말을 했다. 이 판은 최동오가 짠 판이고, 우리는 최씨 집안 기 싸움에 등이 터져나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가볍게 흘려들었다. 최동오가 어떤 판을 짤 만큼 머리가 좋다고 생각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최동오는 너무 순진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우리의 등이 터져 나가는 판을 짠다면, 그건 최동오가 아니라 이명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우성을 만나서 그런가, 오랜만에 백객에 가고 싶었다. 이명헌과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서서히 백객에 발길을 끊었던 탓에 몇 개월 만의 방문이었다. 이명헌을 더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고, 김낙수가 애지중지하며 굴리는 백객의 영업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절로 내가 스스로 백객에 오지 않게 되었다.

백객은 큰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주택가 방향으로 15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걸어 들어가는 길목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두 개 있었고, 그 언덕 두 개를 넘으면 그보다 경사가 훨씬 높은 오르막길이 있었고, 그 오르막길을 다 오르고 나면 보이는 건물들 중에 왼 쪽에서 두 번째 건물이었다.

이제는 김낙수에게 묻지 않아도 몸으로 다 외워버린 길을 걷다가 멈추었다. 백객에 매일 같이 달려 있던 등이 엉망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등이 내는 빛은 전처럼 따뜻한 노란색이 아니었다. 빛이 약해서 흰색처럼 보이는 건가 싶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나는 그 빛의 색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빛이 약하긴 했으나, 그것은 명백한 흰색이었다. 노르스름한 기운이 전혀 없고, 오히려 푸른 기운이 담긴 흰색. 나는 그 허연 등을 보며 몇 개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죽으면 여긴 어떻게 돼?'

'저 앞에 등이나 하나 달아줄게, 흰색으로.'

'하나만 알아둬요. 이 판은 이명헌이 짠 게 아니고, 최동오가 짠 거예요. 우리는 지금 최씨 집안 기 싸움에 등 터져 나가는 중이라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 등을 보면서 정우성이 했던 말을 같이 떠올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들을 곱씹으며 백객의 문을 열었다.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할 김낙수는 보이지 않고, 조 실장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조 실장은 나를 보더니 머뭇거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시네요. 나는 가게를 둘러보며 김낙수의 행방을 물었다. 조 실장은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물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 언제 오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는 말 사이의 텀으로 보아하니, 조 실장이 하는 말은 김낙수가 오늘 안에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매번 앉았던 그 자리의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불 때면 나부끼는 흰 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등을 보며 최동오를 처음 본 순간이 떠올랐다. 최동오는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을 짓는데,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 '불법적으로' 충분히 현금화할 수 있는 것들이 가득 담긴, 제 하반신 보다 조금 작은 28인치 캐리어를 열어 우리에게 그 속을 보여주었다. 그런 최동오를 보면서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이질감, 그리고 불안한 예감이 다시 한 번 살아났다.

최동오는, 끝내 우리를 흩어놓았다.

 

empty dream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최동오가 가져온 것들을 현금화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뚫어놓았던 거래처들을 찾아가 최동오가 가져온 것들을 현금으로 바꾸었다. 개 중에는 최동오가 가져온 것의 진가를 알아보고 나에게 어디서 났냐며 음흉하게 물어보는 노인네들도 있었다. 나는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그 상황을 무마했지만, 찝찝하기는 여전했다. 이명헌이 가끔 엉뚱한 짓을 하는 일이야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 일을 수습하는 것도 이명헌이었기에 별 다른 말을 얹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이명헌이 했던 모든 일들은 이명헌이 했다고 하면 대부분 납득이 됐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이명헌이 했다는 게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겠는가. 같이 일을 할 거라는데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명헌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통솔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도 사장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으니, 그 쪽과도 어느 정도 협의가 되었겠거니 생각했다는 쪽이 더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일들을 납득하기 위해, 나는 내가 모르는 상황들이 이미 다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명헌이 최동오가 가져온 것들을 현금화해서 도 사장 밑에서 도망쳐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현철이야 이런 쪽으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명헌이나 김낙수가 도 사장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나 김낙수는 몇 번이나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 온 전적이 있었으므로,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이 일에 딱히 만족하지도 않지만, 그나마 이들 중에 사회에 발가락이라도 담가본 나로서는 사법 체계의 사각지대에 있다 뿐이지, 이 정도면 제법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이 언제나 내 뜻대로 굴러간 적 없었고, 그럴 때면 '이번엔 또 이렇게 어그러지는 구나.' 생각하며 그때마다 어그러지는 대로 인생을 살았지만, 이번엔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이명헌이 도 사장 밑에서 일하는 걸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걸 직접 행동에 옮길 줄이야.

물론 이명헌 혼자 그린 판은 아니었다. 이명헌은 철저히 숨겼지만, 이명헌도 결국 판 위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원래 이런 판을 돈을 쥐고, 준 자가 플레이어다. 예를 들자면, 의뢰인이 도 사장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키면, 도 사장이 판을 짜고, 그 판에 우리를 투입 시키며 우리에게 돈을 준 것과 같은 이치였다. 우리는 도 사장이 짠 판 위에서 기고, 뛰고, 날아서 도 사장이 원하는 대로 승리를 가져다줘야 하는 장기 말이었다. 이명헌은 최동오를 데려옴으로써, 장기 말이던 본인의 위치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명헌은 장기 말 중에서 역할이 바뀐 것뿐이었다. 졸병에서 왕으로 말이다. 어쩌면 졸병이 아니라 장군이었을지도 모르나, 이러나저러나 장기 말 사이에서 역할이 바뀐 게 어디랴. 이명헌이 왕으로 승급하면서 졸지에 나도 더 높은 직급으로 승급할 수 있게 되었다. 장군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왕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내바쳐야 한다는 게 이 위치의 가장 큰 단점이었지만, 그 정도는 감안할 수 있을 정도였다.

 

최동오는 제일 먼저 돈으로 부검 결과서를 조작했다. 최현호 부장 판사의 직접 사인은 '급성 심장마비'이며, 사망 추정 시간은 '22시에서 24시 사이'로 결론이 지어졌다. 부검 결과서가 이렇게 되면서 이명헌이 최현호 부장 판사를 만났을 때에는 최현호 부장 판사가 이미 사망해 있던 게 되어버렸다. 이명헌이 찾아간 건 최현호 부장 판사가 사망한 날 다음날 02시였기 때문이다. 의뢰인은 어쨌든 타겟이 죽었기 때문인지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나, 도 사장은 의뢰인이 의뢰한 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았음을 빌미 삼아 이명헌을 내치려고 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박현교를 시켜서 말이다.

하지만 박현교가 숨어 있던 이명헌의 집에서 이명헌이 아니라 최동오가 습격을 받으면서 판도가 뒤집어졌다. 그 결과, 박현교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상해죄로 징역을 살게 되었고, 도 사장은 왼팔을 자르려다가 오른팔까지 잘라낸 격이 되었다.

도 사장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도 사장이 그렇게 끔찍하던 이명헌을 쳐내려 했다고, 물갈이를 하려는 것 같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박현교가 있었던 오른팔 자리도 일시적으로 공석이었으니, 누가 먼저 시작할 건지 서로 간을 보는 눈치싸움은 하루를 가지 못했다. 한 번 세력 다툼이 시작된 뒤로는, 뻑하면 칼부림이 나기 시작했다. 이명헌은 똑똑했다. 똑같이 칼부림으로 도 사장의 목을 치는 대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자취를 감추어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어제는 누가 당했고, 오늘은 누가 당했고, 내일은 누가 당할 거란 얘기가 파다한 바닥에 이명헌 하나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고 해서 수상히 여길 사람은 없었다. 여기 바닥이 다 의리니, 충성이니, 하는 것들로 생태를 지키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 언젠가 저 윗대가리의 목을 쳐서 제가 앉을 생각만 그득한 바닥이었다.

오른팔이었던 박현교는 학교에 들어가 버렸고, 왼팔이었던 이명헌은 자취를 감추었다. 도 사장만 남았다. 과연 여기서 오른팔, 왼팔의 자리로 만족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도 사장이 몸을 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중에 이명헌에게 물으니, 이명헌은 도 사장이 자길 쳐내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도 사장이 지시한 의뢰가 뒤탈이 나기 딱 좋은 형태에다가, 금액이 다른 것들의 두 배는 되는 걸 보면서 자칫 잘못하면 제가 다 뒤집어쓰겠다고 짐작했다고 했다. 이명헌에게 최동오는 그러니까, 일종의 도망갈 퇴로였던 셈이다. 자신을 잘라내려는 도 사장으로부터 도망갈 퇴로.

 

최동오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활용하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부터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들까지 완벽하게 이용했다. 둘이 시작한 새로운 사업은, 그런 최동오의 센스가 100% 발휘되는 사업이었다. 시작은 요트 선상 파티였다. 그렇게 고정적인 주 고객층을 끌어 모으고, 그 다음엔 몸집을 불려 파티 장소를 요트에서 유람선으로 변경했다. 갑판 위에서는 요트에서처럼 선상 파티가 이루어지고, 갑판 아래에서는 '물건'들이 옮겨졌다. 갑판 위의 사람들이 각종 서류 절차를 밟는 동안 갑판 아래의 물건들은 수하물이나 화물로 분류되어 이리저리 옮겨졌다. 이것이 둘이 하는 새로운 사업의 모델이었다.

둘이 옮기는 '물건'의 종류는 퍽 다양했다. 그중에 가장 돈이 많이 되는 건, 역시 '생물'이었다. 개 중에 가장 특이했던 건 어떤 '거북'이었다. 사람을 물어뜯을 만큼 공격성이 높고 치악력이 좋다는 그 물건들이 어떤 수요가 있는지 둘의 유람선 갑판 아래에 태워진 적이 있었다. 이명헌은 그것을 들여와 달라 요청한 사람에게 넘겨주며 그런 애들은 얼마나 하는지 물었다. 그때 이명헌에게 그 '거북'들을 배송 받은 이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부르는 게 값인 그 애들을 이명헌은 두 마리나 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기엔 비좁은 수조에 그들을 가뒀다. 수조 안에 갇힌 거북들은 행동에 제약을 받자 예민해져 공격성이 날로 높아졌다. 이명헌이 놀자고 집어넣은 나무젓가락들을 몇 개씩이나 해 먹었다. 이명헌은 와작, 소리를 내며 힘없이 그 치악력에 짓이겨지는 나무젓가락을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애완동물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이명헌 살갗에 붙어 있는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북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결국 그 거북들이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어서 안 좋은 끝을 봤겠거니 생각했다.

 

최동오는 이명헌이랑 일을 하면서도, 주에 한 번은 꼭 자리를 비웠다. 어딜 갔냐고 물으면 이명헌은 모른다고 했다. 이 바닥에서는 모르는 게 많을수록 하위 서열이었다. 우리가 도 사장 밑에서 일할 때, 도 사장의 의뢰인이 타겟을 왜 처리해 달라고 하는지 우리는 한 번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었다. 그건 우리가 도 사장과 도 사장의 의뢰인들보다 하위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나가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처리해 주었다.

도 사장이 하는 일은 그럴싸하게 말하면 '해결사'였고, 사실대로 말하면 '돈 많은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심부름센터'였다. 돈은 많고, 손에 피 묻히기는 싫은 이들 대신 돈을 받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다 해주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몇몇 사건에는 '도 사장'의 이름도 얽혀 있기도 했다. 그런 도 사장이 물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최 회장 때문이었다. 도 사장의 뒷배가 바로 석호그룹의 총수인 최석중 회장이었다. 반대로 최석중 회장의 검은 힘은 도 사장이었다. 그런 상생 관계를 이 바닥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도 씨 부자는 최 회장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게 땅을 개간하는 사람들이었다. 최 회장은 도 씨 부자가 개간한 땅을 밟아 그 자리에 올랐다. 최 회장은 도 씨 부자가 개간해 번 돈의 일부를 이용해 도 사장의 뒤를 봐주었다. 최 회장은 도 사장의 '불법 해결사' 노릇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눈에 걸리적거리는 건 꼭 치워야 하는 성미인 주제에 피를 묻히기는 끔찍이 싫어하는 최 회장 같은 사람들에게 도 사장은 어쩌면 꼭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최 회장도 그렇게 도 사장을 통해 눈에 걸리는 것들을 뿌리째 뽑아냈다.

최 회장이 도 사장의 힘을 이용해 눈에 걸리는 것들을 치워낸 것 중에는 그의 자식인 최현호 부장 판사도 있었다. 최현호 부장 판사는 최 회장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최 회장 스스로가 인생을 좀 더 편히 영위하기 위해 법조계에 심어둔 심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최 회장은 자신의 슬하에 있는 네 남매 중 셋을 법조계와 언론계, 정치계에 하나씩 심복처럼 심어두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힘이 좋은 것이 바로 학연, 지연, 혈연 아니던가. 각종 연으로 되지 않는 건 돈으로 해결하고자 했고,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건 연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최 회장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실제로 최 회장은 자신이 심어둔 심복인 자식의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하지만 똑같은 씨를 받고, 똑같은 배에서 나,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돌연변이는 하나씩 있기 마련이었다. 그게 최현호 부장 판사였다. 집에서 시키는 결혼에 응하지 않은 건 기본이며, 최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조인이라고 제 아비를 가르쳐 들려고 하는지' 최 회장이 불법적인 일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부딪쳤다고 했다. 그런 자식이 정치를 하려는 것 같다는 소식이 항간에 도니까 최 회장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동오도 가정환경이 불우하기로는 우리랑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 정의로운 탓에 아비의 눈 밖에 난 아들의 자식이었으니, 그 삶이 외줄 타는 곡예와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집안의 실권자인 조부를 따르자니 매일 마주치는 아버지와 불편하고, 매일 마주치는 아버지를 따르자니 집안의 실권자를 대놓고 등을 지는 격이었다. 종국엔 눈 밖에 나다 못해 그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것까지 보았으니, 나는 최동오가 정신병에 걸리지 않고 여태 살아 있는 걸 보면 보통 독한 새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현철은 최동오가 순진해 빠져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게 최동오의 생존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최동오의 순진함은 자신의 위치를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순진함이었다. 나는 이렇게 어리석고 나약하니, 나를 쳐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는 걸 스스로 광고하는 꼴인 셈이다.

 

장마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유람선은 잠정 휴업에 들어섰다. 최동오와 이명헌이 일을 쉬게 되면서, 나도 일을 쉬게 되었다. 모아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의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모아둔 돈으로 생활한다는 건 남은 돈에서 미래를 계산해야 한다는 점에서 피곤했다. 그리고 우리처럼 수입이 일정치 않은 사람들은, 일을 한 번 쉬면 그에 몇 배에 달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도 사장 밑에서 일할 때 뼈저리게 배운 게 그것이었다. 쉬는 동안에도 이자는 불어나, 다시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에는 전보다 더 많은 돈을 이자로 내야 했다. 우리가 도 사장 밑에서 길게는 십몇 년, 짧게는 오륙 년을 묶여 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일정하지 않은 수입과 한 번 쉬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가 족쇄처럼 도 사장 밑에 우리를 묶어 두었다. 이 족쇄를 끊어내거나 벗어나는 방법은 일확천금 밖에 없었다. 우리의 일확천금은 최현호 부장 판사였다. 그 일이 어그러지면서 최동오가 이명헌이랑 손을 잡았고, 도 사장은 힘을 잃고 몸을 사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최동오는 이명헌의 손으로 우리한테 달린 족쇄들을 다 끊어주었다. 이명헌은 이것을 비밀에 부치고 싶은지, 우리에게 평범하게만 살라고 했지만, 사실 도 사장이 우리를 다시 찾아와 우리의 발에 족쇄를 채울 명분은 이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 사장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상하 종속관계가 아니라 '동업자'로서 일을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제안이었다. 지금 도와주고 있는 유람선 사업은 장마철 비 때문에 일을 쉬고 있어 수입이 없었고, 도 사장은 언제나 단기성 작업을 많이 했으니 나에게는 잠깐 끊긴 수입을 메워줄 좋은 구실이었다. 도 사장이 제안한 일은 역시나 항상 해오던 '불법 해결사' 부류의 일이었고, 도 사장은 제안을 받아들인 내게 의뢰인을 같이 만나러 가자고 했다. 동등한 동업자 관계가 되니 가능한 일이었다.

도 사장은 의뢰인을 만나러 가는 날, 내게 '정장'을 입을 것을 요구했다. 의뢰인들이 까탈스럽고 따지는 게 많기 때문에 격식을 차려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도 사장 밑에서 일할 때 구비해 둔 값 비싼 정장 셋업을 차려입었다. 오랜만에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리고, 거기에 더해 넥타이까지 꽉 죄어 메니 영 답답한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차려입고 도 사장을 따라간 곳은 석호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최 회장과 도 사장, 그리고 나는 최 회장 만이 쓸 수 있다는 가장 최고층의 스위트룸에서 만났다. 가벼운 사담을 하고, 최 회장이 좋아한다는 값 비싼 양주를 나눠 마셨다. 고가의 술에 대해 극찬을 하는 최 회장의 모습에서 나는 백객에서 김낙수가 전시용으로 사들인 고급 사케들만 꺼내어 마신 최동오의 모습을 보았다. 최동오는 제 아비보다 제 조부를 더 닮은 것 같았다. 최 회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최현호 부장 판사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제가 죽였다고는 하나, 제 아들이기는 했던 이에 대해 최 회장은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제법 역했으나, 나도 만만치 않게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 적당히 따라 웃었다. 도 사장과 나는 동업자였으나, 최 회장과 나는 상하 관계였다.

 

최 회장은 나에게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다며 그날의 만남을 흡족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날은, 일을 하기 위해 내가 적합한 사람인지를 시험하는 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최 회장으로부터 따로 연락을 받은 건, 장마철이 다 지난 이후였다. 따로 만나 할 이야기가 있어 차를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 인천항에 있지도 않았고, 내 집에서 이명헌이 부를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별 의심 없이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를 태운 차는 서울이 아니라 보령으로 내려갔다. 서울로 가지 않느냐는 말에 기사는 보령에 최 회장 별채가 따로 있다며, 최 회장과 일하는 사람은 다 보령에서 만난다고 일러주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나는 최 회장이 직접 연락을 해왔던 것을 떠올리며 애써 불안함을 가라앉혔다. 차가 세워진 곳은 인적은 드물고, 화물용 컨테이너가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 별채가 있냐고 묻기도 전에 기사는 내게 석호 그룹에서 운영하는 조선소 근처에 별채가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고, 마른 기사의 뒤를 쫓아가면서도 주위를 확인했다. 조선소 근처라고 하는데 컨테이너 뒤로 파도 치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나는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보다 앞서가는 작은 체구의 기사의 뒤를 치고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나의 살길이라고 생각했으나, 화물 컨테이너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가로등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이 곳에서는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나는 기사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는 것을 택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체구가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성인 남성의 평균 키보다 20센티미터는 더 큰 키에 덩치도 왜소하지 않았으므로, 누군가가 나를 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쪽수에는 속절없었다. 게다가 이 바닥 인간들은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무기처럼 휘두르기 때문에, 다수에 대항하여 이긴다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정신 차렸을 때, 나는 도 사장 앞에 가 있었다. 

"성구야. 월정당에 물건 가져다 팔았다며, 박 사장님한테 전화 왔다."

월정당 박 사장은, 내가 가져간 물건이 어디서 났는지 집요하게 물어봤던 음흉한 노인네 중 하나였다. 안전하고 빠르게 현금으로 바꿀 만한 데가 필요해서, 뚫었던 거래처를 가리지 않고 다녔던 게 문제였다.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그 거래처들을 내가 도 사장을 통해 뚫었다는 걸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명헌이는 요새 최 회장님 손주랑 뭐 하고 다니니."

내가 월정당에 가져다 판 물건의 출처를 밝히기도 전에 도 사장은 이명헌과 최동오의 연관성을 먼저 짚어냈다. 생각해보면, 도 사장에게는 나나 이명헌이나 다 똑같이 돈 주고 키운 새끼들이었다. 돈을 얼마를 줬는지, 어떻게 사는지 사정이 빤한 애한테서 한 번에 거액의 돈이 나왔으니 의심할 만 했지만, 거기서 바로 최동오를 연관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 어쩌면 박현교한테 칼에 찔린 게 최동오였으니까, 그때 이명헌의 집에 최동오가 있었으니까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요새 너네 뭐하고 사는지도 모를까 봐. 낙수는 여전히 칼질하고, 현철이 녀석은 거기서도 문지기나 하더라. 너는 어떻게 할래, 성구야."

나는 지금이야 말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도 사장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추측하는 것은 지금에서는 하등 소용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도 사장이 웬만한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고, 나를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명헌과 가장 많이 일을 한 사람은 김낙수였고, 그다음으로도 신현철이었기 때문에, 도 사장이 둘을 찾아갔다면 도 사장의 소식을 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김낙수나 신현철로부터 내게 온 연락은 최근에 없었고, 백객에서도 도 사장의 이야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정우성의 연락이 끊겼다는 얘기에 우스갯소리로 농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 그 농을 했던 세 사람 모두 속 없이 그 농에 웃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도 사장이 나를 제외한 김낙수나 신현철을 찾아간 것 같지는 않았다.

도 사장은 내게 질문을 세 개 했지만, 하나는 함정이었다. 나는 그 함정이 월정당 박 사장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도 사장이 제일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질문은 두 번째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그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남은 건 세 번째.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 사장은 내게 최 회장이 일을 줬다고 했다. 도 사장은 여전히 우리가 동업자라고 했다. 그러니 동업자로서, 같이 일을 하자고도 했다. 그러면서 내게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다. 도 사장이 아무런 그림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의 빈 종이를 내게 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펜도 내게 쥐여주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이번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처럼 내렸다.

어떻게 하고 싶었냐, 하면 나는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혹시 몰라 모든 것을 기록해 둔 내 자신을 기특히 여겨 칭찬했다. 모두가 나한테 스무 살 다 넘고 이 바닥에 돈 때문에 팔려 왔다고 비아냥댈 때, 나는 스무 살 넘어 이 바닥에 들어온 나는 그래도 이 바닥에 어릴 때 들어온 남들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도 달랐다. 다른 애들이 돈 한 번 못 만져보고 피나 땀 같은 지저분한 것들을 흘리며 돌아다닐 때, 나는 도 사장의 돈을 관리했다. 다른 애들이 어제 무슨 일을 하고, 그제 누굴 만났는지도 모르고 살 때, 나는 내가 한 모든 것들을 기록했다. 대학도 다니다 중퇴했고, 그 덕에 처음 취직한 회사는 시쳇말로 '좆소'라고 할 만큼 작은 회사였지만, 그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배운 것은 딱 하나였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내가 일을 했다는 '물증'이라는 것. 나는 그 회사의 사장이 내 월급을 주지 않고 도망쳤을 때, 내가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했는지 메모한 기록만으로 그 회사의 사장을 협박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작은 중소기업에 멀쩡한 회사원으로 다닐 때도 그랬고, 도 사장 밑에서 일을 할 때도 그랬으며, 지금 최동오와 이명헌의 일을 도와줄 때에도 모든 것을 기록했다.

달력에 적어놓았던 것들을 옮겨적었다. 나는 내가 이명헌으로부터 얼마나 돈을 받았는지, 이명헌이 무슨 얘길 했는지, 내가 내 눈으로 본 것들이 뭐가 있는지 같은 것들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그리고, 눈에 띈 한 가지. '거북'이었다. 최동오와 이명헌이 갑판 아래 숨겨 들여온 것들 중엔, 불법 총기나 마약도 있었지만 내 눈엔 '거북'이 들었다. 최동오가 입을 타격으로 따지면, '거북' 몇 마리 정도 들여온 건 사람이나 장기, 불법 총기, 마약 등을 들여오는 것보다 적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타격이 너무 큰 나머지 최 회장 쪽에서 거절할 게 분명했다. 최 회장과 석호 그룹에까지는 타격이 가지 않지만, 최동오에게는 타격이 갈 수 있을 만한 것. 나는 그게 그 '거북'이라고 생각했다.

 

최 회장과 도 사장은 내가 가져간 것들에 만족스러워 했다.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이고, 도 사장은 박현교를 이명헌 만큼이나 끔찍하게 여겼지만, 이미 잘려 나간 팔을 그리워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칼을 휘두르던 이들을 비웃었다. 박현교가 머무르던 자리가 곧 나에게 넘어오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제 아비와 같은 길을 밟아 나갈 최동오를 애도했다.

그리고 이명헌을 애도했다.

 

the lover

너를 만난 건, 타겟의 집에서였다. 너는 타겟의 외동아들이었으니 그 집에서 만나는 건 일견 당연해 보였지만, 만난 순간을 떠올려 보면 그 순간의 상황만큼은 당연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는 이들의 손은 깔끔하지 못하고 지저분하기만 해, 뒤처리가 더 오래 걸린다는 김낙수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풍경이었다. 타겟 외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는 너라는 불청객이 이미 있었다. 손을 비롯해 옷이며, 얼굴까지 피가 튄 모습으로 책장에 기대어 앉아 있는 꼴이 아주 볼 만 했다. 잘 배운 돈 많은 집 자제들은, 이런 순간에서도 책장에 가 기대어 앉는 구나.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너를 내려다보았다. 타겟이 내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적은 처음이라서, 나도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해 머리나 굴리던 찰나였다. 네가 피 칠갑을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너를 보는 순간, 나는 너의 얼굴에서 열아홉의 나를 떠올렸다.

태어난 이래로 내가 가진 최초의 기억부터 농구공을 잡고 있던 내 앞에 온 집이 난장판이 된 모습을 보여주던 이가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모든 가구가 부서져, 그 잔해로 집안에 발을 딛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집이 풍비박산이 난 상황에서도 나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같은 내 안위에 대한 걱정을 했다. 농구공이 뺏기게 된 건 그로부터 반년 만이었다. 상갓집에 조문 온 조문객들 마냥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이정구를 찾았다. 이정구는 나의 아버지였고, 이정구의 이름 자는 바를 정에, 구원할 구였다. 바르게 타인을 구하고 살라는 기원이 깃든 그 이름의 주인은, 집을 풍비박산을 내고 그 남자들이 다녀간 다음 날, 도망쳤다. 이정구는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자기가 한 평생 책임지며 살겠다고 만든 가정조차 구하지 못해서, 엄마는 외할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도망간 지 오래였다. 집안엔 덩그러니 나만 남아버렸다.

아마 너도 그런 입장이었을 거라고, 나는 멋대로 추측했다.

 

나는 도련님을 혹처럼 달고 돌아갔다. 나를 쫓아오겠다고 나선 도련님은 제 방 옷장 한 귀퉁이에서 28인치 캐리어를 꺼내왔는데, 애들끼리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김낙수의 집에 와서 그 캐리어를 열어보니 금괴부터 보석에, 반지나 귀걸이 같은 비싼 주얼리들이 가득했다. 그런 것들이 28인치 캐리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련님은 그게 제 저금통 같은 거라고 했다. 28인치 캐리어를 저금통처럼 쓰면서 그곳에 각종 현물들을 모아둔 도련님에게서 열아홉의 나를 본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동네에서 작은 사업체 하나를 굴렸던 이정구의 외아들인 이명헌이, 석호 그룹 총수인 최석중 회장의 손주이자 최현호 부장 판사의 외아들인 최동오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그날, 나는 너에게 우리가 모두 살 수 있을 만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을 했었다.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내 말이 너의 기억 속에서 뒤섞였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타겟의 직접 사인이 '급성 심장마비'여서는 안 됐다.

조작된 부검 결과서라며, 내일 경찰에 넘겨져 언론에 밝혀질 부검 결과서도 이렇다고 보여주는 너의 앞에서 나는 내 미래를 직감했다. 도 사장은 사람을 써서 내가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나를 해칠 것이고, 나는 내가 해쳤던 다른 사람들처럼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나마 나를 이 땅 위에서 살뜰히 챙겨주셨던 집주인 할머니 부부와 미국에 계시는 엄마가 사라진 나를 걱정하겠지만, 이내 그 걱정은 내가 기억 속에서 잊히면서 같이 멈출 것이었다. 이만하면 잘 된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 네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내 살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네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내게, 너는 칭찬을 종용하다 제풀에 지쳐 그만두었다. 소파라고는 둘 자리조차 없는 좁은 8평짜리 원룸에서 유일하게 넓은 공간인 침대 위에 앉아있던 너는, 양말을 신은 발을 침대 밖으로 내놓은 채로 몸을 뉘었다. 이상하게 몸이 휜 자세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차피 할아버지는 이러나저러나 아버지가 죽기만을 바랐으니까, 네가 죽였든 심장마비로 죽었든 상관없어."

의뢰인의 정보는 대개 우리에게 비밀에 부쳐졌다. 누가 시켜서 했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게 해서, 상대로부터 2차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도 모르는 타겟의 의뢰인을 너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너는 의뢰서에 있는 내용을 미리 본 사람처럼 읊었다. 첫 번째, 자살로 위장할 것. 두 번째, 무기는 쓰지 말 것. 세 번째, 장소는 타겟의 집일 것. 네 번째, 타겟의 아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시간을 이용할 것. 마치 그 의뢰가 이뤄지던 시간에 같이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상세히 읊는 너의 모습은 B급 예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정돈되지 않고 엉망으로 일그러진 이불 위에 이 공간에서 가장 비싼 차림을 하고서도 양말만은 침대 밖으로 빼기 위해 몸을 기이하게 틀어둔 피사체, 눈에 보이는 장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형광등 조명까지 내가 보는 너의 모든 것의 현실감이 없는 순간이었다.

너는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내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상사가 너를 노리고 있다며, 그럼 이걸로 확실해지겠지. 그게 네 의심인지, 진짜인지. 어차피 우리 할아버지는 일이 이렇게 됐다고 해서 책임을 묻지 않으실 테니까."

너는 그렇게 말하며 천장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나를 보는 네 눈은 너무 올곧아서 그림 같았다. 화폭 위에 눈이 그려진 뒤로는 평생 그 자리만 지켜야 하는 눈처럼 말이다. 나를 바라보던 너는 이내 눈을 감았다.

"형광등은 눈에 안 좋아. 너희 집 조명부터 바꾸자."

나는 그런 실없는 말을 하는 너에게서 이정구가 내게 해주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는 것. 나는 어쩐지 네가 꼭 나를 살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네가 나를 살릴 수만 있다면야, 집의 조명 좀 바꾸는 게 일이겠는가. 너는 내 허락이 없었어도 우리 집의 조명을 바꾸었을 것 같지만, 나는 선심 쓰듯 그에 응해주었다.

 

네 오른쪽 복부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때, 너는 내 손에 네 휴대폰을 쥐여주었다. 나는 겁이 나 고개를 저었다. 너는 가쁜 숨을 크게 골라내 쉬며 턱으로 내 머리 위 조명을 가리켰다. 오래 쳐다보면 눈이 시려 눈물이 날 것 같은 형광등이 아니라 네가 비싼 돈을 주고 뜯어 고친 천장의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눈을 시리게 하는 조명은 없는데 눈이 시렸다. 나는 순진한 네가 어디서 또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형광등과 하나도 다를 거 없는 조명을 돈 주고 천장까지 뜯어가며 고쳤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너는 이름만 들으면 사람들이 다 아는 기업의 회장 손주이니까, 이 정도 눈탱이 맞은 걸로는 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나는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너는 이정구도 내게 해주지 못한 걸 해주었다. 나는 그 대가로, 네가 네 할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을 돕기로 했다. 이제 우리는 한 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내가 네 복수를 돕는 건 달리 말하면 내가 도 사장을 완전히 척 진다는 얘기였으므로 안전을 보장하기는 힘들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된다고 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까지 이 일에 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이쪽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김낙수는 이 일을 그만두고, 가게를 차렸다. 가게의 이름은 '백객'이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사업자 등록은 네가 해주었다.

우리가 새로 시작한 일은 둘이서 꾸려가기엔 확실히 어려움이 있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고민 끝에 정성구와 정우성을 불렀다. 신현철은 부르지 않았다. 신현철의 동생은 공무원이었고, 나는 신현철이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이쪽 바닥을 빨리 뜨기를 바라고 있었다. 도 사장 밑에서 번 돈으로 빚을 메꾸고 나면 한 사람 당 많으면 일이백 정도가 남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서울에서 한 달 생활비 하기도 빠듯한 돈이었다. 우리가 사는 집들이 다 반지하나 옥탑방, 월세방인 이유는 다 그 때문이었다. 집에 붙어 있는 날이 많이 없으니 주거비를 아꼈다. 일하면서 전국 팔도를 다 돌아다니니 차는 당연히 필요했고, 차가 있으니 당연히 유지비도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겨우겨우 한 달을 살아갈 때, 신현철은 그 돈을 아끼고 아껴서 제 동생 뒷바라지 하는 데에 투자했다. 동생 만큼은 이렇게 살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현필이 9급 생활을 하면서 7급 공무원 준비를 할 때에도, 신현철은 제 동생을 뒷바라지 했다. 그렇게 뒷바라지 한 동생이 안전한 철밥통 7급 공무원이 됐으면, 형이 된 도리로 동생에게 해가 되지 않게끔 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신현철은 이 바닥에 계속 눌러 앉아 있었다. 나는 신현철이 제 동생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현철은 이 일에 절대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정성구나 정우성은 도 사장 밑에서도 돈이 된다면야 밤낮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던 이들이었으므로, 도움을 요청하기는 비교적 쉬웠다. 일손이 모자라고, 이 바닥에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은 탓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이 일 때문에 해를 입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으므로, 그들에게도 최대한 주변부 일들을 맡겼다.

 

갑판 위에서 파티를 할 사람들은 네가 데려왔고, 나는 주로 갑판 아래에 실을 물건들을 구해왔다. 내가 구해오는 것들 중에는 숨이 붙어있는 것들도 있었고, 아닌 것들도 있었다. 너는 특히 숨이 붙어있는 것들을 갑판 아래에 숨길 때면 영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 네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네가 그런 것들을 '불편해' 한다는 게 좋았던 것 같았다. 나나 다른 애들이 별 다른 목적도 없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 살다 보니 이런 것들에 무뎌져서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렸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런 일에 좀처럼 초연해지지 않는 너를 보면서 나는 평생을 악에 물들지 않는 어떤 사람들도 있다는 감상을 받았다. 나는 절대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동경과 호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너는 나에게 그랬다.

그런 네가 백객에서 한 자리를 해보겠다며 장난처럼 거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너는 평생 악에 물들지 않고, 어떤 일에도 초연해지지 않으며, 불법적인 일에는 언제나 불편함을 내비쳐야 하는 사람인데, 네 스스로 그 역할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가 영원히 그 자리를 지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잠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이런 일을 하고 있긴 해도, 복수를 끝내고 나면 다시 네가 있던 원래 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한 번 피 묻힌 손이 다시 깨끗해지긴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안다. 피 묻은 손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는 집념만 있으면, 피를 묻히기 전의 손 만큼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는 일이 끝나면, 손을 씻고, 여기서 입었던 옷을 벗고,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너의 복수는, 우리의 복수는 실패했다. 창백하리 만치 하얗던 네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고, 너의 이름은 '최 모 씨'로 숨겨진 채 언론을 떠다녔다. 내가 호기심에 들였던 거북 때문에 너는 생태계 교란종인 야생동물을 밀반입 해 올 만큼 악성 애니멀 호더가 되어 버렸고,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들여와 사람들에게 팔았던 마약 때문에 너는 혼자 약을 하는 것도 모자라 주위 사람들에게 약을 알선하는 약쟁이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금방 너를 찾아냈고, 너의 할아버지를 밝혀내는 것도 순식간에 일어났다. 너의 할아버지는 기업 경영에 집중하느라 아비를 잃고 방황하는 손주를 신경 쓰지 못했다며 입장을 발표하고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네 할아버지의 실체를 모르는 이들은 네 할아버지가 그럴수록 너에게 더 돌을 던졌다.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너는 매주 내게 한 통 씩 편지를 했다.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이 세상에서, 그 곳에서는 너에게 연락 수단으로 편지만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너의 편지는 길지 않았다. 나에게 전할 말이 이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좀 서글프다가도, 우리가 뭐 그렇게 깊은 정을 나눴나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지라 편지 한 장도 감사히 여기게 됐다. 네 편지가 도착하는 날은 기분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땅으로 처박혔다가 하늘 높이 날았다. 한 번도 손대 본 적 없던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지도 몰랐다. 나는 약쟁이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편지에 한 줄이 추가됐다. 다음 주에 편지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약속을 지켜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네 편지가 오지 않은 지 몇 주가 지나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집에 가려는 김낙수를 붙잡아다 열쇠를 빌렸다. 너의 소식을 내 입으로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편지가 오지 않았을 뿐이지, 확실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싶었다. 네가 그 안에서 지내는 동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해서 내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등을 다는 날에는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흩날렸다. 나는 그것을 맞으며 등을 달았다. 그리고 등을 달면서 나는 이제는 인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짓을 이 날씨에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등이 곧 큰 사고를 낼 것처럼 위태롭게 바람에 흔들렸다. 김낙수는 그것이 영 불안한지 한참 동안 그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등을 보고 있기가 버거워 먼저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오래된 아파트의 낡은 베란다에 눈이 들어차 쌓여 있었다. 문 위의 차양이 길지 않은 탓에 비가 오는 날에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하다 보면 비가 들이치는 백객이 떠올랐다.

백객에 드디어 하얀 손님이 들었다.

 

hallelujah

무슨 대화를 하던 중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무튼 네가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이래서 신현철이 나를 싫어한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쳤다. 현철이는 나를 좋아한다고. 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나한테 너처럼 태어나면 그렇게 대책 없이 해맑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태어나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에 내 가슴 위로 주먹을 내렸다.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주먹이었지만 한껏 아픈 척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 위를 구르자 너는 멍 하나 들지 않았을 거라며 확신했다. 진짜 멍은 들지 않았다. 너는 내 가슴에 멍 하나 들지 않은 걸 확인하고서도 한참을 내 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우리가 쓰는 선실에서 네가 기르던 거북들은 종종 서로의 목이나 다리, 꼬리 같은 것들을 물었다. 몸집을 과시하기 위에서 엉덩이를 들어 몸을 부풀렸다. 몸싸움에서 밀려난 거북은 등껍질이 바닥으로 향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거북들은 좁은 수조 안을 완벽히 차지하려는 것처럼 매일 같이 서로의 몸을 부풀리고, 뒤집고, 서로를 물었다. 거북들이 살기가 제일 좋다는 물로 이뤄진 수조 안은 금방 피범벅이 되어 물을 갈아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배는 한 번 항구를 떠나면 며칠이고 바다 위에 있었고, 바다 위에서 구할 수 있는 물은 바닷물이 최선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잠이 든 밤에 바다의 물을 약간 퍼 올려 그 수조에 채워주었다. 거북들은 새로 채워진 바닷물에서 금방 잘 적응해서 사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활력을 잃고 스러졌다. 우리는 거북들을 바다에 내려주었다. 나는 그래도 그 거북들에 정이 들어 제법 코가 시큰했는데, 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바다를 보고 서 있었다.

술이나 약에 취한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거북이 죽었다는 말에 그들은 너무 슬프다며 눈썹을 한껏 늘어뜨렸다. 기이했다. 그들은 우리의 거북들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북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들은 이내 요란스레 웃으며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우리에게 흥미가 떨어진 탓이었다.

 

나는 거북들이 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의 목을 물고 팔다리를 물었다. 너는 내가 피 묻은 손으로 너의 손을 붙잡을 때에도, 이를 세워 너의 온몸을 물 때에도 나를 내치지 않았다. 나는 너의 온몸을 물다 지쳐 너의 위로 내 체중을 실어 엎어졌다. 너는 지친 나의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팔이 내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종일 빛 아래 있느라 지친 눈이 쉬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나는 너의 손을 내 눈 위에 덮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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